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4)
344화
“마물 토벌을 완료했습니다, 단장님.”
“그래.”
부관의 보고에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던 하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돌려 동북쪽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가 있어야 할 곳, 노비엔스는 이곳에선 까마득히 멀었다.
“……굳이 단장님께서 직접 오실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곳 가이아 왕국에서도 충분히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왜…….”
부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국의 국경을 넘어, 그 남부.
남부 산맥과 인접한 가이아 왕국의 최남단에 마물이 있긴 했다. 그것도 보기 드문 상급의 마물 키마이라가.
분명히 위협적인 마물이었지만 왕국의 초인 하나, 혹은 최상급 기사 네다섯 정도만 파견되어도 해결될 일이었다. 성국의 성전기사단장이 파견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소문처럼 교황 성하께서 단장님을 경계하시는 게…….”
“그만. 성하께 실례다.”
“……예.”
억지로 대답은 하지만 부관, 라인 하퍼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세계 최강의 기사단, 신의 뜻을 대변하는 최고의 무력 집단이라 자부하는 성전기사단의 정예가 머나먼 변방의 끝에서 굴려지고 있었으니 그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신의 적을 처리해야 하는 우리가 노비엔스의 경비에만 힘써 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마물을,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본다. 교황 성하께서도 그런 뜻일 것이다.”
“단장님…….”
라인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며 하먼은 피식 웃었다.
그 역시 바보는 아니다.
새로운 교황이 자신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교단은 새로운 상징을 필요로 한다. 내가 잠시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것만으로 성하께서 빛이 나신다면, 충분히 참을 만한 일이야.’
모든 것을 조율하시는 9대신의 뜻을 세상에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체제가 일원화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많았던 전대의 교황과는 달리, 신의 뜻을 전하는데 진심을 다할 오스틴 교황은 충분히 믿어 볼 만했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성녀의 소식은?”
“예?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달라진 것이 없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음? 이상한가?”
“아니, 아닙니다. 성녀님께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는 듯하셔서 말입니다. 원래 교단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셨잖습니까.”
“정치라……. 그건 네 생각인가?”
하먼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며 라인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교단에서 교적이라 공언한 일을 두고 정치라 말하다니.
창백해진 얼굴의 그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교단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하지만 절대, 절대 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해서 부인하는 부관 라인의 모습에서, 하먼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뭐가 문제겠느냐. 그저 신의 뜻을 곡해하여 퍼트리지만 않으면 될 일. 그것은 교단이건 개인이건 마찬가지다.”
그 말에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라인이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교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도 말입니까?”
“그래.”
그 말에 라인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한 것이다.
“그, 그런 쪽으로…… 엄격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하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대 교황도 자신을 무척 경계했었다. 하여 성전기사단 내에서도 그의 부관은 반년이 멀다고 바뀌곤 했었다. 그것도 그 이유가 자신의 고지식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금 라인이 자신의 부관이 된 지는 고작 8개월.
그 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으니, 자신의 성격을 파악하기 힘들 법도 했다.
‘나는 교단의 법을 어길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새삼 전대 교황, 그 사기꾼의 소심함에 웃음이 나왔다.
결국 그 사기꾼은 마땅한 벌을 받았다.
그 또한 9대신의 인도일지니.
“엄격한 것은 교리를 지킬 때면 족하다. 교단은 교리를 전파하고 솔선수범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곡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뒤 없는 신성 모독이 아니라 타당한 비판이라면 받아들여야지.”
하먼은 자신의 갑옷에 새겨진 9개의 동심원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맹세하듯 말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랜 시간 쌓인 이미지는 한 번의 말로 걷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신에 대한 맹세로 증명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에 라인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럼 제 목을 치거나 팔다리를 자르시진 않는…… 겁니까?”
그 말에 하먼은 순간적으로 비틀거릴 뻔했다.
아무래도 소문이 상상 이상으로 과하고 이상하게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었나?”
“그, 그게. 하, 하하. 아니 저는 정말 헛소문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정말로요!”
그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하먼 역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바꿔 나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미지에 관한 것보다는 아까 라인이 했던 말에 더 관심이 쏠렸다.
“되었다. 그나저나 정치라, 성녀의 교적 선포를 보통은 그리 생각하나?”
자신의 이미지가 험악하게 굳어진 것은 스스로가 수양과 수련에만 몰두할 뿐 타인과의 소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먼은 새삼 변화를 다짐하며 라인의 답을 기다렸다.
“……예. 사실,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일이었으니까요. 성녀님은 지금의 오스틴 교황님을 도와 가짜 교황의 본모습을 밝혀 낸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분이 가짜라고 하니까 혼란스러울 수밖에요.”
“하면, 교황 성하께서 자신의 입지를 위해 성녀를 쳐냈다고 보는 것이냐? 그래서 정치라 말하는 것이고?”
그 말에 라인의 표정이 다시 경직되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보니 곧이곧대로 답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용기를 낸 듯 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우니까요.”
“대다수의 의견이 그러한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구나.”
하먼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오스틴 추기경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큼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적어도 아직은 새로운 교황을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섣부른 짐작을 흩어 냈지만 심란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의 해결책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역시 기도와 수련으로 보내야겠구나.’
* * *
“……세상을 조율하시는 아홉 신께 바칩니다.”
달 밝은 밤.
약식의 제단도, 신상도 없는 맨땅에 무릎을 꿇은 하먼은 몸속에서 차오르는 신성력을 느끼며 신들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했음을 느꼈다.
맑은 물로 씻어 낸 듯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
그러니 이제는 육체를 깨끗이 할 차례였다.
스릉.
챙.
가볍게 뽑아낸 애검, 푸르가티오(Purgatio)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새하얀 검신을 드러냈다.
교단의 지하에 엄중히 보관된 성검, 포에나(Poena)와 견줄 수는 없지만 이 애검 역시 100명의 고위 사제가 축성한 성유물. 신성력이 충만한 검이 은은히 빛나자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드는 듯했다.
탁.
가볍게 내딛는 걸음.
그 걸음을 따라 유려하게 휘어지는 검.
달빛을 받은 푸르가티오가 그 빛을 반사하며 신성력을 뽐내니, 9대신을 기리는 행사에서 시작된 춤을 기원으로 하는 성전기사단의 검술이 아름다운 빛의 향연으로 어두운 들판을 수놓았다.
유난히 맑은 정신.
의지에 따라 거침없이 움직이는 검로가, 그 검이 뿜어내는 빛이 그에게 시원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순리를 따르는 자유.’
신의 뜻을 따르면서, 그 안에서 얻는 기쁨을 노래하는 검무.
그 검무가 절정에 달할수록 복잡하던 마음이 편안해져 갔다.
언제나 그렇듯, 기도에 이은 수련은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녀…….’
부관 라인의 말대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교단의 행태가 떠오르며 이내 그의 마음을 다시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수십 년의 부패 끝에 다시 올바른 길을 찾은 교단.
결국 모든 것이 신의 뜻을, 순리를 따라가리라 믿었던 그 마음이 보답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사제와 진짜 성녀, 그 두 사람의 조합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행태라니.
‘오스틴 성하. 그 올곧았던 신심이 이토록 금세 욕망에 침식되어 버린 것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 성전기사단은 교단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평생을 가슴에 새겨 온 교단의 법률이 그의 마음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그 법에 따라 또 전대의 교황과 그 일파가 교단을 어지럽혔을 때처럼 침묵해야 할 것인가.
탄핵 사건 때, 제게 간청하던 신실한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 성전기사단장님께 추기경의 권한으로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 단장님. 바라옵건대…….
그때의 성녀는, 분명 신을 향한 올곧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보아 온 오스틴 교황. 그리고 한순간에 그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 주었던 성녀.
그 두 사람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서 충돌하며 깨끗했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스각.
아름답기만 하던 검무에 파열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의 검이 닿는 곳곳에서 살벌한 기세가 뻗어 나갔다.
좀 전까지의 검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평화였다면.
이번에는 분노.
신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징벌의 철퇴가 검의 모습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에 현현했다.
촤아아악.
뻗어 나가는 검 끝이 공간을 베어 내자, 그 일직선상에 자리했던 모든 것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검이 닿지 않는, 족히 100여 미터는 떨어진 숲속의 나무 역시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
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단죄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빚어낸 무술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수를 뒷받침하는 것은 신이 그에게 하사한 신성력이었다. 그의 몸 안에서 끊임없이 맞물리며 활력을 불어넣는 신성력과 포스의 연계가 연달아 그의 검을 움직였다.
동시에.
쩌저저저적.
우르르르릉.
그의 검이 향하고 닿은 모든 것이 제 형상을 잃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검 하나로 만들어 낸 참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적.
하지만 그 파괴의 이적을 행하는 자는 적당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주변의 모든 것이 뒤집히며 본래의 형상을 잃어 가고 있음에도 그 참상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심중에 자리한 분노와 갈등을 모조리 풀어낼 때까지 그 검무를 이어 갈 예정이었다.
누군가 방해하기 전까지는.
– 하먼 경! 멈추세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높고 맑은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잠재웠다.
그리고 그는,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상기해 냈다.
“성녀?”
순식간에 멈춰진 검.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검은 복면인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 거리에서 어떻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힘…….”
검격의 여파에 닿은 듯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복면인의 손에는 부러진 검이 들려 있었다.
그를 본 하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긴 거리를 뚫고, 복면인의 경지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해 내는 특이한 능력이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대단하긴 하지만…….”
확실히 조금 전 들린 높은 목소리의 주인은 아니었다.
“……내게 숨어서 접근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자신의 심상이 준 착각이었는가.
하먼이 옅은 분노를 담아 복면인을 노려보는데.
–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착각인가 했던 그 목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뒤쪽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성스러운 기운이 퍼져 나왔다.
하먼으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이능의 느낌, 신성술의 결계였다.
아무래도 저 복면인은 자신의 검격에서 저 결계를 지키려다 다친 듯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한 여성의 모습이 그의 직감이 맞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하먼 단장님.”
성녀.
그 뜻밖의 등장에 하먼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