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69)
369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고 해도, 자네는 힘들어질 거야.
– 각오하고 있습니다.
일이 벌어지기 전 그날, 새삼 다시 충성을 맹세하던 제롬의 앞에서 바로스는 그리 말했다.
– 카셀 마탑이 나를 데려가려는 것은 아마도 제국을 흔들기 위함이겠지만, 나 역시 살기 위해선 그 역할을 자처할 수밖에 없어.
– 이해하고 있습니다.
– 그리되면 결국 자네의 생명이 위험해지는데도 말인가?
– …….
– 나를 몰염치한 자로 만들지 말게, 제롬. 그러니 최소한의 방도는 마련해 보세. 자네가 살 방법을.
– ……귀신을 완벽히 제거하고 카셀 마탑에 의한 납치로 몰고 가는 방법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그걸로 트리스 공이 속아 넘어가겠나?
– ……그리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희박한 확률에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는 자네 목숨을 대가로 내 목숨을 건진 것밖에 더 되는가!
벌겋게 핏발이 선 황자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 나 바로스 반 아레스는 은혜든 원한이든, 언제나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 준다는 각오로 살아왔어.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 흐, 흐흐. 이 비참한 꼴을 보면 신뢰가 가지는 않겠지만 말이네.
– ……아무리 폐하의 뜻이라고는 하나 암살을, 더구나 그 자식을 베라는 명령은 따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기사의 도리를 지킨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나! 어찌!
– …….
– 하아……. 좋아. 이렇게 하세. 조금 초라하고 비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일단 자네가 살아야 내가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겠나.
– 예?
– ……나를 데려가는 것은, 아니 납치해 가는 것은 트레이시 추기경 아닌가. 그 진짜 신분이야 어떻든 현재 신분은 말이야.
– ……그 말씀은?
– 자네는 성국이 ‘제국의 적’과 ‘협력’해서 나를 납치했다고만 하게. 그리고 막스 군단장의 일까지…… 모든 것을 성국에 덮어씌우게.
2황자와의 대화를 떠올린 제롬은 마음을 정리하며 스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건 모두 성국이 먼저 제국을 ‘공격’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됩니다. 즉, 성국이 제국의 적과 협력하고 있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럴듯한 말에 트리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러다 2황자가 헛소리라도 하게 되면?”
“무시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납치한 당사자들이 정신 마법의 종주이니…….”
“황자가 세뇌당했다고 공표한다?”
“2황자 전하가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기 전에 먼저 발표하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호오…….”
트리스의 안색이 또다시 굳어지고, 그를 지켜보는 제롬은 어두운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주군으로 모신 이를 대외적으로 미친놈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 괜찮네. 어차피 나는 황실로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내게 남은 길은 전쟁을, 혼란을 기다리는 것뿐이야. 그것도 황제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혼란을. 그것을 위해 놈들을 선택한 것이고.
– 그전에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황실로 돌아간다고 해 봤자 자살행위야. 들어서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지. 내 아버지, 아니 제국의 황제는 그런 사람이니까.
제롬은 지금쯤이면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을 주군이 무사하길 바라며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물론 이 모든 방책은 황자의 죽음이라는 완벽한 명분에 비해 한참 격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혹자는 제국이 억지를 쓴다고 할 것이요. 어떤 이들은 제국의 음모라고 소리칠 것이었다.
“성녀와 신검은 이미 폐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절대 우리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요구더라도요.”
“호오?”
“하지만 외부의 시선에선 합리적 의심을 억지를 써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일 테죠.”
“……그것이 명분을 키울 것이다?”
“예. 적어도 전쟁을 위한 명분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네 녀석의 머리로 할 만한 생각은 아니구나.”
스승의 그 말에 제롬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굳이 그렇게 대책을 짜내지 않아도 폐하께서 정말 절 죽이진 않으시지 않겠습니까? 전하와의 일을 밝히지 않을 바에야…….
– 누명이야 어려운 것이 아니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지키고자 한 명예까지 더럽혀질 수 있네. 그러니 내 말대로 하게.
– 어떻게든 황제가 원하는 모양새만 만들어 준다면, 자네의 가문과 자네의 실력으로 보았을 때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리하더라도…….
“그래. 뭐, 그 아이디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래도…….”
트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바로스가 예견했던, 그리고 처음 제롬이 했던 말이 그대로 다시 나왔다.
“……작위 박탈에 평기사로 종군하는 것 정도는 각오하거라.”
“물론입니다.”
무거운 얼굴의 제자를 보며 역시나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한 트리스는 이내 오러의 막을 거둬들이며 통보하듯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제롬 경은 내가 데리고 가겠소.”
다친 제국의 기사를 제국의 사자가 데리고 가겠다.
어찌 막을 명분이 있겠냐 싶었는데 하먼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 불쑥 그를 가로막았다.
“호오. 그렇다면 황자의 실종이 성구과 관련이 없다는 확답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에 트리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슬쩍 고개를 돌리니, 녹취를 위한 것인지 통신구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성기사가 보였다.
“허……. 지금 이렇게 한 번 보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리 생각하신다면, 죄송하지만 제롬 경은 여기 두고 가셔야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 말이 좀 통할 줄 알았는데.”
파지직.
웃음기 어린 얼굴 사이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두 사람이 자리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그에 주변에서 연신 헛숨을 삼키는데도 두 사람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 제국군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건의 유일한 증인을 데리고 나가시겠다는 건, 더한 억지를 쓰겠다는 걸로밖에 안 보입니다만.”
“제롬이 위치에 따라 증언을 달리할 사람으로 보이던가? 이거 신검의 안목도 별로군.”
“제롬 경은 믿습니다만, 제국은 믿지 못하지요.”
“오호, 그 말은 성국의 얼굴인 성전기사단장이 우리 제국을 적대하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저는 그저 기본적인 원칙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우우웅.
여유로운 말투 속에 가득한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대치에 따라 주변의 작은 물품들이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크윽! 거리를 넓혀!”
“떨어져, 다들!”
성기사들도, 트리스의 호위로 온 제국의 기사들도 일제히 당황하며 그 호위 대상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성국과 제국의 정점에 있는 초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각국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그들도 견디기 버거웠으니까.
다만 그런 만큼 그들의 안색은 돌처럼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기세의 대치가 두 초인의 심리 상태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 두 사람 다 진심이다.
그렇게 느낀 것도, 동시에 이어진 생각도 비슷했다.
– 왜 굳이?
양국을 대표하는 초인들이다. 둘 중 하나만 잘못되더라도 그것은 양국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올 게 분명했다.
신검이 잘못된다면 제국이 주장하는 모든 명분이 사라질 것이요, 검혼이 꺾인다면 제국은 성국을 토벌할 확고한 명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둘 다 무사하더라도 이런 대치 자체가 양국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질 만한 일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났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둘이서 이렇게 기 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라는 뜻이다.
두 초인 역시 상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대치가 시작된 후에는 이미 시야가 좁아진 뒤였다.
우우웅.
파지지지직.
붉고 흰 기세가 부딪치며 치열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두 초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뒤늦게 자신들의 실책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우웅.
그러나 이미 장내를 완벽하게 양분한 붉고 푸른 기운은 너무나도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허, 씁……!’
이미 누군가 한 사람이 양보한다면 부상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가슴속에 쌓인 호승심이 만들어 낸 우발적인 사건.
어떻게든 합의를 보고 물러서는 것이 맞겠지만.
– 당신이 먼저.
– 네가 먼저.
결코 먼저 물러설 수 없다는 서로의 의사만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그것이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왔다.
– 감히?
한쪽은 10년, 다른 한쪽은 20년이 넘게 적수를 찾지 못했던 극강의 초인들. 차라리 상대가 자신만 못하다고 확신했다면 어느 쪽이든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비등한 상황에서 내가 양보한다?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승부욕이 타올랐다.
‘그래. 제국은 어차피 물러나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검혼을 베어 버리는 게 오히려 이득이야.’
‘폐하의 뜻은 확고하다. 어찌 되었건 전쟁은 일어날 테니 그 전에 성국의 칼을 꺾어 버리면 좋은 일이지.’
주변에서 알았다면 기겁을 하고 말릴 생각들이었지만, 이미 호승심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두 사람은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켰다.
더하여 웃고 있는 서로의 표정을 보며 그 이유마저도 잊어 갔다.
그리고 그 결과, 두 초인은 동시에 매서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성기사들은 모두 관저에서 물러나라!”
“제국의 기사들은 자리를 피하라!”
꽈아아아아아앙!
그 고함에 양측 병력들의 얼굴이 굳어진 것과 귀청을 떨어 울리는 폭음과 함께 중앙 신전의 귀빈용 관저 일부분이 터져 나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 * *
그런 논쟁은 항상 있어 왔다.
– 세상에서 누가 제일 강할까?
기사와 마법사. 포스유저와 마나유저.
각기 그들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들이 존재하는 시대.
그 논쟁은 어느 나라 귀족들의 파티에서도 심심하면 나오는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이 시대, 최근 10년간 그 화제에서는 항상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 대륙제일검, 검혼(劍魂) 트리스 혼스비.
– 성국제일검, 신검(神劍) 하먼 킬러브루.
현 황제의 즉위 당시, 승복하지 못하고 봉기했던 다른 황자의 정예기사단 일백을 일검에 베어 버렸다는 검혼.
마경 남부 산맥 자락의 개척 마을을 지키기 위해 쏟아지는 몬스터 웨이브를 검 한 자루 들고 사흘 동안 막아 냈다는 신검.
두 사람의 무용담은 그 일부만 하더라도 믿기 어려운 설화 같은 측면이 있었다. 호사가들 대다수도 거품처럼 부풀려진 것이라 추측하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소, 노비엔스의 중심에서 그 무용담들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번쩍.
보이는 것이라곤 흰빛과 붉은빛뿐이었지만, 그 순간 빛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스각.
쏘아진 화살처럼 빛살이 뻗어 나간 자리에서는 온갖 성법으로 보호가 된 신전의 건물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칼 한 자루로 만들어 내는 이적들.
한 번의 휘두름에 뻗치는 빛살은 최소 수십 미터를 나아갔다. 흰빛이건 붉은빛이건 세로로 휘둘러지면 대지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겼고, 가로로 휘둘러지면 걸리는 모든 것을 분쇄하는 파멸의 흉기가 되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에는…….
꽈아아아아앙!
엄청난 소음과 함께 몰아치는 폭풍을 불러왔다.
사람의 상식을 깡그리 부숴 버리는 광경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럴 수가.”
“사, 사람이 어찌…….”
“괴물들…….”
평소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측근들 역시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참상을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저들과 같이 ‘초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제롬 디카이드도 있었다.
“어, 어떻게……!?”
그는 오히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러유저 중급에 도달한 그는 신검은 몰라도 세간에 최상급이라 평가되는 스승의 수준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이 순간 여지없이 사라졌다.
‘오러유저 최상급이라면, 공간도 가른다는 말은 들었어.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게 말이…….’
인간이 아니라 파괴신이 강림한 듯한 폭거였다.
세간에 알려진 무용담은 오히려 저평가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초인이 몇 명 더 있으면, 군대 따위는 의미가 없어질 것 같은 비현실적 광경이었다.
제롬이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는 때.
사방에서 번뜩이던 빛이 멎으며 하늘 높이 솟구치던 흙먼지의 폭풍 또한 잦아들기 시작했다.
– 결론이 났다.
노비엔스에 존재하는 모든 시선이 폐허가 된 중앙 신전의 구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