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0)
370화온몸에 힘이 쫙 빠졌을 때 오히려 뿌듯한 충족감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몸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데 영혼은 환희를 지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신검이라 불리는 하먼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검을 처음 잡았던 때.’
하루하루 발전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었던 그때. 솔직하게 신의 뜻보다는 스스로의 성장이 기뻤던 그때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에는 그럴 일이 없었다. 주위에는 더 이상 그와 대적할 자가 없었으며, 수련을 통해 정진하는 것도 그 끝에 다다른 지 수년이 넘은 뒤였다.
육체를 한계까지 쥐어짜고 그 벽을 넘어서는 경험이 끝난 게 아쉽지는 않았다.
영혼의 격이 올라가고, 그로 인한 힘의 증대가 곧 경지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초인. 의미 없는 육체 학대는 수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게 아니었어!’
부르르.
아직 짜릿하게 남아 있는 충돌의 여파가 너무도 기꺼웠다. 부상은 없었지만 서로 상대의 육체에 오러로 인한 여파를 남긴 것이다.
자신도 그도, 한동안 포스를 회복하는 데 애를 먹을 테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10여 년 만에 바닥까지 쥐어짜인 포스와 그에 따라 탈진한 육체는 영혼을 극도로 고양시켰다. 그동안 육체적 수련을 등한시했던 자신을 탓하듯 꽉 막혀 있던 벽 너머가, 그곳에 도달할 방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보이는 ‘적수’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떨리는 기파와 기세에서 그 비슷한 감정이 전해졌다.
그리고 싸운 장소가 노비엔스, 그 안쪽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큰 행운이었다.
‘내가 약간, 아주 약간 손해를 봤어.’
차이는 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나 실책만으로도 뒤집힐 수 있는 정도.
하지만 경지가 최상급에 이른 초인들의 공방에 실수가 있을 리는 없다. 즉, 이렇게 서로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서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면 결국 자신이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성도의 중심이었다. 고작 제국의 기사 여섯만을 대동한 검혼과는 달리 사방에 성기사가 넘쳐났다.
그것을 반영하듯 다가서는 기운 또한 대부분이 성기사의 것이었다.
“……아쉽군. 다음을 기약해야겠어.”
자신을 노려보는 제국제일검. 그도 벽 너머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대보다는 아쉬움이었다.
오러유저로서 육체가 늙어 가는 와중에도 경세적인 힘을 자랑하는 노장.
신성오러로 그 회복력과 지구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보다 더 끈끈한 오러를 만들어 내는 경이로운 괴물.
하지만 분명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지금 함께 경험한 벽 너머의 경지에 닿을 수 있는 시간이.
하먼은 검혼의 얼굴에서 보이는 아쉬움의 감정을 그렇게 해석했다.
“이 일은…….”
굳은 얼굴의 트리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먼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서로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잘못이 있으니 그냥 묻어 두시지요.”
한껏 힘을 떨쳐 내자 호승심에 타올랐던 마음도 차분해졌다.
‘미련한 짓이었어.’
얻은 것이 크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과일 뿐이다. 성국의 대표로서는 그저 성급한 칼부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검혼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다만, 겉으로 나오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롬은 내가 데려가도 되겠나?”
“……그러십시오.”
“흐.”
국가의 사절로서는 성급하고 무의미했던 일전에서, 하먼이 얻은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하먼 역시 체면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을 뿐, 제롬의 거취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 최강자들의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끝을 맺었다.
* * *
“……어떻게 보았느냐?”
말없이 성문을 나선 스승이 던진 갑작스러운 물음에 제롬은 당황해하면서도 바로 답했다. 안 그래도 머릿속으로 계속 복기를 하고 있던 터였으니까.
“엄청난 대결이었습니다. 장님이 눈을 뜬 느낌입니다.”
“……그래. 그럼 그 대결에 끼어들 자신이 있더냐?”
“……아직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 솔직한 대답에 스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또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서 제롬의 안색이 굳어지는데, 스승의 알 수 없는 한탄이 이어졌다.
“허. 10년, 10년만 빨리 만났어도…….”
“……스승님?”
제자의 반문에도 굳을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트리스는 제국 진영에 거의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기억하거라. 만약 성국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신검을 가장 먼저 죽여야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지만 거기에 무겁게 덧붙여진 말에는 제롬의 안색도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스승님?”
“말 그대로다. 전쟁이 벌어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검을 죽여야 한다. 만약 성국을 점령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제국은 몇 년 내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심복지환을 얻게 될 것이다.”
“…….”
“성자급 신성력을 가진 오러마스터라는 재앙을 말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았던 괴물을 언급하는 트리스의 모습은 심각하기만 했다.
* * *
– 제국 군단장의 죽음과 황자의 실종에 성국은 연관이 없다.
성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제국의 입장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 성국의 주요 인물인 트레이시 추기경과 제국의 적, 검은 뱀들이 공모하여 황자를 납치했다.
– 막스 일레이야 군단장의 죽음 역시 그들과 관련된 일. 제국은 검은 뱀들과 성국에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
“검은 뱀? 뭐야 그게?”
“제국의 적이라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카셀 마탑, 이른바 검은 뱀의 문양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진 것이다.
더하여 제국은 그들이 아세리안에 끔찍한 테러를 가한 배후이며,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기괴한 괴물을 사역하는 악의 무리라고도 공표했다.
– 황자를 납치한 것 또한 그를 조종하여 제국 황실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함. 안타깝지만 그는 이 시간부로 황실에서 제명될 것이다.
– 제국의 적과 협력하여 황실을 곤경에 빠트린 성국에 대해 해명을 요구한다.
물론 성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 트레이시 추기경은 세상을 속인 사기꾼. 검은 뱀의 마법사일 뿐 사제가 아니다.
– 애초에 그녀는 교황을 조종하여 성국을 제국에 바치려 한 이. 황자의 납치는 그들과 제국 사이의 거래가 틀어진 결과일 뿐이니 그 뒷거래에 관한 해명을 요구한다.
성국은 오스틴 교황의 즉위 초, 제국에 대한 우호적 움직임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하지만 제국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 군단장이 죽고, 황자가 실종됐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공표와 반박이 오가던 끝에 마침내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 성국이 인정했던 인간의 나라를 대표하는 이로서, 타락한 신전을 징벌하여 정화하겠다.
사실상의 전쟁 선포였다.
그에 따라 제국의 서부 군단들이 성도 노비엔스로 향하기 시작했고, 세간의 이목은 자연스레 성도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제가 야욕을 드러냈군요.”
“예상했던 바 아닙니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일리아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중년의 기사가 담담하게 답했다.
“저들은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 자신감 어린 태도가 근심을 조금 걷어내 주었는지, 중년 기사, 하먼을 돌아보는 일리아의 표정은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준비는요?”
“이미 각지의 성기사들이 변복을 하고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성군단에 대한 지원자들도 넘치고 있고요. 그날부터 준비한 것이 유효했습니다.”
그렇다.
2황자가 트레이시와 함께 사라지던 그날부터 그들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는 어차피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번에도 로건 폐하의 말을 따르길 잘했군요.”
“……신들께서 그분을 축복하시길.”
일리아의 말에 하먼이 둥근 성호를 그으며 합장하자, 그녀 역시 그를 따라 동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몸 안의 신성력이 미미하게 진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 순간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위대한 신들이 내려다보고 있음을 확신하는 지금, 독실한 신앙인인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교황 성하 드십니다.
“성하께서?”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문이 열리며 창백하고 야윈 얼굴의 노인이 들어왔다.
가뜩이나 노쇠하던 사람이 한층 수척해진 듯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쿨럭 기침을 토하는 노인의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기겁하며 다가갔다.
“성하!”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허허. 괜찮, 쿨럭쿨럭! ……괜찮습니다. 교단에 재앙을 초래한 죄인이 언제까지 편히 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는 교황, 오스틴의 표정에는 깊은 자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편히 쉬셔야지요. 다시 정신을 차리신 것만으로도 기적이십니다.”
일리아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감정 표현마저 통제당한 채 인형이나 다름없던 상황이 석 달 이상 이어졌다. 정신이 병든 자들을 주로 치료해 왔던 고행사제들은 정체 모를 마법이 사라지더라도 교황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다.
그런데도 자아를 지키고 다시금 기억을 회복한 교황의 정신력은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했다.
“그렇습니다, 성하. 지금은 쉬십시오. 건강한 모습으로 성국을 이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먼의 말에도 오스틴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애초에 나이만 많은 내가 아니라 성녀께서 교단을 책임지셨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인데…….”
“성하, 어찌 그런 말씀을…….”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너무나도 엄청난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오스틴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더니 오히려 그들 앞에서 마주 무릎을 꿇었다.
“성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 사람도, 교황을 수행하며 따라온 성기사들도 동시에 당황하는 가운데 오스틴이 처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땅히 이래야 합니다. 오히려 성국을 수렁에서 건져 올린 두 영웅께서 이 죄인에게 무릎을 꿇으셔선 안 되지요.”
이내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순백의 법관을 벗어 그들의 앞, 정확히는 일리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교황의 법관이자 9대 성물 중 하나인, 센텐티아(Sententia).
하지만 그 찬란하고 성스러운 빛을 마주한 일리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설마……!”
“나는, 45대 교황 오스틴 플루이트는 이 자리를 빌려 교황의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문다의 성녀, 일리아 가본에게 넘기겠습니다.”
“성하!”
파격적인 선언에 듣고 있던 모든 이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당사자만큼은 오히려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예식은 생략하나, 이는 교황인 오스틴 플루이트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센텐티아를 받으십시오, 일리아 자매님.”
“……어찌, 어찌 이런.”
“성하…….”
“이제는 그저 오스틴이라 불러 주십시오. 모든 것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래야 맞았습니다. 제가 이름을 남기고자 욕심을 부린 것이 재앙을 불렀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평생을 그 잘못을 참회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씁쓸하면서도 후련한 표정.
그 얼굴을 보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랬기에 일리아는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법관을 받아 들었다.
“제가, 제가 정말 할 수 있을까요?”
“부족한 저의 정신을 지탱해 준 성물입니다. 성녀님이 받아들이신다면, 신언을 한층 가깝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신들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교황의 본래 역할이지요. 그것을 알았을 때 넘겼어야 했는데…….”
후회와 자책이 버무려진 그 한탄을 끝으로 간략한 이양식이 끝났다.
다만 법관을 받아든 이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그저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물론 일리아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기묘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꺼림직하게 느껴지는 걸까.’
성물이 꺼림직하다.
성녀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성물, 성스러운 법관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이 일리아에게는 왜인지 매우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