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5)
345화 ‘괴물…….’
빅토르는 아직도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하먼을 노려보았다.
육체의 충격은 이미 회복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바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사방 100m 범위를 모조리 갈아엎는 칼질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였는데, 그 여파가 결계를 흐트러트릴 것 같아 나서서 막은 것뿐이었다. 즉, 밀려오는 충격파를 막았을 뿐인데 마치 공간 전체가 압축되며 자신을 후려친 듯한 반발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 내가 검격도 아니고,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자가 성녀님께 해를 끼치고자 하면, 나로서는 막지 못한다.’
– 신검이 성녀를 잡고자 하면, 저항하지 말고 보내 주어라.
주군의 지시가 어떤 의미에서 내려진 것인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신검. 그 이름이 전혀 새롭게, 막대한 존재감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그 충격에, 빅토르는 어느새 하먼에게 다가가고 있는 일리아를 막지 못했다.
“이, 일리아 님!”
뒤늦게 그것을 인식하고 소리쳐 보지만.
“괜찮아요. 물러서세요.”
지켜야 할 대상은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다독였다.
그 모습에 무력감을 느낀 빅토르는 이를 악물며 바로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성전기사단장, 하먼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녀를 맞이하는 신검의 태도가 정중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빅토르는 인간 형상의 괴물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교적으로 선포되었음을 압니다. 그런데 과한 예의를 보여 주시는군요.”
“성녀님을 한 번이라도 뵌 적이 있다면, 무언가 잘못됐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겁니다.”
일리아는 고지식한 것으로 유명한 신검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예.”
“제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일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하먼은 복면을 쓰고 있는 자에게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실력은 제법인데, 어디의 사람인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아직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의 거부에 하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죄송하지만 단순히 교단 내부의 정치 싸움이 아니라 성녀께서 외세를 끌어들이신 것이라면, 저 역시 교단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칼자루에 다시 손을 가져가는 것.
그 동작만으로 주변이 다시 삼엄한 기세에 휩싸였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었다. 일순간 십여 미터의 공간의 흙먼지가 확 하니 밀려나며 복면인, 빅토르가 있는 공간까지 단숨에 자신의 권역 안에 둔 것이다.
그에 빅토르 역시 바로 앞으로 튀어나오려는데, 가녀린 팔이 그의 진로를 막았다.
“절대! 절대 그런 것은 아니에요.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먼은 성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없이 올곧은 눈빛, 그리고 성직자의 눈에만 보이는 휘광이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전대 교황의 탄핵 심판일에 거짓된 휘광을 벗겨 냈던, 그 성스러운 빛이 예전 그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먼은 교단의 선포가 거짓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믿겠습니다.”
“감사해요.”
말 한마디로 바로 경계를 푸는 하먼과 웃으며 인사하는 일리아.
빅토르는 그 간격을 따라잡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두 사람은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다?”
“쉽게 믿으실 수 없겠지만…….”
일리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겪었고 경험했던 모든 일을 상세히 말하면서 현재 교단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합리한 조처들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 긴 이야기에 덧붙여진 호소가 끝났을 땐 어느새 기나긴 밤이 지나고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여서였을까.
그 말을 하는 하먼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교황 성하의 법관, 센텐티아(Sententia)는 9대신의 성물 중 하나. 그것을 가지신 성하께서 스스로의 정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트레이시가 신성력을 우회하여 정신을 조종할 수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신의 힘을 조작할 수 있다……. 그 말 자체가 신성 모독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먼의 싸늘한 목소리에 일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 모습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먼은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분이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직접 징벌을 시행했을 겁니다.”
한숨 섞인 어조에 담긴 뜻은 분명한 호의였다.
그러나 그게 하먼이 완전히 설득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교단으로 돌아가서,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난 뒤에 판단하겠습니다. 바로 호응해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험할 일 없습니다. 성녀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나 성녀님을 세뇌할 능력은 없을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무력으로 단장님을 구속하거나 하면…….”
“누가 말입니까?”
“아무리 단장님이라도 지금의 노비엔스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꽤 많은 것이 가능합니다. 제 권한으로 비상 상황을 선포하면, 성국 최강의 무력 단체인 성전기사단은 교황 성하의 말보다도 제 말을 따르게 됩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감히 누가 저를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뱉어 내지 않은 뒷말이 일리아와 빅토르의 머릿속에 확연히 박혀 들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하먼의 그 자신감은 두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제 마음과 머리는 성녀님을 믿으라 하지만, 제 지위와 입장은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외양만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얼굴, 흔한 갈색 눈동자가 무서운 압박감으로 그들을 짓눌렀다. 상처를 입히진 않겠다는 듯, 거칠지는 않지만 꼼짝할 수 없게 전신을 옭아매는 기세가 사방을 뒤덮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웃기지 마시오!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복면인, 빅토르가 성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단숨에 자신의 기세를 가르고 앞으로 튀어나온 빅토르를 보며, 하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살짝 놀란 듯한 얼굴.
이내 무거운 눈으로 빅토르와 일리아를 한 번씩 바라보던 하먼은 그들을 더 압박하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변한 것은 그 한 걸음뿐이었다.
“거부하시겠다면 저는 성녀님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제게 믿음을 주십시오.”
“성녀님!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따르실 필요 없습니다!”
하먼의 말과 빅토르의 고함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그때.
“……저를 잡았다는 구실이면 단장님께서 성도로 돌아갈 만한 명분으로 충분하겠지요. 좋습니다.”
“성녀님!”
일리아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놀란 빅토르가 고개를 획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반항하지 마세요. 이것이 최선이다.
그 메시지를 읽어 낸 빅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 하먼이 그런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무력하게 끌려가는 것 같아 싫은가? 젊은 친구 같은데 역시 호승심이 대단하군. 한 번 기회를 줄 수도 있는데, 덤벼 볼 텐가?”
“웃기지 마시오. 지금 당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하먼의 도발에 넘어간 빅토르가 투기를 더욱 키우는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를 막아 세웠다.
“흥분하지 마세요. 하먼 단장님은 당신의 신분을 알아보려는 것뿐이니까.”
“성국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깁니다, 성녀님. 어차피 알게 될 것을…….”
하먼은 일리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 복면 속 빅토르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지만, 일리아는 그저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요. 그는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겁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셔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단장님은 성녀가 자결하는 것을 보시게 될 테니까.”
평온한 어조와 달리, 어느새 그녀는 자그마한 비수 하나를 꺼내 들곤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에 닿은 여린 피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성녀님!”
경악에 찬 빅토르의 고함 뒤로, 하먼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진심이시군요.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도움을 받은 처지에서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저들이 성녀님을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렇게 젊은 나이의 초인이 있는 집단은 들어 본 적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때는 제가 직접 소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리아는 단호한 얼굴로 하먼의 말을 끊었다.
하먼이 더욱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다무는데, 엉뚱한 곳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 저도 제 임무가 있습니다! 성녀님을 위험에 빠트리고서 그냥 갈 수는…….”
“제가 하먼 단장님을 만나게 하는 것까지가 경의 임무였겠지요. 그러니 이만 ‘그분’께 돌아가세요. 그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경에게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일리아.
그 모습이 마치 생의 끝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아, 빅토르는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까득.
이를 악물고 휘두른 검이 일순간 소리도 없이 공간을 단축했다.
꽈아아아앙!
빅토르와 하먼, 둘 사이에서 갑자기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만큼은 일리아도 알고 있었다.
충격으로 부릅 뜨인 눈, 벌어진 입이 자연스레 비명을 토해 냈다.
“안 돼!!”
하지만 다행히도 충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십자의 모양으로 교차한 두 자루의 검. 회색의 오러와 휘광이 섞인 은빛 오러가 치열하게 맞물리는 가운데, 새까만 복면 밑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그 우위가 어디에 있는지 확연하게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순간의 기세만큼은 복면인, 빅토르도 신검 못지않았다.
하먼이 그 갈색 눈동자에 놀란 빛을 담아 빅토르를 바라보는데, 슥 하고 갈라진 복면 사이로 나타난 붉고 푸른 오드아이가 그의 눈을 매섭게 응시해 왔다.
“혹시라도 성녀님께서 잘못되시면…….”
핏물이 흥건한 입에서 가당치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 내가 반드시 죽인다.”
분명 뛰어나지만 아직은 한참은 모자란 경지였다.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인데 하먼은 무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도록 하지.”
특이한 오러의 빛깔, 독특한 오드아이, 갈라진 사이로 살짝 드러난 푸른 머리카락까지.
당장은 몰라도 조금만 조사하면 금방 그 정체가 밝혀질 만한 특징이었다.
하지만 하먼은 성녀가 애써 숨겨 주려 한 정체를 고스란히 까발려 버린 이 젊은 초인이 조금도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검의 교환에서 느껴진 진심이 그의 마음을 내리눌렀을 뿐.
‘그 참람한 얘기가 사실이란 말인가.’
크나큰 부침을 겪은 교단에 다시금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일이다. 그러나 제발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미 급속도로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단순히 교단에 대한 걱정뿐만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침범하는 마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럴 수가.’
그의 사상 근본을 흔드는 문제까지 겹쳐진 일이었다.
하먼은 교단으로 향하는 길이 벌써부터 너무나도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