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8)
348화
“어서 오십시오. 본국의 군주이신 크란 3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버티 왕국의 후작이자 재상, 조던 말린즈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 인사를 받은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그 무례한 태도에도 조던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머리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한 기색으로 그 일행들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초인이 직접 오다니, 그 작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제국의 비밀 사절, 그 가장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에 무표정한 얼굴,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백발이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 날카로운 눈매가 그 싸늘한 인상을 더욱 강조하여 시선을 마주하면 뼛속부터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올해 나이 63세. 제국 동부 1군단의 군단장, 그리트 아인츠하인.
제국의 초인 중 한 명이 공식도 아닌 비공식 사절로 리버티에 방문한 것이다.
조던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슬쩍 닦아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마창(魔槍, Devil spear)의 위명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내.”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얼굴만큼 싸늘한 한마디뿐이었다.
조던은 자기도 모르게 굳어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예. 물론 안내해 드려야죠. 따라오십시오.”
아무리 제국의 초인이라도 타국의 귀족에게 존대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절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리도 오만한 작자라니. 설마 전하께도 무례를 범하지는 않겠지?’
이 방문이 비공식적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무도한 광경을 목격한 이가 많지 않을 테니까.
‘빌어먹을. 가일 그 작자는 대체…….’
감히 사절에게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기에 불쾌한 감정은 가일 슬레이어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서도 변하지 않는 그리트의 태도에 한층 더 심해졌다.
비밀 사절인 만큼 대전에서 신하들을 거느린 채 그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왕의 체면은 지켜야 하기에 그와 대면하기로 한 장소인 집무실 앞에 기사를 배치해 두었다.
한데 그 기사가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쾅.
그리트의 가벼운 손짓에서 뻗어 나간 붉은 포스가 대전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지켜보던 리버티 관계자들 모두의 표정이 굳어지고, 열린 문 안쪽의 크란 3세 역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표정을 고수한 그리트는 그를 따라온 일행 다섯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들은 밖에서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각하.”
조던은 제 일행들을 보는 그리트의 눈빛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리버티의 왕궁 안인데도 왕궁 관계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를 따라온 다른 일행,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을 경계하는 느낌이랄까.
‘착각이겠지.’
험악한 분위기를 견뎌 내려고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던은 그런 자신을 탓하며, 성큼성큼 집무실로 들어서는 그리트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제국의 백작, 그리트 아인츠하인이 리버티의 군주를 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가슴에 주먹을 대는 그리트의 예는 지나치게 간략했다.
그에 왕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군터 리버티와 호위기사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크란 3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이다, 백작. 좋은 일로 얼굴을 봤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해 과한 인원을 준비한 것을 이해해 주시오.”
허물을 말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어조. 크란 3세의 말에는 흠잡을 것이 없었다. 비밀 대면을 위한 집무실 안에 초인 군터 리버티와 호위기사 20여 명을 대동한 건 확실히 과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 말을 들은 그리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개의치 않습니다.”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가 바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그 모습에 크란 3세를 비롯한 리버티 인물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국에서도 유명한 초인, 동부 1군단장의 이름은 물론 허세일 수 없다.
그러나 사절이라는 명목하에, 악마의 창이라는 무명을 만들어 준 무기는 이미 왕궁 밖에 묶어 둔 뒤다. 오러유저 중급의 군터 리버티를 비롯하여 20명의 정예기사라면 아무리 마창이라도 맨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크란 3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거겠지.’
웬만한 무례도, 행패도 참아 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리버티와 제국의 차이다.
그는 짧은 헛기침으로 불편한 마음을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흠……. 그렇다면 됐소. 이미 전달받은 내용이 있긴 하지만 사절을 통해 정식으로 용건을 들었으면 하는데.”
“가일 슬레이어라는 작자의 목과 그자가 제국의 영토에서 가져간 보물……입니다.”
말의 내용은 짐작 그대로였다.
다만 싸늘한 목소리로 곧장 튀어나온 대답 뒤, 한 박자 늦게 붙은 존대는 실수일까, 고의일까.
표정이 한층 굳어진 크란 3세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대처는 구상해 놓은 뒤였다.
“……가일 슬레이어 대공은 우리의 전쟁 영웅으로, 우리 왕국 내에서만큼은 그 처신에 무한한 자유가 있소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뿐이오.”
그 말에 그리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어찌 결론이 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권한만큼 책임도 따르기 마련이니, 가일 대공이 스스로 잘 수습할 것이라 믿소이다.”
크란 3세의 답을 들은 그리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전하.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신 것이 맞습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소.”
그리트의 무례한 반문에도 크란 3세는 그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에 그리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자국 초인의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 아닌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수였다.
– 보물을 꼭 회수하되, 그보다 중요한 것이 리버티의 굴복입니다.
신신당부하던 1황자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원래 계획이 너무나도 쉽게 어긋났다.
강한 태도를 고수하는 협상 끝에 가일이란 놈의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을 대가로 속국이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유적의 보물과 리버티의 국보 한두 개를 챙겨 가는 것.
그것이 본래 목적이었는데 어째 시작부터 틀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강경하게 나갔던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 아니야. 다소 어긋나면 어떤가. 제국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1황자의 부탁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달갑지 않았었다.
충실한 부하였던 야셀과 정예기사들 100여 명의 목숨값이 고작 이런 소국의 굴복이라니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자에 대한 처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제국에서 귀국에 요구하는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상에 없었던 대답을 한다면. 예정에 없던 요구를 추가할 수밖에.
그리트의 말에 크란 3세의 얼굴이 한껏 경직되었다.
“무슨 뜻인가?”
“그자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그자가 지되, 리버티의 대공이 제국에 저지른 무례는 리버티의 왕실에서 보상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는 오만한 표정.
그에 대한 답은 왕의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쾅!
“과하지 않나, 그리트 백작!”
발밑의 대리석이 그대로 깨어져 나감과 동시에 그리트의 전신으로 엄습해 오는 기세.
하지만 위압감을 주려던 기세는 그리트의 몸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봄바람처럼 사뿐하게 흘러 지나갔다.
그리트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오르고, 군터 리버티의 얼굴이 더 경직되는데.
“……그래 무엇을 더 원하는가?”
굳은 얼굴의 왕이 손을 들어 동생을 말렸다.
“리버티 왕국이 제국을 상국으로 섬긴다는 서약과 함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볼모나 증거를 받아 가고 싶습니다, 전하.”
과하다.
너무 과하다.
이건 마치 구실이 생긴 김에 나라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뜻이 아닌가.
자연히 크란 3세에게서도 언짢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의할 수 없다면?”
“황제 폐하의 분노를 감당하셔야겠지요.”
감히 네가 그 무서운 일을 감당할 깜냥이 있느냐, 라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제국과 국경도 맞닿지 않은 리버티 왕국에서 황제의 위엄이란 건너 건너 들은 다른 나라의 풍월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리트의 저 말은 일부 호위기사들에겐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힘을 알고 있는 크란 3세는 그렇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 제국은 이 일을 구실로 리버티 왕국을 완전히 복속시키려 들 겁니다. 예? 아, 가일의 행동에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사과드리지만, 글쎄요…….
–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무슨 꼬투리든 잡아서 그리했을 자들입니다. 증거요? 직접 겪어 보시면 바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맥라인에서 전해 온 말이 그의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리트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가일 대공에 대한 처분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말은 그 속셈을 차치하고 들으면 전적인 굴복의 표시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맥라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제국이냐, 맥라인이냐.
국력만 따지자면 당연히 제국의 편을 들어야겠지만, 멀리 있는 용 때문에 가까이 있는 마수의 수염을 뽑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리버티는, 용이 아닌 마수도 이겨 낼 힘이 없었다. 이미 그랑에 가 있는 후계자를 포함한 볼모들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게 다 우리 왕국에 힘이 없어서…….’
책상 아래, 불끈 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야말로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는 달리 그에겐 지금 선택지가 없었다.
아직 가일이 리버티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저 제국과는 달리, 맥라인은 제국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대응법까지 알려 주었으니까.
“……모든 것은 가일 슬레이어 대공과의 일이 끝난 다음에 논의하시지요.”
그 말이 의외였을까.
“……전쟁 영웅이라더니, 그자가 전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그리트는 담담한 어조로 대놓고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데 이어진 대답이 놀라웠다.
“실제로 그렇소이다.”
가일이 아닌 맥라인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크란 3세의 진심.
그 진심이 숨겨진 말은 그리트뿐만 아니라 리버티의 충신들까지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고 당황하는 그들을 보며, 그리트 역시 처음으로 표정이 무너졌다.
‘아니, 무슨 왕이…….’
신하가 왕보다 더한 권력을 가지는 것이 역사에 없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왕이 그 사실을 타인 앞에서, 아니, 타국의 사신 앞에서 인정한 일이 있었던가.
‘……자존심도 없나.’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일 대공과의 일이 그대의 뜻대로 마무리된다면, 나는 제국의 요구를 따르겠소. 하지만 만약 그대가 가일 대공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모든 요구를 접고 그대로 물러나 주시기를 바라오.”
절로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는 말.
‘마치 독으로 독을 처리해 달라는 말 같지 않은가.’
소문에 의하면 가일 슬레이어는 오러유저 중급이었다. 설령 그가 굉장히 특이한 특성이 있다 한들 상급인 자신에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왕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소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설마 상급 이상……? 그럴 리가.’
소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초인이 자신 이상의 강자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마냥 자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려하던 것도 잠시, 그리트는 이내 자신과 함께 온 동왕부의 사절들을 떠올렸다.
무슨 수를 썼는지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는 그중 일부가 가진 힘을 눈치채고 있었다.
일행 중 적어도 두 명은 마도사가 분명했다. 너무 놀란 탓에 황실에 은밀하게 보고를 넣기까지 했다.
다만, 말도 안 되는 메시지만 돌아왔기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 황제 폐하께서 암묵적으로 허락하신 이들이다.
황제께서도 허락하셨다면 아무리 수상해도 일단은 아군이다.
‘그놈들을 먼저 내보내고…….’
마도사가 숨어 있는 일행들을 먼저 내보낸 뒤에 자신이 나서면 설령 놈이 상상외의 실력자라 한들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거, 이거 제가 전하께 큰 도움을 드릴 수 있겠군요. 리버티의 암 덩어리를 제가 치워 드리지요.”
그리트는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왕의 말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