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4)
364화
“현재 교황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성녀를 통해 제기된 의구심.
그리고 지금 그 당사자로 지목된 트레이시 추기경을 만난 뒤 성립된 합리적 의심.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엉뚱한 이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다.
‘나만, 나만 바보였는가.’
참담한 기분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비통한 마음에도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게 비록 상대가 바라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성국 내부의 일입니다. 제국의 사람이 관여할 이유는 없습니다.”
선을 긋는 말.
하지만 그러면 물러나리라 여겼던 황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호오,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미묘한 눈빛에 어린 것이 비웃음보다는 감탄 같아 보여 하먼은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황자 전하?”
“아니,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두 축 중 하나인 성국이 제대로 자리를 찾아갔으면 해서 드리는 충언이었습니다. 쓸데없는 간섭이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 정중한 태도가 하먼의 무거운 마음을 움직였다. 적어도 시비를 걸거나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 주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성국은 그야말로 유례없는 혼란을 맞이한 것이었다. 상대가 서른 언저리의 애송이라고는 하나, 신분이 신분인 만큼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정중한 응대에 바로스 역시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신의 검이라 불리는 단장님께 이렇게 정중한 대접을 받을 만한 몸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한 만큼, 염치 불구하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국의 황자라는 존귀한 신분으로 어찌 이렇게 정중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가.
하먼을 비롯한 성기사들의 얼굴에 호감의 빛이 어렸다.
그리고 바로스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스와 제롬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바로스의 말은 그 누구도 웃으면서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제국 황실에서 적으로 규정한 음험한 마법사 세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을 무시하고 외도(外道)를 추구하는 이들로, 사람을 제물로 삼고 정신을 조종하는 술수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놈들이죠. 그들은…….”
– 검은 뱀의 계약은 영혼이 맺은 계약. 이제 네 선택은 절대 무를 수 없다. 어떤 신도, 어떤 마법도 이 계약을 깨지 못할 것이다.
무난하게 말을 이어 가던 바로스가 잠시간 말을 멈췄다. 갑자기 뇌리를 잠식한 늙수그레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에 순간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를 뿌드득 갈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떨쳐 버렸다.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은 당신이야, 탑주.’
갑자기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자신이 살고 봐야 하니까.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은 그의 생존 욕구를 막지 못했다.
살아야 한다. 실패한다면 뒤는 없다.
바로스는 그것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놈들에게 당한 것이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놈들 때문에 저 역시 고생을 꽤 했으니까요.”
아예 없는 말은 아닌지라 거짓말이 태연하게 나왔다.
“아무튼 그들은 검은 뱀, 혹은 카셀 마탑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그들이 고대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새로운 교황 각하의 정신을 장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뭐라고요?”
하먼의 뒤에 있던 부관, 라인 하퍼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정신 마법은 현혹 계열 마법이나 수면 마법 등으로, 사실상은 영혼보다는 뇌를 자극하여 특정 반응을 유도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내부에 간섭하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포스나 다른 마나보다도 신성력이 으뜸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신성 모독에 가까운 그 말에 라인 하퍼가 하먼의 허락도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고, 그 휘하 기사들마저도 분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하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 모두는 놀란 눈으로 상관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단장님!”
“그게 무슨……!”
웅성거리는 뒤쪽의 소란은 하먼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멎었다.
그 역시 신성 모독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해 부하들에게도 상의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또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성녀님께도 들었고, 좀 전에 직접 정황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트레이시 추기경, 그녀가 그 마법사 집단에 속한 겁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당사자까지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트레이시 추기경, 그녀가 바로 교황 성하를 세뇌한 흑막입니다.”
인정하기 싫은 그 사실을 진실이라 가정하면 당장 지목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바로스가 그 지극히 당연한 추론을 극찬하자, 하먼은 오히려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하면 전하께서 제게 이야기해 주고 싶으신 것이 그 마법사 집단의 정체뿐입니까?”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그리 말하는 하먼의 눈빛을 보며 바로스는 씩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요. 저는 그들을 쫓아 이곳에 온 몸, 다행히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아 성국에 뿌리내린 그들의 조직까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저야 이곳에서의 세력이 부족하지만, 신검의 이름이라면 한 번에 도려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기대하고있습니다.”
그 말은 하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트레이시 하나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사실이 확인되니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충분히 도움이 되겠군요.”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걱정이 많았는데 짐을 좀 던 기분입니다. 하하.”
하먼은 정말로 홀가분하게 웃는 바로스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자가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정의로웠기에 솔직히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빤히 바라보는 눈초리에도 바로스의 표정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아, 성전기사단의 권한으로 사제들에 대한 즉결 처분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일단 일반 사제들을 움직여 탄핵이나 심의 재판을 열어야겠지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전하께서 주신, 아니 주실 정보가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러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한 달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먼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외부 인사에게 계획까지 말한 것이었다.
그만큼 확실히 청소하겠다는 각오를 담아 한 말이었지만, 이어진 바로스의 말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래서는 너무 늦습니다. 그 마법사들이 제국에 끼친 피해 때문에 제국군이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전 작업은 제게 맡겨 주시지요.”
* * * 성도에 태풍이 불었다. 물리적인 태풍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들었어? 교황 성하께서…….”
“나도 들었어.”
“어어, 나도.”
트레이시 추기경이 건강이 좋지 않은 교황 성하를 조종하여 성국을 지배하려 했다.
도무지 믿기 힘든 황당한 소문이었지만.
전대 교황을 축출한 성녀에 대한 파문도 몸져누운 교황 대신 트레이시 추기경이 한 짓이다.
그녀는 교황 성하의 관저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고, 자신만이 드나들고 있다.
그 황당한 소문들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 합쳐지자, 하나둘씩 그 실체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상황을 더욱 가속화한 것은 교황이 정말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불과 며칠 만에 교단 내부에서도 사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고 적극적으로.
누군가가 뒤에서 부추긴 것처럼.
“트레이시 추기경은 진상을 밝혀라!”
“교황 성하를 뵙고 싶다!”
“탄핵 심판을 개최하라!”
중앙 신전의 곳곳에서 모여든 사제들이 교황의 관저 앞, 그리고 트레이시 추기경의 관저 근처에서 연신 시위를 벌였다.
“이, 이보게들, 다 순리에 따라 이뤄질 거야! 이만 돌아들 가게!”
“추기경들의 상의하에 곧 심의 재판이 열릴 것이오. 모든 진실은 그때 밝혀질 테니 지금은 돌아가서 교단의 지시를 기다리시오!”
성녀의 파문 사건 이후 추기경으로 옹립된 사제들이 일반 사제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트레이시 추기경이 뽑은 허수아비들 주제에!”
“성녀님을 데려와!”
교단 고위층만의 비밀이어야 할 사실들이 일반 사제들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었다.
“쳐들어가자! 교황 성하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교황님을 구하자!”
“우와아아!”
젊은 사제들을 주축으로, 흥분한 사제들이 추기경들의 관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관저를 지키는 성기사들이나 신전 병사들은 그런 사제들을 감히 막지 못했다.
결국 교황의 관저마저 사제들에게 돌파당하기 직전까지 이르자, 트레이시 추기경이 자신의 관저가 아닌 교황의 관저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돌아가세요! 교황 성하께선 매우 편찮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죄를 짓고 계시는 겁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애처롭게 부르짖는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묻어났다.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수많은 사제들이 순간 주춤하며 뒷걸음질 칠 정도로.
“그, 그런가?”
“확실히 정말 편찮으신 거면…….”
“……그럼 큰일이지.”
좀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해서 앞장섰던 사제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웅성거리자, 그 뒤를 따르던 사제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앞장선 이들의 눈빛이 멍하게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웃기지 마라!”
퍽.
갑자기 누군가가 던진 달걀 하나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떳떳하면 문을 열어라! 설마 우리 사제들이 교황 성하의 존체에 손을 댈까!”
누군지 모를 이의 고함이 정신이 멀쩡한 여러 사제들을 다시 이끌었다.
“맞다!”
“여기서 누가 감히 교황 성하를 해하겠는가!”
“우리는 그분의 안위만 확인하면 된다!”
전면에 서서 소리치던 십수 명의 사제들이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잃었어도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그러자 얼굴에 흘러내리는 계란을 닦아 낸 트레이시가 결연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좋습니다! 저는 당당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재판이 며칠 안에 열릴 겁니다! 그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소란도 성하의 건강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일단의 인물들이 일제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공했습니다. 저 말까지 나온 이상,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이상 시간을 끌지 못할 겁니다.”
“그 전에 트레이시와 검은 뱀의 일당들이 어디로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도망치면 그대로 참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재판 시간이 절약되고 좋죠.”
성전기사단의 수뇌부가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이미 감옥에서 풀려난 일리아만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하먼이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2황자. 확실히 이런 수단으로는 뛰어나군요. 사람을 많이 다뤄 본 티가 납니다.”
“그렇습니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예, 조금.”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그녀에 대한 막연한 의심마저 떨쳐 버린 하먼의 얼굴에는 이제 굳은 신뢰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런 성녀가 꺼내는 말이 심상치가 않았다.
“2황자가 왜 우리를 돕는 걸까요?”
“예? 그거야 그자들이 제국의 적…….”
“……2황자를 초청한 것은 교황의 즉위식 이후입니다. 즉, 그분이 이미 세뇌된 다음이라는 거죠. 그런데 왜?”
그 말에 하먼의 표정 역시 어두워지는데, 그 대화의 중심이 된 대상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검혼과 삭풍의 군대가 진군 속도를 높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도착 예정 시간은?”
“일주일 안쪽입니다.”
그 말에 바로스의 안색이 더욱 참혹하게 굳어졌다.
타이밍이 너무 미묘했다.
“기껏 판을 만들었는데……. 이유가 뭐일 것 같나?”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검은 뱀을 찍어 내려는 핑계로 성국에 간섭할 생각이신 듯합니다.”
“내가 해도 될 일을…….”
“군대가 확실하긴 하지요.”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신검과 성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검혼께서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서 그들이 할 일이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유는 뭐라 하고?”
“솔직히 말을 하면…….”
“그건 안 돼! 그렇게까지 하면 결국 내 입김이 약해져. 성국이 내 손에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해.”
“전하…….”
심각한 분위기의 바로스와 레오스.
그 뒤편에서 무거운 얼굴의 제롬은 연신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