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56)
356화
“신검 비전…….”
절로 신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그가 얻은 비전의 겉표지는 유독 낡아 있었다. 글자 하나쯤 지워졌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어찌 초고대의 인물이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가 의아할 뿐이었다.
다행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어지고 있었다.
타론의 예언은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모호하니,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경우는 이 책을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
로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로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신검 비전을 창시했다는 이 고대의 초인은 책에서 자신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카셀 마탑과의 싸움에서부터 여러 번 등장한 이름이 있었다. 저자의 친우라는 타론 ‘아레스’.
그와 관련된 일화보다도 그 성이 마음에 걸렸다.
‘우연이였으면 좋겠는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도 로건은 책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
“아마도 인류 최초의 기사……셨겠네.”
로건은 감탄하면서도 계속 책자를 읽어 나갔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답이 곧 나올 것 같았다.
로건의 기대와는 달리 이어진 말은 오히려 불안감을 키웠다. 그로서도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불안감은 바로 정체를 드러냈다.
“마성력이라니…….”
지금으로선 마도성자라는 이름의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한데 그 이름을 딴 역법이라면 도무지 얼마나 먼 과거인지 추론도 불가능했다.
그저 대이주 시대보다도 한참 전이라는 것밖에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더 기가 막혔다.
저자가 말하는 의지의 힘은 아무래도 단순히 뜻을 이어받는 게 아닌 듯했다. 로건은 다시금 감탄하며 책의 내용에 집중했다.
카셀 마탑의 만행이야 그가 전생에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안배?”
로건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밋밋한 회색 벽돌과 거대한 늑대 한 마리뿐이었다.
오러에도 흠집이 안 나는 유적의 벽돌이 설마 유산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설마 쟤?’
“크르르.”
로건이 늑대를 보며 눈가를 씰룩이자, 늑대가 왜 쳐다보냐는 듯 마주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좋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로건은 설마설마하며 다시 책자로 눈을 돌렸다.
“작고 어린 친구?”
로건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다시 늑대를 바라보았다.
기절하기 전 보았던 거대한 괴수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만도 웬만한 황소만 했다.
‘설마 고대에는 저만한 애가 작은 거였나?’
그럴 리가 있을까.
“이런…….”
“컹.”
시선을 느꼈는지 늑대가 또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짖었다.
저 모습만 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수림의 마수들을 쫓아내던 그 강력한 힘과 포효는 절대 어린 신수의 것일 수가 없었다.
‘그게 어린 신수면, 신화시대에도 신수들이 다 해 먹었겠지.’
신화 속에 전승되는 신수들의 모습이 모두 과장 없는 진실이라 해도, 새끼 때부터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수 중 가장 유명했던 종족이자 지성체로도 분류되었던 ‘용’조차도 새끼 때는 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에 로건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마기에 약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3개의 머리에서 붉게 빛나던 12개의 눈. 거기다 자신의 눈앞을 스치던 검붉은 힘의 파동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녀석은 이미 다 자란 신수, 아니 완벽한…….
‘마수…….’
그것도 기절 직전에 보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거의 제왕과도 같은 존재의 마수가 된 듯했다.
“가만……?”
거기에까지 생각에 미치자 또 다른 신수의 신화가 생각났다.
신수가 새끼에서 성체로 자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
최소 수백 년 아니었던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내용은 그 불길한 추론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경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막연하긴 했지만 아마 오러마스터를 말하는 듯했다. 즉, 정확한 지칭이 없을 만큼 옛날이란 소리였다.
그건 차치하더라도.
“정수라니, 그런 게 어디…….”
고대의 초월자가 생명력을 깎아 만들었다는 정수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탄하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자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기만 하던 늑대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너 설마……?”
로건이 인상을 찡그리자, 늑대가 고개를 더 돌렸다.
“……네가 먹었냐?”
“……크릉.”
녀석은 무심하게 앞발로 코를 훑더니 그대로 조는 척을 했다. 영혼의 파장을 듣는다더니, 무엇을 추궁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로건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하…….”
처음부터 불길하게 느껴지던 예감들이 하나둘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로건은 황급히 책장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정말 포스를 다루는 비전이 기술되어 있었다.
“……똑같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신은 제대로 된 신검 비전, 아니 살신의 비전을 배운 것 같았다.
조금은 달라진 형과 포스를 다루는 방법은 나름의 장단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신이 배운 비전이 후대에 더 다듬어진 세련된 형태인 것 같았다.
로건은 한숨을 쉬면서도 혹시나 무엇이 더 있을까 하여 앞쪽의 내용을 다시 살폈다.
누구라도 혹할 만한 소리가 적혀 있었지만, 역시나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그 천년,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짐작하는 로건으로선 허탈할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뒷장에 그려진 지도를 살펴보았으나, 수없는 세월이 지난 것을 증명하듯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대의 대마도사가 만들었다는 유적 내부의 지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일전에 방문했던 지브릭 카셀의 유적이 있는 곳. 크라운 산맥을 흐르는 큰 강의 흐름을 추적해 보니, 지금의 대륙인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도시가 나왔다.
“……아세리안. 역시 그랬군. 빌어먹을!”
어째 불길한 예감은 죄다 맞아떨어졌다.
“탈론 ‘아레스’. 끄으으응. 젠장!!!”
젠자아아앙!
짜증 섞인 외침이 석실 안을 울리자, 조는 척하던 늑대 티르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크르르.”
티르가 로건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건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억울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네가 먹은 것 좀 토해 낼래?”
기절한 사이 녀석이 제게 뭘 먹인 건지 기력도 충만했다.
이 정도로 완벽한 컨디션이라면 이전에 보았던 녀석의 변신 형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녀석 역시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크르르르르.”
로건의 살기를 진짜라 여겼는지, 티르의 덩치가 점점 커지며 털이 검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내 평범해 보이던 머리에 눈이 두 개 더 생겨나고, 네 개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번득였다.
더했다가는 정말 본격적으로 싸울 모양새다.
로건은 황당한 마음에 투지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됐다. 그래도 내 생명의 은인인데. 에휴.”
로건이 한숨을 쉬며 제단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자 티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은 또 그냥 덩치가 좀 큰, 아니 많이 큰 보통의 늑대 같은지라 로건은 녀석이 괜스레 얄미워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 거냐?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툭 쏘아붙이는데, 녀석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발톱으로 찍어 올렸다.
뭔가 하고 살펴보니 무언가의 동물의 뼈로 보이는 조각들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인지 원래의 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조각나 있는 뼈들. 녀석이 찍어 올린 작은 조각도 금세 부스러지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니 로건은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 내가 늦게 와서?”
끄덕.
이걸 누구를 탓해야 할까.
예언의 주인? 아니면 예언을 한 자?
적어도 주인의 정수를 먹어 버린데다 마수가 되어 버린 신수는 이제야 찾아온 로건을 탓하는 듯했다.
“이래서야…….”
에휴.
연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무언가 대박을 기대했다가 쪽박만 찬 느낌이었다.
“에이, 목숨을 건진 게 어디냐.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거지.”
로건이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는데.
“크릉!”
어느새 다가온 티르가 그 거대한 콧잔등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음?”
“크르르릉!”
마치 내가 있는데 왜 얻은 게 없냐, 라고 시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황소만 한 늑대, 그것도 툭하면 거대 마수로 변하는 괴물 늑대를 인간 사회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기대가 생기는 걸까.
왠지 모를 확신을 느끼며 로건이 불쑥 물었다.
“너, 혹시 작아질 수도 있어?”
“낑?”
마치 왜 그딴 걸 바라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다.
늑대의 얼굴에서 온갖 감정이 다 보이는 것이 이제 와선 신기하지도 않았다.
“그래야 내가 널 데리고 갈 수 있어. 함부로 크게 변신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끼이이잉.”
티르는 마치 굉장히 고민된다는 듯 앞발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설마 가능한가?’
그렇게 솔깃하며 바라보는데.
슈슈슉.
우웅.
가볍게 빛이 터져 나오며 티르의 거대한 덩치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거의 보통의 개만 한 크기로.
“컹!”
이제 만족하냐, 라는 뜻.
이제는 녀석의 짖는 소리까지 해석하게 된 로건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수림 깊숙한 곳의 유적에서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개(?)가 빠져나와 쏜살같이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건이 그렇게 마수림에서 고대의 역사를 접했던 시각.
이제는 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거대 도시의 중심부에선 그 지배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론이 언젠지 모를 먼 미래이지만 그 일이 벌어지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기에, 이 안배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예언은 그간 꽤 높은 확률로 적중했으니까.
이 책을 만들고 있는 지금은 마성력(魔聖曆) 243년, 마도성자가 제국을 선포한 지 243년째의 13번째 달이다. 이것을 토대로 역법을 계산해 보면 시간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긴 안배를 취하고, 놈들의 맥을 끊던가, 강림한 마도성자를 소멸시켜라. 그놈들은 인간사의 해충들일 뿐이니 털끝만큼의 망설임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화시대 이후 점점 사라지고 있는 탓에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파마석(破魔石)으로 유적을 만들고, 타론의 마법에 나의 수명을 깎아 만든 정수 중 일부를 더해 시공을 괴리하는 결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안에 고대 신수의 후예이자 내가 말년에 얻은 작고 어린 친구인 ‘티르’를 잠재웠다.
그리고 결계를 지탱하고 있을 내 정수를 취하라. 그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나, 그대가 아직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영혼에 간섭할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면 강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확률은 훨씬 낮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살신의 비전을 익힌 것이 아니라 염원의 힘을 가진 자라면 이 책자의 뒤편에 그 비전이 있으니 보고 익힐 수 있기를 바란다. 염원의 힘을 얻은 자라면 더욱 익히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보는 이가 있다는 것은 이 유적의 결계가 깨어졌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내 염원을 이어받은 적전 제자와 그 후손들, 검신일맥(劍神一脈)이 사멸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다만 불안한 것은 녀석의 예언이 언제 이뤄질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예언, ‘최초의 기사’라는 말처럼.
당시엔 기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었기에 말을 하는 이도, 듣는 나도 모두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30년쯤 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칼을 들어 사람을 지키는 이를 뜻하는 기사라는 단어는 내 말년에는 제법 명예롭게 쓰였지만, 그 유래는 사실 조금 우스웠다. 검과 포스를 쓰는 나를 마도사인 녀석의 수하(Kniht) 정도로 착각했던 사람들이, 기사(Knight)라는 말로 바꿔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으니까.
어찌 되었건 나는 그 ‘최초의 기사’라는 칭호가 나중에 얻은 검신이라는 이명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서야 이제 기사가 흔해졌다며 싫어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타론이 먼 미래라고까지 말했으니 이 책을 보는 이의 시대가 언제일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나대로, 타론은 타론대로 안배를 남기기로 했다.
나로서는 애초에 이것이 발견되지 않기를, 하지만 발견된다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계가 깨어졌다면, 내 의지를 이어받은 제자들의 맥이 끊겼다는 뜻일 테니 이 책을 읽는 자는 우연히 ‘살신의 비전’을 얻은 이거나 다른 염원의 힘을 얻은 이일 것이다.
나로서는 내 후예들이 임무를 다하여 내 염원의 힘이 끊어졌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경우 타론의 힘을 빌려 편법으로 전승한 힘은 사라지게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타론은 신수의 맥이 사라질 것도 예언했다. 하여 어리지만 영리한 친구 티르는 머나먼 후대에 신수의 피를 남기기 위해 봉인되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예언에 따른 봉인지가 마수림이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신수인 녀석은 마기에 약하니 녀석을 발견하면 바로 유적에서 데리고 나가 주었으면 한다. 어린 신수라도 영혼의 파장을 읽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티르와 정수를 모두 수습했다면, 이제 유적을 떠나라. 그리고 중앙 대륙에 남겨져 있을 타론의 유적을 찾아라. 그 녀석 역시 따로 안배를 준비했으니 그것을 취하라. 그 위치는 다음 장에 그려져 있다.
녀석이 남긴 것은 녀석의 보물. 그러니 녀석의 유적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 역시 잘 모른다. 그저 언제고 강림할 마도성자를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뿐. 그러니 직접 가서 확인하라.
타론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후예 역시 대를 이어 유적을 지킬 것을 내게 굳게 맹세했다. 대마도사의 맹세, 그 맹세는 족히 천년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