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7)
347화 ‘이게 무슨…….’
그래. 연기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 잘 아는 이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살이 떨리는 판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하자니 정말 못 해먹을 짓이었다.
그것도 그 대상이 옆 나라 국왕이라면 더더욱.
‘저번에도 무진장 떨렸었는데. 젠장, 폐하께선 언제 오시는 거야!’
의지할 곳이라고는 통신구 뒤쪽의 사각에서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두 문관, 드웨인과 데미안뿐이었다.
릭은 떨리는 눈동자를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의연한 모습을 연기했다.
그러나 릭의 그런 복잡한 심정을 알 리 없는 상대는 통신구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한껏 토해 내고 있었다.
[웃지만 마시고 말씀을 좀 해 주시오! 아니 대체, 가일 그자가 왜 제국에서 분탕을 친 겁니까!? 왜 본국이 제국의 협박을 받아야 하냔 말입니다! 아무리 맥라인이 베푼 은혜가 있다 해도 이건 명백히 협약 위반입니다! 위반!]통신구 속 리버티의 국왕, 크란 3세의 말에는 확실한 논거가 있었다.
원치도 않는 연기를 하다가 국가의 중대사까지 떠맡게 된 사람이야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통신이 오기 전 그 무책임한 주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미 대책은 준비되어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이미 그가 리버티로 가고 있으니 알아서 대처할 것입니다.”
심정과는 다른 여유로운 미소, 유연한 말투는 지켜보던 드웨인과 데미안까지 엄지를 치켜들 만했다.
물론 길길이 날뛰고 있던 상대방은 그 말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뭘 어찌 대처하겠단 말입니까! 제국입니다, 제국! 제국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는데……!]“제국에서도 공개적으로 내보인 입장은 아닐 텐데요.”
아무리 초인이라도 단 한 사람에게 수천 명이 동원된 사업이 털렸다. 그것도 소국의 초인에게.
절대 공개적으로 떠들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우리로서는 그게 그겁니다! 비밀리에 전해 온 항의라 한들 무시할 수 없단 말입니다!]“무시해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말씀하지 마시오! 최악의 상황에는 국민의 박탈감을 무시하고서라도 가일의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크란 3세가 그리 소리쳤지만, 그 말 역시 예상하고 있던 범위 안이었다.
리버티 왕국 최전성기를 이룩한 초인이 타국의 인물이다?
그걸 밝히는 순간 정복지에서 터져 나올 반발과 자국민들의 실망을 과연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 리버티와 테로난은 지금 유례없는 격동기를 겪고 있다. 최악의 경우엔 왕실이 뒤집힐 수도 있어. 절대 그러진 못해.
주인의 말을 떠올린 릭이 조소를 흘렸지만, 그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 사람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곧잘 감정적으로 움직인다. 특히나 자신이 남들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하다. 그런 자들은 자존심이 상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 아하! 폐하 어릴 때처럼요?
– ……끄응. 그, 그래.
자신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주인의 말은 설득력이 넘쳤다.
그것을 떠올린 릭이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이미 예상하고 벌인 일입니다. 그러니 가일이 알아서 수습할 겁니다.”
[아니, 그게 말도 없이…….]“여차하면 본국에서도 도와드릴 테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체 어떻게 수습하겠다는 겁니까? 제국에서는 가일 슬레이어의 목숨을 원하고 있습니다!]엑? 목숨?
여기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당황한 릭의 눈이 빠르게 통신구 뒤쪽을 훑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후다닥 종이에 글을 써서 들어 올렸다.
릭은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리며 그 글을 따라 읽었다.
“……하하. 거래의 기본은 협상에 있지요. 일단 과한 요구를 던져 놓고 차차 맞춰 갈 생각일 겁니다.”
다행히 말투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일 공에게 맡기고 지켜보라는 말입니까?]“그렇습니다. 그리고 설령 무언가 틀어진다 한들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헛웃음을 짓는 크란 3세의 얼굴을 보며, 릭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저희 맥라인이지 리버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는 어떤 상황에서건 제국에 길을 내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상호 방위 조약’은 굳건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있는 한 제국은 귀 왕국을 어찌하지 못할 테니까요.”
[…….]우리가 제국을 상대하겠다.
누가 들어도 과한 자신감이라 할 말에 크란 3세는 일순간 말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에 현실적인 제안까지 더해졌다.
“만약 가일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제국에서 과한 보상을 요구한다면, 저희 왕국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정말 그래 주실 겁니까?]“물론입니다.”
릭, 아니 로건의 미소는 크란 3세를 완벽히 안심시켰다.
물론.
띠. 띠. 띠.
“흐아아아.”
통신이 끝나자마자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 릭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수고했다, 릭.”
“아흐흐, 심장이야. 제가 왜 외교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전 왕궁의 소사만 관리하기에도 벅찬 깜냥이라고요!”
“이제 끝났어. 수고했다니까. 아, 뚝!”
드웨인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울듯이 한탄하는 릭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내 진정한 릭이 벌떡 고개를 들고는 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계획된 일 맞습니까? 폐하께선 금방 돌아오시겠다더니 왜 이런 일까지 벌이신 거래요? 예?”
로건의 얼굴로 소리치는 릭의 모습.
그 괴리감은 둘째치고, 드웨인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기에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데미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일로 변장하는 것까지는 사전에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건 나도 아는데.”
“나도.”
“……그럼 저도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
데미안의 말에 드웨인과 릭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뭔가 좋은 생각이 나신 건가 보네요. 살 떨리게.”
“그러게나 말이다. 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신 것 같은데.”
충동적이라는 말에 그 말을 뱉은 사람부터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로건이 저지른 충동적인 일 때문에 심장이 내려앉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한 사람들뿐이었으니까.
‘제발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시길.’
그들은 그저 한마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 * * [가일 슬레이어……라.]
“게로힌 장로를 죽인 자입니다.”
어두운 암실.
유일하게 빛을 뿜어내는 통신구 속에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을 들었었지. 그나마 작은 나라의 초인이라 다행이군.]“예, 그렇습니다.”
작은 나라의 초인이라는 것이 왜 다행일까.
누가 들었다면 의아해할 만한 대화였지만 당사자들은 완전히 납득한 얼굴이었다.
“저를 포함한 장로 셋이 동왕부의 이름으로, 제국의 사절에 합류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그래, 무슨 짓을 벌여도 좋다. 성검을 찾아와라.]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스산하게 웃었다.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면 제국에서 기획한 전쟁이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더 좋지.]통신구 속 노인, 대스승의 웃음은 너무나도 순박해 보여 더욱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는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꾸벅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니, 아예 확실히 하기 위해 다섯이 가거라.]“예?”
그 말에 사내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장로 다섯이라면, 동대륙에 있는 탑의 정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총력을 다하라는 명령.
[애초에 황제의 눈길을 지나치게 끌까 봐 하비에게만 맡긴 것이 실수였다. 하지만 어찌 보면 오히려 잘된 상황이야.]좀 특이한, 지위에 비해 능력이 모자란 녀석이기는 해도 초인이다.
장로가 죽었는데 잘된 일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사내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데, 대스승은 그런 그의 기분 따윈 관심도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이제 제국 밖에서 우리가 직접 성검을 얻어 내고, 황제에게는 다른 아티팩트를 주면 그만이다. 그럴듯하게 눈을 속일 대체재야 많으니.]“아…….”
[그러니 다섯이 가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실하게 성검을 회수해.]“예!”
[‘신들이 떠난 시대’를 우리 손으로 앞당길 수 있게.]조직의 목표.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이룬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손이 환희로 떨렸다.
* * *
“동왕부에서 인원을 차출해 주시겠다고요?”
클리드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티를 여실히 냈다.
‘이자가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통신구 속 동익왕, 제라드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우리가 보낸 인원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해내지 않았나. 사죄의 의미로 자청한 것이네.]“죽은 마도사 때문입니까?”
[……그거까지 알고 있었나. 뭐, 부인하지 않겠네. 개인적으로 아끼는 인재였으니 그의 목숨값도 받아 내야지.]“그렇다면 안타깝게도 거절해야겠군요.”
[음? 조카님, 지금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가?]“그렇습니다. 저는 놈을 찾아 처리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거든요.”
[음?]“전 이 사건을 구실로 리버티 왕국을 제국에 복속시키기를 원합니다. 정확히는 제 뜻에 따라, 그것도 은밀하게 말이죠.”
[오, 그런가. 멋지군. 자네는 역시 그릇이 커.]“별말씀을. 그래서 죄송한 말입니다만, 전하의 도움은 거절해야겠습니다.”
계승전의 점수를 위해서라도 과도한 도움은 피해야 했다.
실없는 칭찬 따위는 그저 무시하려는데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내 말을 오해했군. 내가 말한 목숨값 역시 대가를 받아 내겠다는 걸세. 설마, 내가 무슨 복수라도 원하는 줄 알았나? 그런 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하?
딸이 암습을 당한 사건조차 웃어넘긴 자다운 말이라 클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면?”
[인솔자는 자네가 정하게나. 나는 그저 보조자들을 다수 보낼 터이니. 그리고 엄밀히 말해 유적에 대한 제보도 내가 하지 않았나. 한데 우리 측 사람 없이 어찌 제대로 추궁을 하겠는가. 그러니 일을 처리할 때, 우리 쪽 대가도 조금만 챙겨 주면 되네.]“흠…….”
클리드는 통신구 속 능글맞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저 동익왕이라는 작자가 얼굴만 봐서는 결코 속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체감했을 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목표는 유물의 회수가 아닌, 리버티의 완전한 항복입니다. 그 약속과 증거를 받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에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하겠지요.”
[하하. 계승전을 걱정하시는가. 걱정할 것 없네, 조카. 내가 그리 눈치가 없진 않아. 동왕부의 전력은 쓰지 않을 것이네. 게다가 애초에 같이 시작한 일이니, 설령 폐하께서 아신다 해도 감안해 주실 걸세.]이래서 이 사람은 짜증이 난다.
한마디를 하면 그 안에서 모든 추론을 해 가며 속을 파헤친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말까지 꺼내 들어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 웃음과 어울려 더욱 거슬렸고, 그 말에 틀린 점이 거의 없다는 게 더욱 짜증을 부추겼다.
[우리 쪽 사람은 딱 다섯만 보내겠네. 충분히 도움이 될 걸세.]여러모로 못마땅했지만 딱 거슬리지 않을 숫자였다.
‘정말 친조카 대신 나를 돕겠다는 걸까.’
하지만 유적이 진짜로 증명이 된 지금에야 어느 정도는 믿음을 줘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 배신하기 위해 신뢰를 쌓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경계를 내려놓아선 안 돼.’
클리드는 그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냥 웃었다.
“좋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삼촌'”
[아니, 아니다. 내가 돕겠다고 한 일인데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조카.’]서로를 보며 웃는 모습에 진심이라고는 단 1%도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