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0)
360화루이사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24년 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그날을.
– 루이사, 엄마 잊지 마.
초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리운 얼굴.
엄마.
왕비가, 제 부인이 누군지 모를 자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허울만 좋은 왕이라는 신분의 아버지는 그들을 막아 세우지 못했다.
– 잊어야 한다, 루이사.
그저 엄마와는 다른 말을 하며 자신을 안아 주었을 뿐.
어린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말에 울고불고 떼를 썼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황도에 불려갔던 아버지는 한참 뒤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를 찾는 어린 그녀를 끌어안고 밤새 통곡했다.
– 미안하다. 미안하다, 루이사. 아빠가 정말 미안해…….
그날 이후, 제국의 날개 동익왕은 정무를 등한시하고 술만 퍼마셨다.
어린 루이사로선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항상 따스하게 안아 주던 엄마도 사라지고, 다정하던 아빠도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루이사는 왕궁을 돌아다니며 사고만 치는 사고뭉치가 되었고, 한때나마 완벽했던 가정은 그렇게 파탄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살얼음판처럼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나날들의 와중에 변화가 생겼다.
–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푸근한 인상의 노인. 충성심 과한 신하가 마음이 상한 왕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불러들인 광대였다.
하지만 늙은 광대는 그들의 앞에서 기적을 보여 주었다.
– 뒤틀려 버린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올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던, 대마도사가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곧 예언의 때가 옵니다. 우리의 염원이 이뤄질 때 제국의 황실은, 황제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그분이 강림하시는 날…….
당시 루이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아버지가 오랜만에 환희에 찬 표정을 지은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끊고 상시 웃음을 보이며 활발히 외부 활동을 시작했고, 사고뭉치 어린 공주는 마법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그 마도사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루이사가 과거의 일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을 때쯤.
그녀의 스승이 그날의 진실에 대해 알려 주었다.
– 왕비님은…….
어머니는, 당시 황태자의 자리를 굳히고자 한 현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하지도 않는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죄라곤 황제의 경쟁자였던 다른 황자와 같은 배에서 나온 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부녀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스승은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인 말도 들려주었다.
– 너희 아버지, 동익왕은 직접 자신의 아내를 처형했다.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 했던가.
처음에는 당연히 거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 비극의 날에 황실의 사자를 맞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 역모에 연루된 죄인을 처단하는 일인데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또렷했다. 그리고 이제 와 그녀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부녀관계는 그날로 끝이 났다.
– 왜! 왜 그랬어! 대체 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그녀와 그때만큼은 웃지 않던 아버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버지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엄마가 원한 일이었다. 다 너와 가문을…….
– 웃기지 마!
그 말은 루이사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때쯤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부는 정략결혼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인 딸도 무척이나 아꼈다는 것을.
아버지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동왕부의 주인이 즉각 바뀌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루이사는 모두에 가슴에 대못을 박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 우리 살자고 엄마를 버린 거잖아!!
그 후로 부녀는 ‘일’에 관련된 것 말고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동익왕이 세상에 다시 없는 비정한 남편이자 능구렁이 왕족으로 알려지고, 공주가 고대의 마법을 익힌 알려지지 않은 마도사가 될 때까지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예언의 때가 다가왔다.
신들이 떠난 시대의 증거가 나타나고, 운명을 바꾸는 자의 힘도 확인했다.
그런데.
– 황실이 칼을 뽑아 들었다. 모든 장로들은 은둔을 준비하라.
또다시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라고?
‘그럴 수는 없어!’
그날 이후 한없이 묻어 두었던 분노는 이미 봉인이 풀리고 있었기에 배우는 이 무대를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루이사는 웃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아버지처럼.
아무런 마음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호호. 저는 백작님이 놀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데요?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잊으셨나 봅니다.”
“하, 당혹스럽군요. 얼마 전 하신 말씀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야 상황이 변했으니까.
루이사는 날카롭게 변한 붉은 눈을 보면서도 다시 웃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 못 들어 보셨나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백작님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요.”
“우리 대화에 그런 로맨틱한 부분이 있었나요? 거참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루이사의 매혹적인 미소에도 로니안은 오히려 경계하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루이사로선 젊은 남자가 자신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론 신선했다.
“왕궁에 테러를 저지른 분을 집안에 들인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만.”
연인이라는 역할 연기, 그리고 사실상은 자신의 감시로 붙어 있던 붉은 머리 청년은 이제 은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피식.
그 모습을 보며 루이사는 실소를 흘렸다.
‘뭐, 저쪽으로선 당연한 일이지만.’
첫 시작이 많이 잘못되었지만, 어차피 그들 정도 신분의 혼사에서 서로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예?”
로니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루이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요새 건만 해도 저희 왕부에서 꽤 공들여 무마한 걸로 아는데요. 저와 혼사가 이뤄지면 혹시 아나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제국 내부에서 호응이라도 해 줄지.”
“푸하하하.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그래. 우리 사정을 모른다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그리고 사실, 현실성 없는 허풍이기도 했다.
‘동왕부의 병력도 황실을 향해서 칼을 겨누라고 명령하면 오히려 아버지를 노리겠지.’
그것은 병력 개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애초부터 그렇게 짜인 시스템으로, 사방왕부가 세워질 때 그 근간에 깔린 배경과 연관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제국의 기밀 중의 하나.
특히나 전시 상황에서의 항명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그들 부녀가 외부로 시선을 돌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사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 나라는 제국의 공세도 제법 버텨 낼 수 있을 거야.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녀는 왕성에 머무는 동안 그 사실을 여실히 체감했다. 눈앞에 젊은 백작과 그 친우처럼 숨겨진 초인들은 물론, 작정을 하고 세뇌한 시종들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운명을 바꾸는 자, 국왕이 한낱 시종들의 세뇌를 일일이 풀어주고 다닐 리는 없다. 게다가 그랬다면 이미 제게 경고라도 전했을 것이다.
그 말인즉.
‘내가 파악할 수 없는 마법적 힘까지 가지고 있어.’
물론 그런다고 제국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카셀 마탑의 일원으로서 황실의 암투를 살펴보며 알게 된 제국 황실의 저력은 그 짐작보다 훨씬 더 엄청났으니까.
하지만 탑의 염원을 위해서라도 전쟁의 판은 커질수록 좋았다.
그러니 왕국의 저항 또한 거세면 거셀수록 좋다.
운명을 바꾸는 자가 절망한 상태로 자신들의 손을 잡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어차피 국왕이 나를, 우리를 믿을 리는 없어. 어떤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영혼에 간섭하는 힘을 지닌 마법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미 저지른 일까지 있으니 이들의 신뢰를 얻기란 무리다.
그러니 자신이, 동왕부가 이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해요. 그러니 우리 거래를 해요.”
“거래요?”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이었기에 루이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패를 꺼내 들었다.
“서로 아는 정보를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왕국이 제국을 적대하고,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건 이제 양국의 수뇌부 모두가 알고 있을 거예요. 제국 황실에서야 왕국에 그리 신경을 안 쓸지도 모르겠지만.”
“……흐음. 계속해 보시죠.”
“만약, 아니 필연이겠죠.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진다면 동왕부에서 접할 수 있는 제국군의 기밀을 최대한 빼내어 드릴게요. 그 정도면 혼인 예물로서의 가치는 차고 넘치지 않나요?”
그 말을 들은 붉은 눈이 더욱 빛나는 것을 보며 루이사는 요염하게 웃었다.
‘이 왕국을 도와 제국에 피해를 강요한다. 그 피가 흐르고 넘쳐 세상을 덮을 정도로. 그러면 그 자체가 제물이 된다…….’
루이사의 머릿속에 무덤덤한 표정의 대스승, 탑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거라. 어찌 됐건 둘의 충돌이 조금 빨라지긴 하겠지. 잘 풀린다면 황제의 시선도 그곳에 묶어 둘 수 있겠군.
– 감사합니다.
– 하지만 명심하거라. 여태껏 숨겨 온 너와 네 아비의 비밀이 황제에게 드러날 수 있음을.
–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 ……좋다. 너희의 희생으로 그날은 더욱 빨리 올 것이다.
– 영광입니다.
– 신들이 떠난 시대, 아니 떠나야 할 시대, 약해져 가는 신들의 영향력을 뿌리 뽑고, 그분을 강림시킨다. 그리하면…….
‘우리 장로들은 그분의 사도로서…….’
바라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니.
루이사는 이제는 가물가물해져 가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로니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께서 정말 저와 혼인을 하시면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동왕부는 황제의 구상에서 배제되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신 부분이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역시나 그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황제라…….’
다시금 아버지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네 스승이 황제보다 무서웠으면 손을 잡지도 않았겠지.
‘그 일’이 벌어졌을 당시, 아이였던 자신보다 아버지가 느낀 절망이 더욱 크긴 했을 것이다.
명심하겠다 답했지만 그 말은 아무래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황제 따위.’
그녀의 스승은 고대 인류를 구원했던 마도성자의 정수를 이어받은 이였다. 과거 대업에 꼭 필요하다 전해지던 시조의 핏줄에 대한 정보마저 오랜 세월 속에 유실된 지금, 그 시조의 기록에조차 없는 ‘운명을 바꾸는 자’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를 대상으로 한 초월마법술식까지 개발해 낸 사람이 바로 그였다.
본인은 고대의 대마도사들에 비해 모자라다 말하지만, 그거야 마나가 사라진 시대의 탓일 뿐이다.
그 마학(魔學)적 성취만은 시조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은 천재. 그녀의 스승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황제는 어떠한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 관련도 없는 아녀자마저 처형하는 소인배일 뿐이다.
‘그자의 힘은 그저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일 뿐.’
비원이 이뤄지는 날, 자신의 손에 비참하게 부서질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그리 생각하자 다시금 결심이 섰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방왕의 힘을 무시하지는 말아 주시지요. 황실에서 배제된다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그리고 사실 혼약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핑계요?”
“아시겠지만, 이미 제가 왕성에 있기로 한 기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습격을 빌미로 요양을 한다는 핑계도 슬슬 한계에 달했지요.”
“……이곳에 더 머물기 위한 핑계가 혼약이라는 겁니까?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지금 왕부로 돌아간다면, 제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 기약할 수가 없거든요.”
사실 정체를 감추고 은밀하게 활동해 왔지만, 그것을 이들이 알 리는 없었다. 공주라는 신분만 생각하면 충분히 먹힐 만한 변명이었다.
더하여 제국의 손해를 강요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 우리의 의식이 시작되면 인과율이 흔들릴 것이고, 그리되면 신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세상에 관여하려 할 것이다. 특히나 운명을 바꾸는 자를 없애려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사도가 내려올 수도 있어.
– 현세에서 강림한 사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카셀 마탑뿐이다. 그러니 너는 그곳에서 그를 지켜라. 그날이 올 때까지.
대스승이 자신의 억지를 받아 준 또 하나의 이유.
루이사가 그것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눈앞의 붉은 머리 청년 역시 깊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지금 자신의 제안이 왕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형을, 이 나라의 왕을 따르는 이 청년이라면 할 선택은 뻔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거짓 핑계를 진짜로 만드는 것이니 어렵지도 않을 듯하고…….”
그렇지!
“이해해 주시니 기쁘군요. 이거 정말로 반할 것 같은데요, 백작님.”
아마도 10% 정도는 진심이 담기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상대는 그저 농담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피식 웃은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불쑥 물었다.
“……궁금한 점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
“공주님의 신분에 대한 특수성은 저희로서도 참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걸 보니 묘하게 확신이 드는군요.”
“흐음.”
“혹시 제국을 증오하시는 겁니까?”
로니안을 따라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던 루이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제국의 공주가 제국을 증오한다?
보통 사람이 들었을 때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하는 로니안의 눈빛에는 말 그대로 확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흠.
‘증오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단순히 증오라 표현하기에는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의 한이 너무 깊었다.
그때부터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삶.
그것은 이제 증오를 넘어 삶 자체가 되어 있었다.
루이사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로니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비밀을 알고 싶으시면, 그건 혼인한 후에 침대에서 알려드리지요, 서방님.”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로니안의 얼굴을 보니 묘한 승리감이 느껴졌다.
이제야 그가 또래의 남자 같았으니까.
“다음에 좋은 소식으로 다시 뵈어요. 그럼 전 이만.”
루이사가 웃으며 돌아선 순간이었다.
“컹!”
웬 은빛 털을 가진 예쁜 강아지가 자신을 보며 짖고 있었다.
왕궁 내성에 개라니?
그것도 목줄도 없이?
황당한 마음에 로니안을 돌아보니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티르군요. 형님께서 어디선가 데려오신 강아지입니다. 왕궁 어디를 돌아다니든 그냥 놔두라는 명이 있으셨지요.”
“아…… 예.”
왕궁에 방목하는 강아지라.
운명을 바꾸는 자는 과연 취향도 독특한 것 같았다.
루이사는 그냥 그렇게 이해하며 돌아섰지만 은빛 강아지는 그렇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