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58)
358화
“황제가 성국의 복속을 공표하던지, 아니면 교황의 직위를 제국 황제에게 이임하겠다는 선언을 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어두운 암실, 그보다 더 어두운 색의 로브를 걸친 자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리한 요구로군.]하지만 답을 하는 통신구 속 노인의 음성은 그저 담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예. 하지만 가레스 장로 일파가 벌인 일이 너무 과격했습니다.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면 다시 황실의 사냥이 시작될 겁니다.”
[그 일……, 미심쩍은 게 너무 많아. 무언가 처음부터 꼬인 느낌이야.]검은 로브는 그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마음이 다급한 자신과는 달리 탑주는 이미 결과가 나온 지나간 사건에 집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탑주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대책을 궁리해야 할 때입니다. 이미 잃은 전력이 상당하고, 세상에 드러나 버린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지금 다시 사냥이 시작되면 큰일입니다.”
이미 성국을 움직이기 위해 다수의 장로와 정예들이 가짜 신분을 버리고 직접 나섰다.
검은 로브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큰일? 그래 큰일이지. 그럼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거라. 나는 그사이 마수림에서 놈을 찾아보겠다.]‘놈’이라는 게 누구를 뜻하는지, 왜 찾겠다는 건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탑의 가장 큰 전력인 탑주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검은 로브는 속이 탔다.
“탑주님. 성검이, 시조의 유물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상황이…….”
[내가 직접 성국에 간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예?”
[어차피 지금 제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없다. 우리의 염원이 이뤄진 뒤라면 모를까. 국지전에는 이길 수 있더라도 결국 대군에 밀려 사라질 게 훤히 보여. 그러니 시간을 끌 수밖에.]“하지만 황제는 기한까지 명시했습니다. 한 달, 고작 한 달 뒤에는 정말 사냥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가는 정말 다시 수백 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줘 버리면 그 뒤에 쓸 우리의 패가 없어진다.]“……예?”
[교황을 움직여 복속을 공표한다? 실제로는 곧장 터져 나올 반발 때문에 무산되겠지. 하지만 제국은 그것을 빌미로 성국을 찍어누를 거다. 교황이 인정한 것을 평민들이 반대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구실이 될 테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가면 제국은, 황제는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그 말씀은……?”
[같은 배를 타는 시기가 끝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러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시간을 끌어라. 적어도 그 끝은 우리가 정해야 한다.]“탑주님…….”
[황제가 무슨 수를 쓸지는 모른다. 하지만 최대한 버티다 지고의 팔찌를 가지고 이탈하라. 나머지는 버려도 좋다.]“이미 성국에 자리 잡은 정예들을 버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챙길 수 있다면 챙기는 것이 좋겠지.]그럴 수 없을 테지만.
검은 로브는 생략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사이 내가 성검을 찾고, 내가 가진 ‘그것’까지 총 세 개의 유물을 모은 후 전쟁을 기다린다.]“정말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까?”
[그렇다. 이미 제국은 수십 년을 물밑에서 준비해 왔다. 이제는 황제도 멈출 수 없을 것이야. 우리는 대륙 전체로 번질 전화의 불길을 이용하면 된다.]“그럼 정말로 예언이…….?”
[신들이 떠난 시대를 가속화시키고, 그 자리에 우리의 신을 강림시킨다.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룰 유일한 답이다.]그 말을 하는 노인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뭐예요, 이 개는?”
비밀리에 환궁한 남편을 반기던 에일렌은 로건의 뒤에 따라붙은 은빛 털의 강아지(?)를 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유난히도 빛나는 털에 반짝이는 눈빛.
시선을 확 잡아끄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남편의 답변이 다소 황당했다.
“……일종의 비밀 병기랄까요.”
“개가요?”
“컹!”
자신을 계속 개 취급하는 에일렌의 말에 티르가 신경질적으로 짖었다.
하지만 황소만 한 크기도 아니고, 사람의 무릎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덩치로 짖는 모습은 위압감이 느껴지기보다는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어머, 귀여워라.”
“킁.”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에일렌의 손길에 콧바람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티르의 모습은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확실히 계약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마수림을 나오기 전, 녀석과 한 계약을 떠올린 로건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둘’이 가진 염원의 힘으로 맺은 계약.
제 주인의 정수를 취하면서 봉인에서 풀려났을 녀석이 여태 마수림을 떠나지 못한 이유,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 더 이상 신수가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같았다.
신검 비전을 남긴 저자, 검신은 신수가 염원의 힘, 즉 영혼의 숭배를 먹고 사는 생물이라 말했다. 한데 신화시대 이후 염원의 힘은 점차 약해져만 갔고,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지성체들은 더 이상 신수를 숭배하지 않게 되었다.
그 두 가지 변화가 점차 가속화되면서 검신의 시대에도 이미 신수는 멸종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창세의 끝, 신화시대가 끝나면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도록 안배한 창조주의 뜻이라 했던가.’
덧붙여 검신은 멸종이 필연이 될 수밖에 없는 가여운 생물이니, 도움이 되고 안 되고의 여부를 떠나 아껴 주라는 말을 적어 놓았다. 자신이 남긴 정수 속 염원의 힘을 이어받아 계약을 한다면, 티르 하나 정도는 제 수명대로 살다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다만 상황이 여러 가지로 엇나가 버렸다.
아마 검신도, 예언의 능력이 있었다는 타론도 그 정수를 티르가 먹어 버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의 티르는 굳이 누군가와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티르는 로건을 따라가길 원했고, 결국 녀석은 일방적으로 그를 돕겠다는 불공정 계약까지 맺어 가며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너,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우와, 영리하네.”
“끼잉.”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는 에일렌의 손길에 슬쩍 머리를 더 가까이 갖다 대는 녀석의 모습.
같은 염원의 힘을 품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녀석의 감정이 어렴풋이 전해졌고, 정식으로 계약까지 하고 나서는 녀석의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있었다.
– 기분 좋아. 따뜻해.
– 가슴이 간질간질해.
그리고.
– ……보고 싶다.
“컹!”
이 자리에 없는 먼 과거의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까지.
지켜보던 자신의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로 녀석의 감정이 깊게 전해졌다.
“……외로웠었구나.”
돌아오는 와중에라도 좀 쓰다듬어 줄 걸 그랬나.
로건은 녀석에게서 전해지는 서글프고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에일렌과 함께 녀석을 쓰다듬어 줄 생각이었다.
턱.
“……응?”
한데 막혔다.
슬쩍 몸을 피한 녀석이 앞발을 들어 로건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다.
……외로웠던 거 아니었어?
“킁.”
마치 ‘그래도 넌 아냐.’라고 하는 듯한 느낌.
차갑게 로건을 외면한 녀석은 다시 에일렌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아직도 삐진 걸까.
허공에 손을 뻗게 된 로건은 왠지 모를 허무함과 민망함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일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당신보다 제가 더 좋은가 보네요, 이 아이.”
“……티르.”
“예?”
가볍게 한숨을 내쉰 로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티르예요. 그리고 그냥 개도 아니고.”
로건은 자신이 늦고 싶어서 늦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삐져 있는 신수의 사정을 부인에게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어……. 이 아이가 그렇게나 강하다고요?”
에일렌은 로건의 설명을 듣고도 섣불리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봤다고 너무나도 살갑게 굴던 티르는 어느새 의자에 앉은 에일렌의 무릎 위에서 갸르릉 소리를 내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신비롭게 빛나는 부드러운 은색 털을 제외하면 그냥 귀여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확실해요. 지금의 저조차 이 녀석과 싸우면 그 결과를 쉽게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나……. 이야, 티르. 너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로건이 결코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에일렌이 감탄하며 녀석을 쓰다듬자, 무릎 위에 엎드린 채 눈을 감은 녀석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계약자인 자신보다 반려를 더 좋아하는 신수라니.
로건은 새삼 허탈한 심정이 들었지만 이내 화제를 돌렸다.
“나 없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잘 일러 두긴 했는데.”
“있겠어요? 위험한 일은 다 당신이 했는데.”
그 말을 하며 자신을 찌릿 째려보는 부인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진 로건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출발할 때 했던 얘기보다 기간도 길어지고, 사건도 많았던 출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변명도 지금은 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작게 한숨을 내쉰 에일렌은 바로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새 두 군데가 완공되었고, 이제 곧 그 두 군데와 카일을 비롯한 서쪽 전방의 성 세 곳까지 마법진 설치가 끝난다고 해요.”
“벌써 그렇게…….”
“당신이 말한 준비는 이제 거의 끝나 가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오히려 더욱 긴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들.’ 제국의 침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측근들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에일렌의 얼굴도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이, 오랜만에 만난 남편에 대한 반가움 외에 희미한 긴장감도 엿보이는 듯했다.
후읍.
그 긴장감이 옮았는지 자신 역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이라, 로건은 크게 심호흡하며 오랜만에 만난 반려를 끌어안았다.
“걱정 말아요. 다 잘될 거예요.”
“그럼요. 잘돼야죠.”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 주는 아내의 손길에 위안을 받는데,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독수공방만 몇 달을 했는데.”
푸흡.
생각지도 못한 에일렌의 농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
“컹!”
갑자기 머리 위에서 터진 소음에 잠이 깬 티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짖은 후에도 왕궁 깊숙한 곳에선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 * * 로건이 남몰래 귀궁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비슷한 시기에 모습을 감췄던 호위기사 빅토르가 땀에 전 모습으로 왕성에 나타났다.
푸르륵.
털썩.
“문을 열어라!”
“헛.”
“비, 빅토르 경!”
“충성!”
경비 병력이 신분을 확인하며 문을 여는 동안 빅토르는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진 말을 일견하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쓰러지는 말을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꼈지만, 그조차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몇 차례 반복되니 무뎌졌던 것이다.
열 필에 가까운 말의 비자발적 희생과 끝없는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 무한 질주의 결과, 불과 보름 만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 부작용이라고는 그의 체중이 10kg 가까이 줄어든 것이 전부였으니, 누군가에게 말한다 한들 믿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을 터였다.
‘이런 젠장.’
하지만 정작 그 기적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성녀의 안위와 성국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여파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하여,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자신에 대해 짙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한 달 전 신검이 제게 보여 주었던 경이로운 무력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쯤 성도로 향하고 있을 그자.
‘내가 그보다 강했으면, 아니, 어느 정도 비슷하기만 했어도 성녀님을 그렇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생각이 이어질수록 자괴감만 커져 갔다.
“폐하는?”
“예?”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
“일과 시간이니 당연히 계시죠?”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듯한 기사의 말.
그제야 스스로가 조급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빅토르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호흡을 조절했다.
“빅토르 경.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곧바로 다른 기사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는 마음을 다스리려던 것도 잊고 황급히 내성을 향해 뛰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과 반가운 얼굴을 함께 마주쳤다.
“빅토르?”
“어머, 빅토르 경? 어딜 그리 바삐 다녀오시는 건가요?”
친우인 로니안과 적이라 할 수 있는 루이사 폰 아세리안.
두 사람이 웃으며 나란히 산책하고 있는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연인 같은 모습.
당최 저 그림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깊게 따지고 들 정신이 없었다.
“모르셔도 됩니다.”
로니안만 있다면 모를까, 루이사가 있는 곳에서 임무를 말할 수는 없었다.
빅토르가 그렇게 그들을 지나치려 하는데, 루이사가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인이 그리 땀을 흘리실 정도면 뭔가 굉장히 바쁜 일이었나 봐요. 꽤 힘든 일이었거나.”
그 순간 빅토르는 살벌한 눈으로 루이사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초인이라는 것은 대외비. 한데 가장 알지 말아야 할 사람 중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빅토르의 살벌한 눈초리가 루이사의 옆, 친구 로니안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시선을 받은 로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있을 뿐이었다.
‘눈빛도 멀쩡하고.’
그렇다면 이 여자가 스스로 알아냈다는 건데.
어찌해야 하나.
안 그래도 잔뜩 날이 선 머릿속에 험악한 생각만이 떠오르는데 또다시 신경을 건드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니 그리 험하게 보실 필요 없답니다. 그나저나, 정말 어디 다녀오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럼 정말 기밀이라는 건데.”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돌아섰다.
‘지금은 임무에 대한 보고가 먼저다.’
돌아서는 자신의 뒤통수에 꽂혀 드는 루이사의 의미심장한 눈초리는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