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57)
357화
“실패, 실패라……. 그 말이 요즘따라 자주 들리는 것 같군.”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엎드린 이들의 몸이 굳었다.
“그래, 일을 하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는 거지. 하지만 잇따른 실패는 우리 제국에 어울리지 않아.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엎드린 이들의 고개가 더욱 숙어졌다.
“막스에 이어 그리트까지……. 더구나 그리트의 경우엔, 흐…….”
이어진 잔잔한 음성에서 은근한 분노가 느껴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황제의 분노 앞에서 엎드린 세 사람은 차마 미동도 하지 못했다.
톡. 톡.
너른 대전 안,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황제의 손가락만이 유일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한참 후,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놈들이 무슨 생각일 것 같나?”
좀 전에 느껴진 분노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차분해진 음성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이 분노의 또 다른 얼굴임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엎드린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던 이가 공손히 고개를 들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깡마른 얼굴에 가득한 주름. 적지 않은 나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강직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허한다.”
“검은 뱀 놈들이 2황자 전하를 통해 굴복의 뜻을 전해 온 것을 들었습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짧게.”
“……그 가일이라는 자가 유적에서 얻은 물건이 폐하의 신뢰를 저버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직의 명운을 걸 정도로 말인가, 재상?”
“……그것이 아니라면 그 무리수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그래. 그렇긴 하지.”
현 제국의 재상 록터스 구스펠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불충분했는지, 황제의 시선이 재상의 왼편으로 향했다.
“놈들의 수장을 만나 본 것은 그대가 유일하다. 갈렌, 어찌 생각하는가?”
그에 반백의 금발 머리,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의 마도사가 고개를 들었다. 오만하고 자부심 강한 삭풍의 마도사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평범한 외양에 뱀 같은 속내를 감춘 자. 진실을 삼킨 뱀에 관한 황실 마탑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습니다. 결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를 자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한가.”
“무리수를 두었다면,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갈렌 디카이드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리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이유라는 게 무엇일지 짐작 가는 사람은 없나? 누구나 할 법한 생각 말고.”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실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요한 대전을 잠식하는 무거운 기운에 엎드린 세 사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황제가 제위에 오른 지 20년이 넘도록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살짝 인상을 찡그린 황제의 시선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 향했다.
“트리스.”
“……예, 폐하.”
늙은 기사, 하지만 그럼에도 대륙에서 제일 강하다 평가되는 노기사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제일 화가 나는 게 무엇인지 아나?”
“무엇이든 하명하여 주십시오. 폐하의 검으로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겠습니다.”
분노한 황제의 눈초리 앞에서 노기사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각오를 말했다.
그 호기로움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을까.
비릿한 미소를 지은 황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문제일 뿐 이미 노출된 놈들은 정리할 수 있다. 항상 씨를 남겨 놓는 지독한 놈들이지만, 적어도 앞으로 삼백 년간은 다시 고개를 못 쳐들게 싹을 잘라 낼 수 있어.”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그 말에 엎드린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문제다. 제국의 숙원, 세상을 오롯이 제국의 손안에 두겠다는 그 염원이 남아 있다. 놈들이 건네기로 한 마지막 과실을 아직 받아 내지 못했어.”
“!?”
제국의 기사, 관리, 마법사를 이끄는 거두들의 얼굴에 일제히 의구심이 떠올랐다.
“하오나 폐하, 이미 배신한 놈들이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놈들에게 과분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옵니다.”
“이미 소왕국 연합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고 있다 합니다. 제국의 위엄이 손상되고 있습니다. 참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일개 관리인 재상 록터스 구스펠트 뿐만 아니라 대륙제일검도, 삭풍의 마도사도 황제의 말 한마디면 목이 떨어질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눈앞의 황제는 설령 혈육일지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잘라 낼 수 있는 비정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의 재위 기간 내내 제국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소신을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오늘 처음으로 황제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이들을 가까이 두는 이유였으니까.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지만 잠깐의 분노를 참아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것이 옳다.”
간언은 충신의 덕목이지만 황제의 명을 따르는 것 또한 신하 된 자의 도리다.
하고자 한 말은 다 했으니, 이제는 명을 따르겠다는 듯 세 사람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현명한 그들의 군주는 제위에 오른 이래 단 한 번도 그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듯,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적의 목적을 모른다면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무슨 속셈이건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강요하는 수밖에.”
무슨 뜻일까.
세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는데, 망설임 없는 지시가 이어졌다.
“트리스, 갈렌.”
“예, 폐하.”
“예, 폐하!”
“이전에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그대들이 키운 가문의 정예들을 총동원하라. 황실기사단의 절반과 특수감찰부의 정예들도 붙여 주겠다. 성도 노비엔스로 가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전쟁이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초인의 눈가에 살기가 스쳤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단, 명분은 바로스에 대한 호위다. 막스가 죽었으니 그를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성도에 들어가라.”
“하오나 폐하, 그 정도 명분으로는 성국이 그만한 병력을 내부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재상 록터스가 두 초인을 대신해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구실을 더 만들어야겠지. 트리스, 제롬에게 연락을 넣어라.”
“……바로스 전하가 아니라 제롬에게 말씀이십니까?”
트리스의 의아한 반문에 황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단호한 대답에 듣고 있던 이들 모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로써 황제는 바로스 황자의 황위 계승권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그들의 표정과 상관없이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롬을 통해 검은 뱀 놈들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내라.”
최후의 통첩. 그 단어가 가지는 무게에 세 사람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성국이 제국을 상국으로 받들어 섬기겠다는 공식 발표를 하라고 이르라. 그것으로 배반에 대한 대가를 갈음하겠다고. 아니면, 교황의 직위를 제국의 황제에게 넘긴다는 것도 괜찮겠지.”
이어진 황제의 말에 세 사람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
“폐하, 설마 그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만큼 놀라운 말이었다. 아무리 놈들이 교황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한들, 성국의 복속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선출제인 교황은 성국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까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황제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건만 그저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가능해도 가능하게 만들라고 해. 기한은 그대들이 준비를 끝내고 노비엔스까지 도착하는 한 달. 그때 그대들은, 제국의 황제가 성국의 복속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파견하는 사절이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거부한다면, 아니,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리 발표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그때는 막스의 죽음이 놈들이 벌인 짓이 되겠지.”
살벌하게 이어진 말.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세 사람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그 일로 파견된 제롬과 감찰부가 아직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갈렌 디카이드가 자신의 조카손자를 언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도 안에 숨은 제국의 적을 토벌한다는 명목, 혹은 치하 사절. 어느 쪽이건 성도 안에 들어갈 명분이 될 것 같습니다.”
트리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재상 록터스는 모두가 잊고 있는 듯한 사실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그 대마도사라는 뱀의 수장이 성국에 있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의 반문은 타당했다. 하지만 황제의 파격적인 말은 그대로 이어졌다.
“있건 없건 상관없다.”
“……?”
“성도에 들어간 그대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항상 교황의 곁에 머문다는 트레이시라는 추기경을 처리하는 것이다.”
“예!?”
갈렌이 자리를 잊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트리스와 록터스 또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교황의 세뇌 주축으로 보이는 자. 그 여자를 죽이고 교황을 확보하라. 교황이 정신을 차리건 못 차리건 상관없다. 그 후에는 어느 쪽이건 우리가 성국에 관여할 수 있게 될 테니.”
황제가 가진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사실일 터.
“뱀 놈들이 제안을 따르건 안 따르건, 저희는 얻을 것을 얻게 되는 거겠군요. 그런데 놈들이 약속을 지키면 검혼과 삭풍께서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래 성격이 그러한지, 록터스는 감탄하면서도 계획의 작은 빈틈을 지적했다.
그러자 황제가 아닌 갈렌이 대신 답을 했다.
“우리가 할 일이 왜 없겠소이까. 놈들이 약속을 지키면 축하 사절로 들어가 그 여자의 목을 따 버리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살벌한 웃음과 함께 나온 말.
황제는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뜻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눈빛으로 그 의사를 확인했으면서도 재상은 또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정말 그곳에 뱀의 두목이 있을 경우가 문제가 되겠군요. 일전에 삭풍께서 크게 손해를 보셨다니, 저로선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만.”
그 말에 삭풍의 마도사 갈렌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 검혼께서 함께 가시는데 무엇이 문제겠소. 아무리 대마도사라 한들…….”
“그 부분에 대한 지원도 있을 것이다.”
“예?”
자신만만하던 갈렌이 놀란 눈으로 황제를 돌아보다가 주변의 싸늘한 분위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말한 지원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안심했습니다.”
꼬장꼬장한 재상 록터스도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앞에서 한없이 조심하면서도 따질 것은 모조리 다 따지는 강단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며, 갈렌은 어이없다는 듯 풀썩 웃었다. 남들 앞에서는 한없이 오만하지만, 황제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자신과 대비되는 모습에 감탄한 것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보며 황제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들이 모두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계승전을 더 이어 가는 것도 의미가 없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황제가 더욱 충격적인 말을 꺼내 들었다.
“성국을 제압하고, 검은 뱀 놈들을 정리하여 내실을 다진다. 그리고 그 직후에 바로 ‘대계’를 실행하겠다.”
대계(大計), 큰 계획.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기에 미소를 짓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드디어…….”
“그날이 오는 겁니까?”
“아하하하.”
황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세 사람 모두에게로 옮겨 갔다.
그것을 보며 황제는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 알고 철저히 준비하도록.”
“예, 폐하!”
“예!”
황제의 축객령에 세 사람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트리스 경은 남아서 나와 이야기를 좀 더 하지.”
“……예.”
홀로 발목을 잡힌 대륙제일검은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돌아섰다.
그그긍.
대전의 문이 닫히고 둘만이 남은 자리.
“제롬은 지금 바로스와 함께 행동하고 있는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황에서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음에도 트리스의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예, 그렇습니다.”
알고 계실 텐데 갑자기 그건 왜?
간단한 소회나 나누시려는 것인가.
함께 나이를 먹어 가며 황제가 종종 보이는 일이었던지라 트리스의 마음이 살짝 풀어졌다.
그런데 황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우리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모두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부정적인 말.
그에 트리스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놈들이나 성국이 앞서 말한 명분에도 물러서지 않고 길을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대책이 필요해. 이를테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다른 명분을 만드는 것이지.”
‘왜 좀 전에 말씀하시지 않고?’
의문이 들었지만 트리스는 그 의문을 뱉어 내는 대신 황제가 듣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옳은 선택이었는지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제롬에게 죽이라고 이르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기에 트리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예? 누구를?”
“바로스.”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