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7)
367화달빛조차 숨을 죽인 야심한 밤.
수행을 위한 사제들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화려한 방에서 누군가의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휘이잉.
슬며시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든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가운데. 고풍스러운 침대 곁에 머문 바람이 어느 순간 투명한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검은 칼날이 되어 그대로 침대 위로 내리꽂혔다.
푸우욱.
푸확.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에 새하얀 이불이 순식간에 검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피가 뿜어져 나온 곳은 검은색 단검이 꽂힌 이불 아래가 아니었다.
“큭!?”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회색 복면인은 팔이 잘려 나간 어깨를 붙잡고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단검이 꽂힌 자리에서 솟구친 은빛 오러는 복면인의 온전한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촤아악!
길게 베인 복부, 결국 힘없이 주저앉은 복면인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레스 제국 황실 특수감찰부원, 통칭 귀신에게 임무 중 대화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는 도무지 한 마디를 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제, 제롬 경? 당신이 왜?!”
협력자여야 했을 이가 오히려 방해자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황당한 목소리에 상대방, 외눈의 기사가 담담히 대답했다.
“왜긴, 기사가 주군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 아니겠나.”
“미친 건가, 당신!?”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거부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혹시나 누가 들을까 목구멍까지 치솟은 진실의 소리를 가까스로 비트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흐흐흐. 미친놈. 영화를 버리고 스스로 지옥의 구덩이로 들어가다니.”
“……1호. 생각 외로 말이 많군.”
쿨럭.
“너로 인해 디카이드 공작가마저 벼락을 맞을 것이다.”
피를 왈칵 토해 낸 1호가 복면 속에서 저주 같은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기사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숙조부께서 계시는데 말이야.”
“끄으으.”
1호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털썩 쓰러지자, 침대 옆 새까맣기만 하던 공간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이 뿜어지더니 검은 머리의 미청년이 걸어 나왔다.
“……수고했소, 제롬 경.”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제롬의 모습에 바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대가 지금 무슨 희생을 했는지 모르지 않아. 내가 어찌 갚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말이야.”
그 말에 제롬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기사의 도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하나뿐인 눈이 결연함으로 빛나는 제롬은 이틀 전 그날을 떠올렸다.
황자가 황제의 명령을 알아차리고 자신과 레오스를 불러 모았던 그날을.
– 폐하의 칼은 귀신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한껏 용기 내어 꺼내려던 말은 힘겨운 자기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자가 뜻밖의 말로 그의 고백을 막았다.
– 하하, 그런 소리는 말게. 자네가 그 칼이라면 나는 어차피 죽은 목숨 아닌가.
– 믿지 못할 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무진 애를 쓴 바보라면 그리 죽어도 싸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한 점 흔들림 없이 시선을 마주해 오는 눈.
그 눈이 제롬의 긴 고민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제 오히려 황자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 주었다.
“보답받지 못할 충정임을 알면서도 행해 준 그대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제롬 경. 내가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반드시 보상하겠소.”
“아닙니다, 전하. 그보다는 빨리 움직이시지요. 말씀드렸듯, 전하께 따라붙은 귀신은 1호만이 아닙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실 겁니까?”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나.”
일단 살아야 한다.
레오스가 미리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곳은 이제 멀지 않았다.
그리고…….
“길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전하.”
뒤에는 자신을 위해 형극의 길을 자처한 자신의 기사가 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부탁하네.”
“예!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거처를 나서는 순간, 예상대로 습격이 시작되었다.
슥.
어두운 밤, 눈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검은 비수는 몇 번을 봐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 곁에는 그 모든 것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 시야’를 가진 초인이 있었다.
쩌어억.
은빛의 오러는 검은 비수가 튀어나오기 직전에 이미 허공을 양단했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는 잘려 나간 신체 일부와 함께 대량의 피가 솟구쳤다.
“이걸로 다섯, 계획에 직접적으로 동원된 귀신들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 놈들을 처리하러 가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길로 쭉 가십시오.”
“알겠네.”
“부디, 보중하십시오.”
“그대도 조심하게. 귀신들을 전부 죽여 입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말을 이으려던 바로스는 순간 멈칫했다.
차라리 뭐? 그때 가서 다시 나를 치라고?
‘바보 같은 소리.’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바로스는 그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바로 돌아섰다.
“아니, 아닐세. 꼭 다시 만나세. 좋은 날, 좋은 모습으로.”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말을 하는 이는 확신이 없었지만.
“예. 반드시.”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는 결연하기만 했다.
그 서글픈 괴리감에 돌아선 바로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조금 늦으셨습니다, 전하.”
“……말이 많군. 그대도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텐데.”
“그렇죠. 하지만 전하도 제가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니까요. 호호.”
‘것’이라.
그를 물건 취급하는 트레이시의 말에도 바로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살아 온 내내 자부심의 근간이 되었던 핏줄.
그 근원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바, 살기 위해선 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것이 설령 악마의 손일지라도.’
바로스가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불태우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인적이 드문 복도에 이르렀다.
그그그극.
트레이시의 손짓을 따라 굳건해 보이던 벽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생겨났다. 새카만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마치 자신을 집어삼키는 수렁 같아 바로스의 안색이 더욱 딱딱해졌다.
하지만.
“서두르지.”
그 안으로 향하는 바로스의 발걸음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 저를 따라……. 호호, 꽤 적극적이시네요. 좋습니다. 가시지요.”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예상도 못 했던 터라, 그 뒤를 따르는 트레이시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내 그들을 삼킨 벽은 언제 계단이 있었냐는 듯 다시금 매끈한 순백의 장벽이 되어 그 안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기척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 시각.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선 신전의 중요 인물 두 사람이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교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잠드신 상태입니다.”
“그래도 바로 전처럼 활동하시지는 못하겠지요?”
“예. 아마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겁니다…….”
일리아의 말에 하먼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이런 참담한 짓거리를 저지른 자들을 그냥 보내야 한다니, 정말 한숨만 나오는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단장님. 지금 저들을 잡아 봤자 제국에 시빗거리만 제공해 주는 셈입니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 제국인데…….”
“그러니 더욱 놓아주어야죠. 저들은 지속적으로 제국의 우환이 될 테니까요.”
성녀의 말에 하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밤하늘, 구름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달이 가장 어두웠던 밤을 다소나마 밝혀 주는 옅은 달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지금 성국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자연히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덕분에 최악의 경우는 피했습니다, 로건 폐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다시 습관처럼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신께 올리는 기도였지만, 오늘은 그 감사의 대상이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번쩍.
푸르게 빛나는 그녀의 의식 속 세상에서 마주한 그녀의 신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붉은 눈……%#@……의 사자, 신의 뜻을……@$^%.
여전히 먼 음성. 하지만 조금은 더 뚜렷해진 목소리.
성녀라는 말이 부끄럽게도 여전히 신언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붉은 눈이라면…….
‘아마도 로건 폐하를 칭찬하시는 거겠지.’
일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신을 바라보며 답했다.
– 로건 왕에게 신의 치하를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의 종으로서 신께 부끄럽지 않게 충분히 보답하겠습니다.
이전에 비해 조금은 더 형체가 뚜렷해진 그녀의 신.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의 거대한 형상이 가슴을 치며 그녀의 목소리에 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신언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해 답답한 것처럼 보였다.
–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온전히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일리아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며 다시금 속죄의 기도를 올렸다.
* * *
“황자가 사라졌다?”
“예. 정체 모를 자들이 황자를 납치했다고 합니다.”
“특수감찰부와 제롬이 있는데?”
“파견된 귀…… 흠, 흠. 특수감찰부원들은 전멸하고, 제롬 경도 중상을 입은 채 요양 중이라고 합니다.”
“허어…….”
기사의 보고에 노인, 트리스 혼스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어찌 생각하나, 갈렌?”
그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얄미울 정도로 청년기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백금발의 마도사가 말을 받았다.
“좀 이상하긴 하군요. 하지만 카셀 마탑이 작정을 하고 나섰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트리스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야.’
황자를 죽였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죽고, 제롬까지 쓰러졌다는 것이 너무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은밀한 계획을 중인환시리에 떠들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황제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있는 진실.
그것은 눈앞의 삭풍의 마도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혹시 그 녀석이…….’
트리스는 제자의 성품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었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흠, 어쨌건 우리는 계획대로 전진한다.”
“예? 황자 전하는요?”
“……황실에 보고하고 명을 기다리되, 본래 하려던 작전은 그대로 간다.”
“하긴, 이 작전만 생각하면 오히려 더 잘됐군요.”
“뭐라?”
비꼬는 듯한 말에 트리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마도사, 삭풍의 마도사 갈렌 디카이드.
그의 본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자신과 황제 앞에서만큼은 처신을 조심했었다. 더구나 중상을 입었다는 제롬은 자기 제자이기 전에 디카이드 가문의 조카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잘됐다?’
트리스가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갈렌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그 시선을 빤히 마주했다.
“잘된 일 아닙니까? 황자 전하께서 노비엔스 내부에서 실종되셨다는데, 막스 녀석 정도 죽은 것보다야는 이게 더 확실한 핑계 아닙니까.”
이어진 갈렌의 말에는 트리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그래. 허허, 그렇군.”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황제의 핏줄을 자기 제자의 손으로 처단하는 것보다는 원인 모를 실종이 훨씬 낫다.
제자의 마음도 다치지 않을 테고, 이 얼마나 깔끔한가.
물론 그러자면…….
‘실종된 2황자가 다시 나타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 귀신들을 확실히 움직여야겠어.’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 추가되었지만, 그로서도 이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좋다. 이대로 진군해서 노비엔스에 입성한다. 성국에 전하라! 막스 일레이야의 죽음과 더불어 황자 전하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트리스의 목소리가 진영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제국 중앙군, 그리고 혼스비 가문과 디카이드 가문의 정예가 혼합된 1만의 대군은 한층 속도를 높여 목표인 성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