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2)
362화- 길을 비켜라!
거리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분분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이를 아홉 색의 동심원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지나갔다.
다각다각.
“성전기사단.”
“신검 단장님이다!”
“오! 정말?”
노비엔스의 서쪽 성문이 유난히 붐비는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성도의 주민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익숙한 신전기사들보다는 그들의 가운데에서 철통같은 호위(?)를 받고있는 수레였다.
달달달달.
사면이 철창으로 둘러쳐진 수레 안에는 새하얀, 하지만 먼지가 내려앉은 법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차분한 안색으로 정좌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성녀?”
그녀를 알아본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리자마자 그 파장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성녀라고!?”
“그 추기경님!?”
“이 사람아, 님이라니! 파문 사제한테!”
“아, 아니, 내 말은……!”
웅성웅성.
금세 시끄러워지는 거리.
그 소란은 순식간에 중앙 신전에까지 전해졌다.
“……신검이 일리아를 데리고 성도에 들어왔다고요?”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목소리의 주인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미소와 따뜻한 어조에도 보고를 하는 이는 연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식을 왜 이제야 듣게 된 걸까요?”
“……죄송합니다.”
보고자, 얼마 전 새롭게 트레이시 추기경의 비서로 임명된 로테는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에 핑계를 대던 선임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있어 부러움을 사는 실세 추기경의 비서 자리는 그에게는 재앙일 뿐이었다.
거부할 수도 없는 재앙.
‘신이시여 부디, 제발.’
겁에 질린 그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죄송할 게 아니라 원인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통통한 중년의 여인, 푸근한 인상의 추기경은 생김새처럼 편안한 말투로 그를 추궁했다.
“……성전기사단장이 성도에 도착하기 직전에야 소식을 알렸습니다.”
“어머, 그럼 우리는 성전기사단이 움직인 것도 소식을 받고서야 알았다는 뜻이네요?”
X 됐다.
사색이 된 로테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추기경 예하. 선임자들에게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횡성수설하는 로테의 모습을 본 트레이시 추기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세요.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체벌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거참. 나가서 일 보세요.”
“……예?”
로테의 반문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냥 나가라고?
아무런 징벌도 없이?
하지만 감히 물을 수는 없는 질문이기에 그는 연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예하!”
로테는 트레이시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뒷걸음질 쳤다.
이내 문이 닫히자 한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잘생긴 청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랫사람을 너무 엄하게 다루시는군요, 추기경.”
“어머. 오호호, 그럴 리가요. 저치가 워낙 대가 약해서 그렇죠.”
“거의 달에 한 번씩 사람이 실종되는 자리에 부임했으니 누군들 저러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박힌 가시에 내내 웃고 있던 트레이시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제가 일에 지장을 만든 적이 있던가요, 황자 전하?”
“호오, 자신만만하시군요. 그런데 곧 지장이 생길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주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지?”
“2주 남았습니다, 전하.”
바로스의 말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푸른 머리, 녹색 눈의 미남자가 대답했다.
그 옆,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기사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지요, 추기경. 우리 쪽도 이렇게 날이 갈수록 긴장하고 있는 판에 추기경 쪽은 아주 여유가 만만한 것 같군요. 그냥 ‘인형’에게 말만 시키면 돼서 그런가요?”
그 너스레에 트레이시의 표정 역시 무표정하게 굳어 갔다.
“……말조심하시지요, 전하. 어디에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 귀도 다 우리 사람 아니었나요? 그나저나 그 쉬운 일을 왜 이렇게 미루는지 모르겠네.”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댄 채 너스레를 떨던 바로스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번에도 우리 뒤통수를 칠 궁리 중이신가?”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
아무리 제국의 황자라도 성국의 추기경을 이리 추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의 특수성과 자신의 또 다른 신분 쪽에서 벌인 일이 있는지라 트레이시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듯, 그 일은 저희 마탑 내에 강경 파벌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서…….”
“우리랑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믿어 달라. 최근에 매일 한 번씩 들은 말이군요. 지겹지도 않습니까? 아니면 인형한테 말 한마디 시키면 되는 일이 그리 어렵습니까?”
너도 인형으로 만들어 줄까.
트레이시는 목구멍까지 치민 말과 솟구치는 살기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아레스 황족이 갖춘 정신 보호 장벽은 내 마법으로도 단번에 깰 수 없어. 그리고 그사이 저 기사가 내 목을 치겠지. 지고의 팔찌는 교황의 신성력을 제압하는 데 쓰고 있으니, 굳이 다른 방법을 찾자면…….’
성국에 잠입하기 위해 원치도 않은 고행 사제 노릇만 십수 년을 했다. 그동안 얻은 가장 큰 것이라면 당연히 연기력이라, 트레이시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살기를 감춘 채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오호호, 그로 인해 생길 파장에 대해선 황자 전하께서도 인지하고 계실 텐데요. 가능한 부작용이 덜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 중입니다.”
하지만 바로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제가 이렇게 매일 추기경님을 찾아뵙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 저랑은 의논을 안 하시네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서서 트레이시에게 다가간 바로스의 눈빛은 그 여유로운 말투와는 달리 살벌하게 빛났다.
“아니면, 설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럴 리…….”
쾅!
“그럴 리가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안 그러면 이렇게 여유가 있어서는 안 되지!”
트레이시의 책상을 거세게 내리친 바로스.
속내를 드러낸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트레이시 추기경, 기억하십시오. 나, 바로스 반 아레스는 결코 혼자 죽지 않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적어도 당신은 나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될 겁니다. 알아듣습니까?”
그 눈에 번들거리는 위험한 광기는 카셀 마탑의 장로이자 성국의 추기경인 트레이시조차 압도하는 박력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자답지 않은 눈, 사실상 벼랑 끝에 서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자의 눈이었다.
그 눈빛을 보면서도 거짓을 말하기란 어려웠다.
“……염려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안 했다.
그 무성의한 대답에 바로스 역시 코웃음을 쳤다.
“최선은 무슨. 그냥 우리의 요구 사항을 따르면 될 것을.”
“……아무래도 부작용이 클 테니 수습책을 고민하는 중입니다.”
트레이시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바로스는 이내 차갑게 돌아섰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소. 그때는 확답을 줘야 할 거요. 이젠 정말 시간이 없으니.”
바로스의 구두 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문이 쿵 닫힌 뒤에야 트레이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리고 그제야 조금 전의 보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위기에 몰린 황자의 광기 어린 태도에 놀란 나머지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리아!’
성전기사단이 왜 정보를 감췄을까?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바로 의자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벌컥 열어젖힌 집무실의 문밖에서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자를 마주했다.
당황스러웠지만 트레이시는 금세 동요를 감춘 채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 황자 전하.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너무 빨리 따라 나온 것 같은데.”
“……그렇군요. 마음이 급하다 보니.”
“흠. 그대의 행보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이미 실각된 성녀가 잡혀 왔다는 게 그리 큰일입니까?”
“아……. 무지렁이들에게 헛소문이 퍼지기 전에 정리를 끝내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트레이시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이렇게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신 거였나 봅니다. 어떻게, 우리가 좀 도와드릴까요?”
“호호호,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지요. 어디까지나 성국 내부의 문제니까요.”
“추기경께서 하도 공사가 다망하셔서 ‘우리 일’엔 소홀하신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금세 처리하고 방도를 마련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연신 저자세로 나오는 모습.
황자에 부족하지 않은 고귀한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책잡힌 게 많은 자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한 번 더 믿어 보겠소이다.”
“예. 믿어 주십시오, 전하.”
‘그 믿음에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트레이시는 생각은 속으로 감추며 빠르게 돌아섰고, 그 모습을 본 바로스 역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바로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야 그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래도 폐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서슴지 않고 나온 레오스의 대답에 바로스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내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제롬. 그대의 생각은?”
“……예?”
“트레이시 추기경이 어찌 나올 것 같냐는 말이다.”
“……저 역시 레오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흠…….”
제롬의 어정쩡한 답변을 들은 바로스는 잠시간 제롬의 하나 남은 눈을 들여다보다 쓰게 웃었다.
“여유를 가지게, 제롬 경.”
“……예?”
“어째 자네가 나보다 더 스트레스가 많은 듯해서 하는 말이야. 아니면 오러유저도 그리 피로를 잘 느끼나?”
“……죄송합니다. 컨디션 관리에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 눈에 담긴 무거운 감정을 보며, 바로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돌아섰다.
“1호 있는가.”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내 빈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예, 전하.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과는?”
– 집무실에도 사저에도 특기할 만한 물건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쉽게 되는 일이 없군.”
입술을 깨문 바로스는 걸으면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허공에 몸을 숨긴 자도, 바짝 뒤를 따르는 레오스와 제롬도 그런 바로스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배정받은 신전의 숙소 앞에 다다라서야 바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과 내 이익이 서로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까?”
“제국입니다.”
“제국입니다.”
두 가신의 목소리는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제국의 신하로서,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하듯 교육받은 자로서는 당연한 답변이었다.
“그 대가가 내 목숨이라면?”
그러나 이어진 물음에는 그들도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일반 국민이라면 당연히 제국이라 말했겠지만, 그 대상이 자신들이 모시는 황자다.
눈에 띄게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제롬과는 달리, 레오스는 잠시간 생각 후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융통성을 가지시면 됩니다. 합의점을 찾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에 바로스는 굳어 버린 두 가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자들은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것 같다. 들을 생각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리 시간을 끌 이유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하지?”
“……예.”
“하지만 저들이 어찌 나오건, 폐하께선 이 상황을 이용할 방도를 찾으실 거야. 황실의 숙원인 성국 제압에 이렇게 가까이 다가간 적은 없으니까.”
그 말에 제롬이 유난히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바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지금 자신의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계획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황실에서 내 입지는 없어지겠지. 계승전에서도 탈락할 테고. 그럼 어차피 나는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자, 그럼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쉽사리 대답을 못 하는 가운데 바로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성녀. 어찌 될 것 같은가, 제롬?”
“전하, 설마……?”
레오스가 경악하는 가운데도 제롬은 움찔하며 대답했다.
“성국의 성법은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엄격합니다. 그래서 폐하의 요구도 쉽게 이행하지 못하는 것일 수…….”
“그래서 성녀에 대한 결론은?”
“파문 사제라면, 그것도 요인을 죽인 후 탈주한 이라면 극형에 처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레오스, 자네에게 묻겠네. 그 성녀라는 자가 정말 가짜인가?”
어느새 제게 향한 시선에 황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한 레오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닙니다. 교황을 조종하는 트레이시가 숙청한 것뿐입니다.”
“……그럼 진짜 성녀라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설마 황자 전하…….”
“그래, 그 성녀를 내가 구해 준다면? 그리고 함께 저자들을 쳐낸다면?”
그 말에 제롬의 하나 남은 두 눈이 커지고, 레오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전하. 무엇보다 황실에서 반응도…….”
“어쩔 수 없다. 저들이 뜻을 따르지 않는 이상, 내가 살려면 대타를 구해야지. 성국을 조종할 대타를……. 제국의 이득과 내 이득을 상충시킬 만한 대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
“…….”
외눈의 초인이 눈을 질끈 감고, 하나뿐인 기록관이 침을 꿀꺽 삼키는데 황자의 초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성녀를 복직시켜서 세뇌된 교황을 찍어 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전폭적인 협력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