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3)
363화
“교황 성하를 만날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트레이시 추기경?”
하먼이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살벌한 기세가 집무실을 장악했다.
트레이시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 걸 느꼈다.
‘빌어먹을.’
신성력과 포스, 두 가지 이능 모두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신성 오러(Saint Aura)’의 힘은 카셀 마탑의 마력과는 상극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카셀 마탑 내 소울 위저드 학파의 장로로서는 드물게 영혼과 차원이 아닌, 생명과 빛의 속성을 개화한 마도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추기경급의 고위 성직자도 속일 만한 특이한 마법이더라도 그 본질은 같았으니까.
‘영혼이 갉아 먹히는 느낌이야.’
오래전 탑이 공멸을 각오하고 간신히 멸절시켰다는 검신일맥의 힘도 이보다는 못하지 않았을까.
트레이시는 살이 떨리는 기분을 억지로 참아 내며 애써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조의 유물, 지고의 팔찌에 대한 흔적을 쫓아 교단에 잠입할 때부터 수도 없이 연습해 온 웃음을.
“교황위에 오르신 뒤로 줄곧 격무에 시달리신 탓에 휴식이 필요합니다. 당분간은 모든 접견을 거절하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교황께서 ‘직접’ 파문을 명하신 가짜 성녀를 잡아 왔는데도, 얼굴도 보지 않으시겠단 말이오?”
유독 강조한 한 단어에 트레이시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의심을 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성녀를 잡아서 데리고 왔다면, 그 과정에 성녀의 성흔이 진짜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성녀가 일부러 가이아 왕국까지 찾아갔겠지.’
그게 아니면 서남쪽 끝으로 파견된 성전기사단장이 어찌 성녀를 잡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검이 그런 성녀를 돕기보다 압송해 왔다는 것인데, 그러니 더욱 만나게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오호호, 아시다시피 성하께서 연로하시지 않습니까? 성녀의 끔찍한 짓거리 때문에 충격을 받으신 탓도 있으니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끔찍한 짓?”
“아, 모르셨습니까? 성녀의 경호를 자청했던 제국의 초인께서 그 거처에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교황 성하의 칩거 명령까지 어기고 탈주했죠.”
교황의 대체재가 될 수 있는 성녀를 확보하기 위해 보내진 막스 일레이야가 자청해서 성국에 봉사한 걸로 바뀌고.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제국 초인의 정점, 검혼과 삭풍의 마도사가 조만간에 성도를 방문하겠다는 최후통첩까지 왔지요.”
자신이 제국 황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기에 심해진 압박을 그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그것을 하먼이 알 리는 없으니 트레이시의 표정은 그저 당당하기만 했다.
“성녀 홀로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외부의 조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혹, 다른 조력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음.”
신검이 무심한 표정으로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트레이시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완고한 원칙주의자. 이용하기는 아주 쉽지.’
그 생각대로 신검은 순순히 사실을 토해 냈다.
“……있었지만 놓쳤소. 성녀께서 막아 서는 바람에.”
“단장님이 성녀, 아니 그 여자가 막는다고 막히는 분이셨습니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성녀가 자결하겠다며 가로막는 통에 어쩔 수 없었소.”
그 말에는 트레이시도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그 여자는 이미 파문되었습니다. 성녀라는 호칭은 좀…….”
굳이 흠을 잡자면 그 하나밖에 없었기에 한 소리였지만 하먼은 그저 담담한 어조로 트레이시의 말을 끊었다.
“본인은 압송하는 내내 성녀의 성흔을 몇 번이고 확인했소. 파문 조치에 대해서도 교단에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고.”
“성흔을 확인하셨다라……. 그럼 그 여자는 왜 도망쳤을까요?”
“음?”
“이미 전대 교황의 선례가 있습니다. 단장님의 눈을 속인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요.”
“…….”
약점을 찔린 듯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하먼을 보며 트레이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대 교황을 수십 년간 모신 것이 단장님 아니었나요?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성녀는 진짜라고? 그 여자도 같은 경우니까 교단에서 쉽게 알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허…….”
하먼의 입에서 한숨 섞인 탄식이 터져 나오자, 트레이시는 승리를 예감하며 결정타를 때렸다.
“아직 그 여자의 트릭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밝히려 할 때 도망을 쳤지요. 제국의 초인을 죽이고!”
트레이시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하먼의 눈을 마주 바라보면서 분개한 듯 연신 소리를 질렀다.
“그로 인해 성국을 위태롭게 한 죄만으로도 극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이만하면 아무 소리 못 할 것이다.
‘원칙주의자는 원칙을 어기지 못할 테니까.’
트레이시가 그렇게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완전히 제압했다 생각한 성전기사단장이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교황 성하께서 그 재판을 위해 나오시겠구려?”
“……그거야 성하께서 정하실 문제지요. 하지만 일단은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녀에 대한 처분을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면 성하께서는……?”
“성하께서는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공식 활동을 시작하실 겁니다.”
당신이 성도에 있는 한 교황은 계속 아플 예정이다.
그 속내는 미소 속에 감추었다.
그런데 그 순간,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담담한 표정이던 하먼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의심스럽군.”
“예? 그 무슨 무례한 말씀을……!”
“그거 아십니까, 트레이시 추기경?”
“예? 뭐를…… 말씀이십니까?”
“전대 교황, 아니 그 사기꾼은 자신의 10m 내에는 나를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지요. 무슨 핑계를 대서건 그런 상황을 피했습니다. 마지막 재판 때까지도요. 물론 그때는 영문을 몰랐지만…….”
단 한 걸음.
하먼이 갑자기 앞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두 사람 간의 거리는 그가 말한 10m 안쪽으로 가까워졌다.
“왜인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군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갑자기 몰려드는 불안감에 트레이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챙!
맑은 소리를 내며 뽑힌 검이 번개처럼 트레이시의 목에 겨눠졌다.
“왜 신성력 한 줌 없는 마법사가 추기경의 자리에 있는지 설명을 해 보실까?”
꽈광!
머릿속에 벼락이 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수십 년간 감춰 온 비밀이 까발려진 트레이시는 잠시간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리고서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장!”
트레이시가 떨리는 음성으로 항변했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독대 자리를 만든 것은 그녀였다. 그 말인즉, 하먼을 말릴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전대 교황, 그 사기꾼조차 미약하지만 신성력은 있었다. 당시 타락했던 추기경들조차 무너져 가는 신성력의 끝자락은 붙잡고는 있었어! 그런데…….”
물론 누가 있다 한들 지금처럼 여과 없이 살기를 드러낸 신검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네년은 뭐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실린 살기가 집무실을 가득 채우자 트레이시는 그 기세에 밀려 계속해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다, 단장! 진정하세요! 나는 당최 단장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다만 사실이기에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떻게?! 오스틴 추기경도, 성녀도 못 알아봤는데?’
카셀 마탑의 역사에도 이런 말은 없었다.
“헛소리는……!”
그런데 그 순간 하먼의 목소리와 살기가 너무 커져서였을까.
쾅!
집무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성기사들, 즉 하먼의 부하들이 문을 부술 듯 열고 뛰쳐 들어왔다.
“단장님!”
“다, 단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각기 성기사의 품위는 내던지고 하먼의 팔다리에 엉겨 붙는데, 그 난리 속에서 부관인 라인 하퍼가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하먼이 멈칫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싸늘한 얼굴로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다.
“누가 누구를 재판해? 어처구니가 없군.”
“단장님!”
라인 하퍼가 기겁을 하며 다시 소리를 지른 뒤에야 하먼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트레이시는 자신의 노림수가 모조리 박살 났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발악처럼 소리를 질렀다.
“서, 성전기사단은 교단의 정치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어찌 저자가 자신의 비밀을 이렇게 단번에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증명을 강요할 수도 없다. 교단 무력 세력의 중추인 성전기사단은 그 위험성 때문에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으니까.
성전기사단은 그저 교황이나 추기경 회의의 결과를 집행하는 집행 부서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말에도 하먼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 사람이 그간 쌓아 온 명망이 나쁘지는 않아 여론은 움직일 수 있겠지. 그러니 각오하시오, 트레이시 추기…… 아니, 가짜 사제.”
성전기사단이 아니라 교단의 사제들이 요구한다면 그녀 역시 전대 교황처럼 탄핵 심판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하먼이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증명한다면, 그것으로 그녀의 운명은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당황하던 트레이시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흠,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단장님. 이유야 모르겠지만 저는 당연히 모든 추궁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증명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한 얼굴.
그에 하먼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레스만, 하퍼. 지금 이 순간부터 트레이시 추기……경을 밀착 ‘호위’하라.”
“예!”
“그녀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운신의 자유를 뺏지 않되, 노비엔스 밖으로 나서지는 못하게 하라. 이것은 성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성전기사단장으로서의 명이다.”
“예!”
자신의 권한 내에서 추기경을 가장 압박할 수 있는 방안.
“설마 이것도 거부하지는 않겠지요? 추. 기. 경. 예하.”
하먼은 그리 말하며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어쩔 수 없지요. 받아들이겠습니다.”
트레이시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면서 받아들였다.
그것이 의외였을까.
하먼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냥 돌아섰다.
반면 트레이시는 그런 무례한 모습에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배웅했다.
그 모습을 본 남겨진 성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들의 단장과 인상 좋은 추기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성전기사단의 정예일 텐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이 트레이시의 마음을 조금 더 안정시켰다.
“한동안 고생하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제님들.”
“아, 예.”
“예, 예하.”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
신검도 아닌 이 정도의 하수들이야 얼마든지 조종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어쨌거나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이 수는 틀렸군.’
일이 전부 틀어져 버린 것은 확실했다. 성녀를 처형하기는커녕, 자신에 대한 탄핵 심판과 교황에 대한 교차 검증까지 들어갈 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뭐 굳이 억지로 처리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이제 곧 모습을 감춰야 했다.
제국과 성국을 충돌시키고, 세상에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녀의 임무는 끝.
이젠 황제가 그들을 쫓지 못하게 상황을 폭주시키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더하여 시조의 유물인 지고의 팔찌와 ‘다른 하나’를 챙겨서 떠나면 끝이다. 굳이 억지로 성녀를 처형하며 신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걱정했던 최악의 상황은 신검이 억지로 교황을 만나려 하는 것이었어. 그걸 막았으니 됐다.’
신검이 무력으로 대세를 뒤집으려 했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기는 했지만, 성녀의 문제로 신검을 묶어 두려던 생각은 이뤄진 것이다.
‘여론을 움직이겠다면 신검은 오히려 다른 곳을 열심히 돌아다닐 거야.’
그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풀려 나간다면, 그가 원칙을 어겨 가면서 과격한 수를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간 꼭두각시로 뽑아 놓은 추기경들을 움직여 시간을 끌면 돼.’
그렇게 생각하며 트레이시는 놀란 마음을 달랬다. 자신의 집무실을 나선 신검이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 * *
“……제국의 황자가 중앙 신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신검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검은 머리, 검은 눈, 노란 피부의 잘생긴 청년을 보며 살짝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상대는 반대로 활짝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하하. 저도 세상에 이름 높은 단장님을 이제야 뵙게 되어 아쉽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의례상 하는 인사는 필요 없다. 용건을 말해라.
일반적인 귀족의 예법을 생각하면 이는 제국의 황자, 아니 어디 소국의 왕자에게 하기에도 너무하다 싶은 냉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바로스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기다렸다는 듯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현재 교황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하먼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