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4)
374화
“온다!”
두두두두.
전면에서 까마득히 몰려오는 대군을 바라보며 스테판 로이어는 이를 악물었다.
새하얀 머리와 새하얀 눈썹, 오러유저답게 환갑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빛나는 외모, 거기에 평소 깔끔함을 강조하는 성정까지. 신의 깨끗함을 상징하는 듯한 그 모습에 성령의 기사라는 이명이 붙은 스테판 로이어.
생애의 절반 이상을 마물과 사투하며 살아온 인생이기에 그의 삶에서 위기는 부지기수였지만, 지금처럼 암담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대륙의 최대이자 최고의 기사단인 성전기사단의 부단장이었으니까.
“당황하지 말고 지시를 기다려라!”
스테판은 자신을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느끼며 애써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전면에서 달려오는 서부 2군단의 후방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질주하는 병력을 바라보며 서서히 속도와 기세를 높이고 있는 기사가 한 명 있었다.
다른 말보다 월등히 큰 흑마를 탄 채 거대한 도끼창을 둘러멘 거한.
제국 서부 2군단의 장군이자 이곳 북문에서 그가 막아 내야 할 초인, 마일즈 보이킨이었다.
‘별명이 단두대라고 했던가.’
멀리서 보기에도 2m는 넘을 듯한 체구의 거한이 커다란 도끼창을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니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놈은 아마 양군의 충돌을 기다리다가 약세를 보이는 곳으로 뛰어들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놈을 막아서야 하고.
머릿속으로 공방의 흐름을 그려 보는데, 문득 성벽을 올려다보는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투구가 머리를 감싸고 있었기에 이 거리에서는 눈빛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건만, 스테판은 놈이 투구 안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고 확신했다.
‘죄인의 머리를 잘라 내는 것이 취미라고 했던가. 사실이라면 미친놈이겠지만…….’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어울리는 장수일 것이다.
스테판이 한층 무거워진 눈으로 놈을 바라보는데, 멀리 동쪽 성문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 아홉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신의 적을 토벌하라!
자신의 유일한 상관인 성전기사단장, 신검의 목소리였다.
단순히 넓다는 수준이 아니라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모자라지 않은 노비엔스의 성벽 위. 그 거리를 생각하면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였지만, 마찬가지로 초인인 스테판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랬기에 그는 깃발 신호가 전해지기 전부터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적을 토벌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벽에서 화살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성군단의 병사들이 쏘아 낸 화살들은 곡선이 아닌 직선을 그리며 적군의 사이를 빛살처럼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아악!”
“진격! 진격하라!”
성도 노비엔스를 감싸는 성법 결계의 첫 번째 효능, 성벽 안에서 밖으로 쏘아진 투사체의 위력 극대화. 그 효과가 전장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일반 장궁에서 쏘아진 화살들이 제국 병사들의 갑옷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그중에서도 ‘맥’이라는 상단에서 얼마 전 급히 공수한 것이라며 보급해 온 300여 점의 연사 석궁은 더욱 엄청난 효력을 보였다.
“커억!”
“이, 이게 무슨!”
연사 석궁이 쏘아 낸 쿼렐의 일부가 달려오는 기사들의 갑옷까지 꿰뚫어 버리자 기사들 몇몇이 연이어 낙마했다.
‘허?’
전황을 지켜보던 스테판의 눈이 커질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그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두에 선 수천의 기사 대다수는 쏟아지는 화살 비를 뚫고 성벽 근처까지 다가왔다.
중갑을 입고도 거침없이 성벽을 박차며 위로 뛰어오르는 기사들.
그들을 보며 스테판은 병사들의 뒤쪽에 자리한 사제들을 향해 손짓했다.
“신의 방벽!”
“신의 방벽!”
동시에 복창한 좌우의 기사들이 정신없이 깃발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성벽 전체에 전달된 명령에 따라 사제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서는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성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얼핏 자살이라도 하려는 모양새로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같은 간격으로 늘어선 사제들의 몸에서 새하얀 빛살이 솟구치더니, 이내 성벽 위를 덮는 찬란한 반구형의 막이 만들어졌다. 본래대로라면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어야 할 신성력이 일반 사제들의 몸에서 구체화되어 방호막을 만든 것이다.
이것 역시 성법 결계의 효능 중 하나, 신성력의 극대화였다.
성벽에 올라서기 직전에 보이지 않은 투명한 벽에 부딪힌 제국의 기사들은 당황하며 그대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사제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성군단의 병사들이 제국의 기사들을 향해 흰빛이 감도는 창을 내질렀다.
“죽어라!”
“신벌이다!”
성군단의 병사 하나하나가 중급기사 수준의 강자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 또한 결계의 효능 중 하나로, 성수로 축성을 받은 장비에 부여되는 무장 강화 효과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반 창이 신병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빛나는 창의 모습과 신성한 빛의 보호막은 성군단 병사들의 사기를 극도로 끌어올려 그 효과 이상의 파괴력을 만들어 냈다.
푸우욱.
“아악!”
“컥!”
“이런!”
공중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몇몇 기사가 병사들이 쏘아 낸 창에 급소를 찔렸다.
비명을 지르면서 추락하는 기사들.
하지만 그 비중 역시 크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수의 강자들은 병사들의 분전과 신성 보호막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으라차차! 꺼져라!”
자신들의 군단장처럼 커다란 도끼창을 휘두르는 작달막한 기사.
하지만 제 키보다 큰 도끼창의 머리에는 멀리서 보기에도 선명한 붉은 기운이 맺혀 도끼날을 두 배 이상 커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최상급의 기사임을 증명하는 포스블레이드.
스테판은 그 모습만 보고도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작센 플로.’
서부 2군단의 만인장 중 하나인 그의 공격이 사제의 보호막을 뚫고 그 안의 사제와 병사 다섯을 동시에 갈라 버렸다.
“으아아악!”
“뚫렸다!”
젠장.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놈이 올라선 곳은 성벽의 끄트머리.
성벽 아래 초인, 마일즈의 움직임을 대비해야 하는 그는 성벽의 가운데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필두로 2군단의 나머지 만인장 넷도 연달아 보호막을 부수며 성벽 위로 올라서는 것이 보였다.
보란 듯이 성벽의 양 끝으로 나뉘어서.
“푸하하하!”
“전부 뒈져라!”
자신이 있는 성벽 중심부가 아닌 양 끝쪽에서 선명하게 일어나는 피의 물보라.
스테판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이것들 설마……!?’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성전기사단의 조장급들 다수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무기에서는 붉은 포스가 아른거리고 몸에서는 신성한 빛이 육체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었지만, 대충 보기에도 구체화된 포스블레이드와 맞부딪치기에는 무리일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아악!”
부딪치는 순간에 벌써 조장 한 명이 피를 뿌리며 무너졌다.
뿌득.
‘젠장, 젠장, 젠장!!!!’
신성력과 포스를 동시에 수련하기에 동급의 다른 기사들보다 강력하다 평가되는 성기사들이지만, 그렇기에 정작 높은 경지의 강자들이 적었다.
게다가 그나마 최상급기사를 상대할 만한 성전기사단의 교구급 책임 기사들은 적의 주력이 있는 동쪽 성벽에 대다수가 몰려 있다는 것 또한 치명적인 문제였다.
만인장 하나에 조장급 대여섯이 달라붙어도 결계의 효력에 기대 버티는 것이 고작인 상황.
‘저 잡것들이 감히!’
스테판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가 놈들을 토막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단두대(Guillotine), 마일즈 보이킨에게 박혀 있었다.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넓은 성벽 한쪽으로 움직인 틈을 타 놈이 다른 쪽으로 파고들면 아예 방어선이 무너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마일즈 놈은 성벽 아래에서 조금씩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이거 정말……?’
만인장들도 그렇고, 놈도 그렇고 애초에 이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스테판의 새하얀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어 봤자 바보짓일 뿐이야.’
수많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성벽 밑에서 멈춰 선 적장의 모습이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마치 나와 싸우고 싶으면 네가 내려와라, 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
“아아악!”
그 상황에서 또다시 귓가를 때리는 비명에 스테판은 결국 검을 뽑아 들었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한쪽으로 움직이면 2군단장은 분명히 반대쪽을 찌를 것이다.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이 북문이 교구 책임자급 성기사들이 거의 없는 상태로 그에게 맡겨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뒤를 생각할 때가 아니야.’
스테판은 이를 악물며 검을 치켜들었다.
“신이시여. 지금 이곳에 신의 힘을!”
그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주변에서부터 북쪽의 넓은 성벽을 모조리 아우르고도 남는 성스러운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 빛의 범위 내에 있는 아군들의 얼굴에 일순간 활기가 돌았다.
자잘한 상처가 즉시 아물고, 머리가 맑아지며, 피로가 사라졌다. 중상을 입었던 성기사들 역시 죽어 가던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띠며 다시 비틀비틀 일어섰다.
성령의 기사 스테판 로이어가 가진 특성, ‘빛의 축복’.
대군이 부딪치는 전장에서는 신검 이상의 영향력을 보일 수 있다고 평가되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으아아압!”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뒈져라!”
만인장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조장급들이 일순간이지만 적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광신도 새끼들이 전부 뒈질라고……!”
2군단의 만인장 중 하나인 철퇴의 기사, 마이어 한센이 벼락처럼 고함을 지르며 연신 성기사들을 몰아쳤지만.
“네놈이나 뒈져라.”
스테판은 차가운 음성과 함께 놈의 목젖을 꿰뚫었다.
“모두 물러서지 마라!”
단숨에 적의 만인장을 참살한 그는 호기롭게 외치며 놈의 목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 호응하듯 반대쪽 성벽에 붉은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거대한 기사가 등장했다.
“이 몸 등장!”
우스꽝스러운 한마디와 함께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온 거한의 기사가 도끼창을 휘두르자, 성벽 일각에 모여 있던 십수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동시에 비스듬히 양단되었다.
“아아악!”
“괴, 괴물이다!”
“크하하하하!”
저 X놈이!
그 모습을 본 스테판은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는 놈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도중에 마주한 제국의 기사들조차 모조리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돌진한 그를 맞이한 거한이 투구 아래로 광기 어린 미소를 내보였다.
“자! 기다렸다, 백기사!”
거한은 아군 수십의 시체 위에 서 있었다.
“이놈!”
꽈아아아아앙!
“흐!”
“흡!”
거대한 도끼창과 가볍고 날카로운 검의 정면충돌.
상식적으로는 검이 불리해야 정상이었지만, 초인들의 전투는 외견으로 보이는 상식을 따라가지 않았다.
“크으, 역시…….”
훨씬 많이 밀려 나간 것은 단두대, 마일즈 보이킨이었다.
하지만 정작 놈의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큭! 크하하하, 역시 강하군. 하지만 얼마나 더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
그 말에 스테판의 새하얀 눈썹이 살짝 떨렸다.
놈이 자신의 특성, 빛의 축복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인 성력과 체력의 극심한 소모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응하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 놈을 죽일 때까지는 끄떡없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시지!”
길로틴, 마일즈 보이킨은 그 호기로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때부터 철저히 수세를 고수했다.
육중하고 거대한 몸으로 갑옷에 오러까지 두르며 스테판의 공격을 튕겨 냈고, 기력을 집중한 큰 공격은 거대한 도끼창을 휘둘러 사전에 끊었다.
그러면서도 빈틈을 공략하려 들지 않았다.
철저하게 시간 끌기로 일관하는 전법.
‘미친놈이라더니…….’
소문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역시 제국의 군단장 자리는 허투루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일까.
하지만 스테판 또한 성기사로서 오기와 자부심이 있었다.
‘네 놈이 죽기 전까지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빛의 축복은 지금도 그의 성력과 포스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이곳은 결계 안이다. 성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으니, 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 스테판 경. 북쪽의 전력을 일부러 제일 약하게 배치했습니다. 오직 경을 믿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그래. 믿으시오, 단장.’
과거 모든 것이 부족했던 자신에게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단장직을 양보하려 했던 천재 후배.
지금 자신의 유일한 상관이 고개를 숙이던 광경을 떠올린 스테판은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그의 기세에 마일즈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투구 속 놈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들만 느낀 것이 아닌 듯했다.
“군단장님을 도와라!”
“백기사를 죽여!”
2군단의 만인장들이 상대하던 조장급 성기사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며 그들의 상관에게로 달려갔다.
“이놈들! 우리가 상대해 주마!”
성기사들 역시 그들을 막으려 두 초인의 전장에 끼어들려 했지만 마일즈는 그런 수하들을 제지했다.
“다른 놈들을 막아! 여기는 나 하나로 충분해!”
“이런 괴물 같은 늙은이가……!”
마일즈 보이킨의 상상을 뛰어넘는 굳건한 힘, 성국이 가진 또 하나의 검이 북쪽 성벽의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성벽의 상황은 북쪽과 달리 그리 좋지 않았다.
“마, 막아!”
“아아악!”
“적이 너무…… 많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