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5)
375화
“제, 젠장!”
“아악!”
“막아!”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성국의 병력이 연신 무너져 내렸다.
전체 병력의 규모도 한참 차이가 났지만, 기사의 수 차이는 거의 두 배에 달했기에 소수의 분전만으로는 전황을 바꿀 수가 없었다.
“막아! 뒤는 없다! 우리가 신의 뜻을 대행한다!”
하먼이 동쪽 성벽 위에서 연신 고함을 질러 댔지만 서서히 무너지는 전선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보다 너무 빨라.’
하먼은 이를 악물며 적의 본진을 바라보았다.
검혼이나 삭풍의 마도사는 아직 나서지도 않은 상황.
1군단의 에곤 밀러는 사전에 지시라도 받은 듯 자신을 철저히 피해 가며 동떨어진 곳에서 사제와 성기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더 이상 힘을 아낄 수는 없어.’
그가 그렇게 각오하는 순간.
– 신의 뜻이 이곳에 임하니……!
노비엔스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쩌렁쩌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성벽 위의 하늘로 향했다. 그곳에는 새하얀 법관을 쓴 채 허공에 떠오른 한 여인이 있었다.
“교황 성하!”
“성녀님!”
“신의 대행자시여!”
급박한 상황 속, 성군단의 병사들은 마치 구원을 바라듯 그를 향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것에 응답하듯 성녀, 일리아는 전신으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신의 전사들이여. 신의 적을 벌하라!
그 단호한 음성과 함께 쏟아지는 빛에 밀리던 성군단의 모습이 일순간 달라졌다.
“우와아아!”
“성녀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의 신이 함께하신다!”
괴성과 함께 비틀거리던 이가 자세를 바로잡았고, 팔이 잘려 쓰러져 있던 이가 아물어 가는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성군단 중에서도 평소 신앙심이 돈독하다고 소문이 난 이들은 하나같이 온몸에서 미약한 붉은빛까지 뿜어냈다.
“신께서, 신께서 내게 임하신다!”
붉게 물든 눈으로 광기 어린 외침을 토해 낸 그들은 일순간이라지만 기사들도 몰아치는 괴력을 선보였다.
“이, 이게 대체!?”
“미친……!”
승기를 잡아 가던 제국의 병력이 질린 안색으로 물러나고, 밀리던 성국의 병력은 고착을 넘어서서 되레 적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 누구보다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있었다.
“아아아아아!”
“그분께서 오신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제나 성기사들은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신으로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 사제가 괴력을 보이며 병사를 허공으로 집어 던졌고, 성기사들은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힘으로 제국의 기사들을 몰아붙였다.
눈가에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평소 나약했던 사제들은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순간에 반전되는 전세.
하지만 동문 밖, 전쟁을 주도하던 제국의 수뇌부들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성국이 급했군. 갈렌!!”
“시작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혼의 외침에 삭풍의 마도사가 응답하고, 그를 위시한 백여 명의 마법 병단이 미리 준비해 둔 커다란 마법진 위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을 허공으로 뿜어내는 삭풍의 마도사가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며 소리를 질렀다.
“성법 결계의 기본 패턴은 검은 뱀의 마법과 같다.”
성국에서 들었다면 신성 모독이라고 분노할 외침.
우우우웅.
“인간의 힘이 신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자!”
그 외침을 기점으로, 그들로부터 비롯된 푸른빛이 성도를 감싼 새하얀 빛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순백의 빛과 새파란 빛. 막강한 힘을 담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의 충돌은 광기 어린 전장의 이목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어, 어?”
“아아악!”
“으윽, 몸이…….”
“내, 내가 왜!?”
그 충돌이 시작된 시점부터 성군단의 광기 어린 행태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반전되던 전황이 다시금 돌아서기 시작했다.
촤아악.
“아아악!”
동쪽 성벽을 넘어서려던 제국 기사 셋이 단 한 번의 칼질에 무너졌다.
하지만 정작 그 칼날의 주인, 하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온몸에서 폭발할 듯 차오르던 성력이 점차 무뎌져 가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검혼을 의식하여 힘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활력이 차올랐지만 반대로 기분은 최저로 떨어졌다.
‘삭풍의 마도사, 어찌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일을…….’
저 마법에 동원된 마나의 규모는 하먼으로서도 추측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했다. 아마도 삭풍의 마도사를 비롯한 제국의 마법 병단에, 대량의 마정석이나 아티팩트가 더해져 만들어진 마법일 것이다.
처음엔 그런 거대한 에너지로 고작 결계의 효과를 중화하는 데 그친 것을 보면 손해가 아닐까 싶었지만, 막상 나타난 효과를 보니 무엇을 노린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저 신의 기적을 침범한 참담한 짓거리를 보십시오!”
옆에서 거품을 물고 고함을 지르는 부하 라인 하퍼. 평소 차분하고 이성적인 성격이 장점이었던 그가 눈이 벌게져서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성을 침범하다니!”
“신벌이 두렵지 않은가!”
“저 이단들을 처단하라!”
성벽 곳곳에서 성법 결계의 ‘강림’ 때보다 더욱 날뛰는 성기사들의 모습이 하먼의 눈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도 잊은 듯, 눈이 벌게진 채로 적을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 성기사들. 그중에는 소수지만 성벽을 뛰어넘어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놈들까지 있었다.
“신을 능멸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뇌가 없는 듯한 행동의 대가는 참혹했다.
“끄아악!”
사방에서 휘둘러진 검에 전신이 꿰뚫린 것이다.
몸 안에 신이 강림한 듯한 신성력의 폭증으로 법열을 느끼다가 그것이 사라졌으니,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저 정도로 미친 짓을 하다니?
심지어 그런 어이없는 발작은 단순히 일반 성기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단장님! 당장 성문을 열고 총공격을 명해 주십시오!! 저런 무도한 자들은 모조리 쓸어 버려야……!”
“정신 차려!!”
뻐어억.
하먼의 주먹에 턱을 가격당한 부관 라인이 왈칵 피를 토했다.
하지만 눈이 벌게진 라인은 또다시 헛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감히 신을 거부한 인간들에게 천벌을……!”
뻐억.
“현실을 보라고, 이 멍청아!!!”
“단장님! 신들께서 모욕을 당했습니다!!!”
투구가 일그러질 만큼 매서운 주먹에 연달아 얻어맞고도 라인은 더욱 거세게 대들 뿐이었다.
‘이리도 한심할 수가.’
하먼이 일순간 할 말을 잃는데, 다행히도 적들이 멍한 정신을 추스르게 만들어 주었다.
“죽어라!”
“제국의 적!”
촤아악!
“아아악!”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검으로 성벽을 넘던 제국의 기사들을 양단해 버린 하먼은 다시 부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성문을 열고 나가서 모조리 죽어 버리면 신들께서 만족하실 것 같으냐!”
“그, 그래도 이 분노를, 이 상실감을 어찌……, 어, 어!?”
하먼의 강렬한 기세 탓일까.
라인 하퍼는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왜 그런 말을……?”
그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분노에 휩쓸려 내뱉은 헛소리를 자각하고는 당황해했다.
하지만 하먼은 그가 자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정신 차렸으면 어서 병사들이나 지휘해! 진형이 무너진다!”
그 말대로, 광기 어린 성기사들과 눈이 돌아가 날뛰는 사제들로 인해 곳곳에서 수비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성기사들의 광기는 강림 때처럼 일순간의 무력 증가라는 이득이라도 있었지만.
“이놈들, 신이 두렵지……! 끄아악!”
“네놈들에게 신벌이……! 아악!”
성기사들과는 달리 성력을 제외하면 무력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는 사제들의 광기는 기세도 뭣도 없는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사, 사제님들!”
그리고 그 광경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성군단 병사들의 사기를 빠르게 떨어트렸다.
“반드시! 저 미친놈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
“예, 예!”
황급히 깃발을 휘두르기 시작한 부관을 보며 하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림의 후유증은 그 역시 문헌으로 접한 바가 있지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
한순간에 전부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지 않은가.
‘강림이 강제로 깨어진 탓에 부작용이 커진 것일까. 아니면…….’
하먼은 급박한 와중에도 조금 전의 경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퍼부은 포스의 힘에 의해 부관의 머릿속에서 도망치듯 물러나던 신성력의 여파.
그것은 마치 일전에 느꼈던 트레이시의 마력과 별 차이가 없…….
‘아니! 아니야!!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먼은 고개를 저어 소름 끼치는 상상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불길하고 찜찜한 예감이 가슴속에 진득하니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찜찜함을 떨쳐 내기 위해 하먼은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연신 칼을 휘둘렀다.
다른 성벽 쪽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본다고 보일 리도 없었지만 말이다.
‘다른 쪽은 부단장들을 믿어야 해.’
다행히도 소란은 금세 진정되어 갔다.
세 부단장이 하먼의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해 준 것 같았다.
그러나 성국의 진형이 겨우 회복되려던 그때.
그 순간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허공의 희고 푸른 빛은 완전히 고착화된 상태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성법 결계의 힘이 확연하게 효과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성력이 사라지고 있어!”
애써 다잡은 성군단의 사기가 실시간으로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안색이 굳어진 하먼이 흘깃 적의 본진을 바라보았다.
‘이걸 다 예상했을까? 빌어먹을!’
하먼이 다시 반전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때.
적진에서 터져 나온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 신검이여! 다시 한번 자웅을 겨뤄 보자!
저 멀리, 이 사태를 초래한 주범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혼. 그가 등장한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지만…….’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때와는 또 달라.’
굳은 각오가 맺힌 하먼에 눈에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단축하듯 다가오는 적수의 모습이 보였다.
무게가 없는 유령처럼, 성벽을 오르는 아군의 머리와 등을 밝고 쏜살같이 올라오는 트리스.
하지만 그가 성벽에 채 발을 딛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새하얀 은빛의 오러가 성을 쪼갤 듯한 위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흡!”
꽈아아아아앙!
우르르릉.
충격의 여파만으로 성벽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트리스의 몸이 성벽 밑으로 튕겨 나갔다.
“으억!”
“으아악!”
“자, 잡아!”
주변의 기사들 역시 일제히 나뒹굴게 만드는 강렬한 힘.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힘을 아끼던 신검이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쏟아 낸 일검은 그토록 엄청났다.
하지만 땅 위에 추락하듯 내려앉은 트리스는 얼굴이 다소 굳어있었을 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과연…….”
다만 부상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살짝 떨리는 애검의 끝을 바라보는 트리스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로 감을 잡았구나.’
불과 몇 달 전과 또 달라졌다.
그때는 자신이 미세하게나마 우세를 점했지만, 이제는 그조차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쟁 개시 이후 이미 몇 시간은 힘을 빼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여기서 없애야 한다.’
그들과 같은 경지에서 몇 달 사이에 이렇게나 발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
이 자리에서 신검을 죽여야 한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제국을 위하여!”
크게 고함을 지른 트리스가 다시금 허공으로 솟구쳤다.
쏜살같이 질주하는 온몸에서 붉은 오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오러는 이내 그의 몸을 중심으로 10여 미터를 퍼져 나가며 거대한 구체를 형성했다.
거의 성벽 높이만 한 붉은색의 구체가 성벽 위로 올라가 일각을 장악한 기괴한 광경.
하지만 그 구체의 범위 안에 들어선 성군단의 병사나 기사들은 하나같이 목이나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비명도 없이, 마치 ‘딱 죽을 만큼만’ 검에 베인 것처럼.
그러자 성벽에 내려앉은 그 붉은 죽음의 공간 사이로 새하얀 은빛이 파고들며, 제국의 기사들 역시 연달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동쪽 성벽의 한 축에 순식간에 그들만을 위한 공간이 생겨난 그 순간.
두 초인은 서로를 마주 보며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저번에는 못 본 수법 같습니다만.”
“자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트리스의 말대로 흡사 검이 아닌 흰색 벼락을 움켜쥔 듯한 하먼의 모습은 실로 범상치 않았다.
충동적으로 싸우면서도 한 수를 남겨 놓았던 몇 달 전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딱 보기에도 피차 기력 낭비가 심한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든 만큼.
‘이 대결이 그때처럼 둘 다 멀쩡히 끝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초인이 이내 맹렬히 부딪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