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49)
349화고풍스럽게 꾸며진 옛 고성.
일행이 해자를 넘어가자 곳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절도 있는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 이어진 몇 번의 검문 끝에 일행은 내성의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거대한 돌로 된 문을 앞에 두고, 일행을 안내하던 기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저곳이 바로 가일 대공께서 폐관 수련에 임하고 계신 곳입니다.”
그 말에 뒤따르던 이들 가운데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왕국의 주인이 저 가일이란 자를 버리기로 했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 안내하는 기사는 여전히 그 버려진 말을 존중하는 기색을 내보이고 있는 모습이 웃겼던 것이다.
“리버티에서는 그 가일 대공의 위치가 그리도 컸나?”
그리트의 부관 역할을 겸해서 따라온 1군단의 만인장, 얀센이 그리 묻자 그들을 안내하던 리버티 기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씀을 조심해 주십시오. 가일 대공께선 구국의 영웅이십니다. 이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할 만한 분이지요.”
기사의 불편한 심정이 분기 어린 표정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네가 지금 그 구국의 영웅을 끝장낼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느냐.
얀센의 머릿속에 그런 짓궂은 물음이 떠올랐지만, 그리트의 눈짓을 받은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레스라고 했던가?”
그리트의 눈빛이 뒤를 향하자 일행의 중앙에 있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렇소이다, 백작.”
칼칼한 목소리.
가레스가 로브의 후드를 젖히자,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인이 모습이 드러났다.
제국의 군단장이자 백작, 그리트 아인츠하인에게 대놓고 평대를 하는 그 모습에 사절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군단 기사들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동왕부에서 만나서 리버티까지 오는 내내 그러했음에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여전히 그 정체를 모르는 탓이 컸다.
“그대들이 먼저 나서 줘야겠다.”
“초인을 상대로 말이오? 우리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실 텐데?”
“……엄살 피울 필요 없다. 그대가 마도사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 말에 기사들 사이에 놀란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가레스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을 뿐 이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창의 명성이 과한 것은 아니었군요.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겼는데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할 필요도 없다. 동왕부에서도 날 그대들의 인솔자로 인정했으니, 그대들은 내 명을 따라라.”
“명이야 따르겠습니다만, 효율의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효율?”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기 방패 정도는 필요합니다만.”
고기 방패.
그 도발적인 단어 선택에 기사들은 물론 그리트의 안색까지 굳어졌다.
하지만 가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럴 사람이 없다면 저희는 그냥 뒤에서 돕게 해 주시는 게 전체 전력상 효율적이라 사료됩니다.”
“마도사씩이나 되어서도 몸을 사리는가.”
“몸을 사려서 마도사가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겁니다.”
그 은근한 타박에도 가레스는 웃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리트는 그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최소 마도사 둘, 거기에 정말 실력이 없는 것인지 능력을 숨긴 것인지 모를 마법사가 셋.
그 셋 5서클 수준만 되어도 자신을 포함한 사절단 나머지 전력에 필적한다.
거기다 혹시나 한 명이라도 자신의 감각을 벗어난 마도사가 있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세상에 초인이 그리 흔할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트가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얀센, 파브르, 엔리케. 너희 셋이 지휘를 맡아라. 나머지 기사들 모두가 전위로 나선다.”
“예!?”
“유사시에는 내가 나서겠다. 반론은 받지 않는다.”
기사들의 반론은 권위로 찍어 눌렀다.
저 동왕부의 마법사라는 자들이 찜찜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아군이다.
1군단의 정예들은 군단장의 명에 금세 수긍했다.
기사 20명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자 가레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모든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방해물을 치울 차례다.
“그대들은 이제 돌아가라.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그분께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험악한 분위기에, 성을 지키던 기사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이 나라의 왕이 허락한 일이다.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이만 물러서라, 기사.”
“그런!”
“이봐…….”
기사 몇몇이 붉어진 얼굴로 나서려는데, 주변의 동료들이 오히려 그런 기사들을 말렸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리버티의 기사들이 참혹한 얼굴로 물러섰다.
“흥. 주제를 모르고.”
얀센의 비웃음에 물러서다 말고 발끈한 이들도 있었지만 이내 모두가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설 뿐이었다.
아마도 이날은 그들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비참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그리트는 그리 생각하면서 앞선 부하들을 향해 턱짓으로 지시했다.
그러자.
“합!”
그그그긍.
얀센을 비롯한 최상급기사 셋의 고함과 함께 거대한 석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수련 시간에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내 석실의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빛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대검을 든 자.
갈색 머리, 갈색 눈을 한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열리는 석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일 슬레이어. 제국 군사들의 살인죄와 유물 절도의 명목으로 처단하겠다!”
그리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석실을 울리자 남자의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
“제국!?”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남자, 가일이 들고 있던 양손 대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선처를 바란다면 훔쳐 간 유적의 보물을 내놓고 무릎을……!”
그러고는 그리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간을 압축하듯 쏜살같이 돌진해 왔다. 그리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즉각적인 움직임이었다.
‘감히!’
그래도 무언가 변명은 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그리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데, 오히려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가레스가 고함을 질렀다.
“묶어라!”
가레스는 마도사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의 몸에서 비롯된 마력이 가일이 달려드는 공간 앞으로 모여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람 팔뚝만 한 검은 가시나무 덩굴이 생겨나 가일의 전신을 뒤덮었다.
다만 그리트는 여전히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다른 놈들은…….’
눈에 보이는 마법은 그것뿐이었다. 가레스를 제외하고 또 다른 마도사로 추정되는 이나 경지를 알 수 없는 다른 놈들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힘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애초에 다 눈치챘다고 말했어야 했나.’
그로서는 짜증이 솟구치는 상황이었지만 전투 중에 따지고 들 수는 없는바. 그리트가 신경질적으로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차아압!”
검은 가시나무 덩굴 안에서 한 줄기 기합성이 들려왔다.
촤아아악!
동시에 아군의 시야까지 가로막던 덩굴들이 일순간 공간이 갈라진듯 깔끔하게 절반으로 잘려 나갔다.
쿨럭.
“진품이다!”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가레스가 그리 외치는 순간.
‘진품?’
그의 동료들이 일제히 눈을 빛냈다.
이내 그들의 전신에서 그리트조차 움찔할 정도의 마력이 솟구쳐 올랐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적보다 오히려 그들의 아군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전부 마도사라고!?’
가일을 향해 달려들려던 그리트가 오히려 멈칫하는 순간.
돌진하던 은빛 오러의 주인이 마도사 두 명이 만들어 낸 회색 안개에 휩싸였다.
“컨퓨즈(Confuse)!”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
“으으으!”
탁한 회색빛 안개가 가일의 전신을 휘감자 그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세 명의 마도사가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싸워라, 그분의 전사들이여! 버서크(Berserk)!”
“타겟 온 오러유저(Taget on Aura-Uuser)!”
“매직 익스텐션(Magic Extension)!”
그들의 고함과 함께 한눈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안개가 솟구쳤다.
‘제법이야.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지?’
그리트가 찜찜한 가운데서도 느껴지는 힘에 전율하는데, 그의 눈에 그 시커먼 안개가 적이 아닌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응?’
“뭐, 뭐야!”
“아군한테 지금 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잠시.
오러유저의 발길을 묶기 위해 전위에 섰던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기이한 붉은빛으로 번득였다.
“캬아아!”
붉어진 눈 옆으로 검은 핏줄을 드러낸 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가일에게로 돌진했다.
그런 그들의 손에서 솟구치는 포스는 평상시보다 훨씬 더 강렬해 보였다.
그리트가 평소 아끼는 기사였던 얀센의 경우는 포스가 이글거리다 못해 거의 오러처럼 보일 정도로 상서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는 없었다.
“무슨 짓이냐!”
그리트가 차분하기만 하던 인상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마도사들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끼던 부하들을 괴성을 지르는 괴물로 만들어 버린 마도사들.
하지만 그 마법이 향하는 곳은 그가 척결하라 명령받은 적이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무수한 전투로 단련된 마창의 정신도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그리트가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당황하고 있던 그때.
쩌어어억!
“캬아악!”
“끄아아아!”
회색 안개에 휩싸여 있던 적의 검에서 갑자기 은빛 오러가 불타오르듯 솟구치며 달려들던 부하들을 토막 내는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선두의 다섯 명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버린 참혹한 광경.
그 안에는 얀센의 모습도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아끼는 수하의 죽음에 그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지, 진짜!”
“그 검이다!”
“그분의 유산!”
반면 마도사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환희에 찬 고함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그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뿌드득.
그러나 그리트는 분노에 차 이를 갈면서도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명령이 먼저다.’
그는 초인이기 이전에 제국의 기사이자 군단장이었다.
부하들의 원수가 적인지, 저 마도사들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황제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아군을 이용한 놈들은 분명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적을 물리치는 것이 먼저였다.
“빌어먹을!”
절규와 같은 고함을 토해 내면서도 그리트는 자신의 애병, 인프락티오(Infractio)를 든 채, ‘적’을 향해 돌진했다.
이 모든 상황이 마도사들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카셀 마탑 놈들은 제대로 낚인 것 같은데.’
가일 슬레이어, 아니 로건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미친 기사들을 단숨에 베어 냈다.
“캬아아!”
오러의 색 변환으로 인해 격이 떨어졌다 해도 지금으로선 그조차 오러유저 상급이다.
반면 정신이 나가 버린 기사들이 한층 빠르고 강해졌다고 한들 그보다는 몇 수 아래.
이 정도로 경지의 차이가 있으면 오히려 기술이랄 것도 없이 무작정 돌진만 하는 미친 기사들을 상대하기란 더욱 쉬웠다.
제아무리 마도사라도 기사가 아니기에 보이는 한계일 것이다.
‘이 쓸모없는 마법들도 말이지.’
로건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으며 눈가에 아른거리는 회색 안개들이 괴롭다는 듯이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실제로는 시야를 좀 가리는 효과가 전부라는 것을 알면 연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마도사들의 마음이 어떨까.
게다가 이 마법들 덕분에 연기가 한결 쉬웠다. 간혹 비틀거려 주는 것만으로도 놈들을 속일 수 있었으니까.
“저항력이 강합니다!”
“역시 그분의 유산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제대로 낚인 것 같아 흐뭇할 지경이었다.
다만, 연기는 역시 체질이 아닌 것 같았다.
‘밀리는 척하는 게 더 어렵군. 젠장, 눈 따가워.’
그러면서도 포스를 동원해 눈을 충혈시키고.
“크아아아!”
가끔씩 괴성을 질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건은 그렇게 연기를 이어 가면서 제국의 초인으로 보이는 자를 주시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다가와?’
결국 기사 몇 명을 더 베어 버린 후에야 그 초인이 로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됐다!’
공간을 압축하는 듯한 빠른 움직임, 이글거리는 창끝에서 회전하는 붉은 오러.
그 모습이 긴가민가했던 그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데빌 스피어! 그리트 아인츠하인!’
제국 동부 1군단장.
월척이었다.
꽈아아아아앙!
‘큭!’
그그그그극.
하지만 월척은 월척답게 입질이 너무 거셌다.
본래 오러를 감추기 위해 추락한 격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충격.
순식간에 십여 미터를 밀려난 로건의 발 아래로 깊은 고랑 두 줄기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조차 그리트의 성에 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버텨!?”
으르렁거리는 듯한 분기에 찬 음성.
동시에 성검에 맞닿아 있던 붉은 오러가 잔상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이내 환상처럼 회전하는 붉은 오러스피어가 7개로 나뉘어 로건의 전신을 꿰뚫을 듯 쏟아져 들어왔다.
‘젠장!’
적당한 연기로는 떨쳐 낼 수 없다.
그것을 체감한 가일의 갈색 눈동자에 붉은빛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