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6)
376화두 거인의 전투는 일반인은커녕 기사들의 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검혼이 만들어 낸 붉고 투명한 구체가 시야를 가려서만은 아니었다. 전장의 한구석을 초토화한 초인 중의 초인들 간의 격돌은 그들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도 홀린 듯이 그들을 지켜보던 몇몇 이들은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승부가 생각보다 빠르게 날 것이다.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붉은 구체.
그리고 그 안에서 번뜩이는 은빛 번개 역시 그 움직임이 급속도로 느려지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 꽈아아아앙!
결계로 보호받던 성벽의 일부가 깨어져 나가는 것을 신호로 붉은 구체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성벽이 아닌 그 아래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
쿨럭.
“흐, 흐흐. 이런 빌어먹을. 그새…….”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은 트리스와 그 앞에서 파리한 안색으로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검을 치켜든 하먼.
그 예상치 못한 결과에 주변에 가득한 제국군 전체가 얼어붙었다.
“여유를 둘 수 없는 점 이해하시오!”
사방을 둘러싼 제국군을 보며 하먼이 이를 악문 채 검을 움직이는데, 목을 노리는 은빛 검격에도 트리스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어.”
그 말에 응답하듯 또 다른 은빛 오러블레이드가 하먼의 옆을 갑작스레 파고들었다.
“어림없다!”
콰아아앙!
이를 악물며 여력을 짜내고 보니, 튕겨 나가는 외눈의 기사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
‘제롬 디카이드!’
또 다른 오러유저가 이리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몰랐던 이유는 검혼과의 격전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예상했던.
하지만…….
– 제국을 위하여!
마치 한 사람인 듯 동일한 목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네 명의 기사를 보는 순간 하먼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 4명의 전신에서 이글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기운은 분명히 오러였으니까.
무언가 꺼림직한,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기괴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오러였다.
‘하나가 아니라 다섯? 오러유저가 다섯이나 접근하는데 내가 몰랐다고?’
그 낌새를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검혼과 이렇게 끝장 승부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이, 신검. 자네는 여기서 죽어 줘야겠네.”
트리스의 비장한 목소리가 하먼의 귓가를 파고듦과 동시에 검붉은 기운과 새하얀 빛이 성벽 아래에서 눈부시게 부딪쳤다.
양국을 대표하는 두 초인의 격돌.
놀랍게도 쓰러진 것은 트리스였다.
하먼이 승기를 잡은 그 순간 성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장님이 제국제일검을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우와아아!”
물론, 눈앞에서 적군이 칼질을 하고 있는데 멀뚱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간 큰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그 간 크고 여유가 되는 이들 몇몇이 하먼의 승리를 알리는 순간, 다른 병사들은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얼떨결에 소리를 지른 이들은 이내 스스로가 뱉은 말의 내용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정말!?”
“으아아아!”
갖가지 악조건에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기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의 결투가 만들어 낸 결과가 전장의 판도를 실시간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결투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던 소수의 강자들은 이내 이어진 광경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검붉은 오러의 폭주 속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은빛.
“안 돼!”
“단장님!”
“단장님을 지켜라!!!”
부관 라인 하퍼를 비롯한 성전기사단의 강자들이 연달아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불길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모습이었다.
“아아악!”
“피, 피하십……, 끄륵.”
“다, 단장님.”
성기사들은 하먼의 앞을 가로막고 검붉은 오러의 파도에 온몸을 내던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다들 돌아가! 돌아가라고!”
하만의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사방을 감싸면서 전신을 죄어 오는 검붉은 오러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고, 연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돌진해 오는 성기사들의 행렬은 멈출 기미가 없는 듯했다.
“단장님, 피하십……!”
부관 라인 하퍼가 가슴을 관통한 검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이 하먼의 시야를 안타깝게 파고들었다.
녀석의 몸이 쪼개지기 직전에 아주 짧은 틈이 보였지만, 그 처절한 희생의 빈틈을 메운 것은 하먼 자신과는 조금 다른 은빛의 오러블레이드였다.
콰아아앙!
“큭!”
짧은 접전 동안 벌써 다섯 번째.
어찌 매번 저렇게 절묘하게 빈틈을 메꾸는지, 마치 그 순간에 그런 틈이 생길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서는 제롬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하들은 연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단장님!”
“단장님을!”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살하는 4명의 기사는 이상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보일 법한 흥분도, 처절한 희생에 대한 감흥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인형처럼…….’
끈적끈적한 느낌이 드는 기괴한 오러처럼 이상한 놈들이었지만, 전투력만큼은 분명 강력했다. 검술 또한 직전에 검을 나누었던 검혼의 느낌이 묻어나는 것이, 그자에게 제대로 배운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기괴한 느낌이…….’
하지만 놈들의 이상한 행태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그런 놈들을 믿은 것인지, 다른 제국군은 그들에 의해 궁지에 몰린 하먼을 무시한 채 성벽을 오르기에 바빴다. 반면 성벽의 병력을 지휘해야 할 성기사들은 자신을 구한답시고 뛰어내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검혼을 꺾어 올린 사기가 무색하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부하들 때문에 진형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험을 해야 할 때였다.
“흡!”
숨을 크게 들이쉰 하먼의 몸이 성벽이 아닌 적진 쪽을 향해 돌진했다.
그를 구하려 들던 성기사들이 오히려 당황하는데, 하먼을 포위하고 있던 4인방 중 하나는 지체 없이 그 앞을 막아 왔다.
의외의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
‘정말 기술을 새겨 넣은 인형 같군.’
어찌 오러유저가 인형일 수 있을까.
영혼이 한계를 넘어서서 육체를 완벽히 통제하게 된 뒤에나 얻을 수 있는 권능이 오러일진데.
하지만 지금은 그 막연한 느낌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하먼은 검붉은 오러가 일렁이는 적의 검이 제 가슴을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검을 들어 상대를 찔렀다.
심장을 노린 공격에 고작 살짝 몸을 비트는 것이 회피의 전부.
공격을 무시하고 칼을 찔러 넣는 데에만 집중한 것이다.
푸우욱.
자연히 오른쪽 가슴에 불덩이가 파고든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낸 하먼은 오히려 거기서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막연한 감이 맞아떨어졌다.
적은 같이 죽자는 듯한 수법에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이럴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 한 박자의 멈칫거림이 승부를 결정 지었다.
적의 가슴을 관통한 하먼의 검이 그대로 적의 허리를 호쾌하게 잘라 냈다.
쩌억!
깨끗하게 분리된 상체와 하체.
“!?”
끼릭.
만약 소리가 들렸다면 그런 느낌일까.
4인방 중 남은 셋과 그 뒤에서 보조하던 제롬마저 하먼의 예상치 못한 과감한 수에 허를 찔린 듯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아니, 꽤 놀랐는지 아예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됐어!’
하먼은 신성력으로 체내에 남은 적의 오러를 봉쇄하고 상처를 지혈했다.
미친 듯이 솟구치는 흥분에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그의 몸이 처음으로 생겨난 진짜 틈을 노리고 뒤쪽으로 튕기듯 쏘아졌다.
그 순간.
덥썩.
예상치 못한 손이 하먼의 발목을 잡아챘다.
“윽!?”
바로 상체만 남은 적군 오러유저의 손이었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하먼의 눈이 부릅 떠지는데, 투구 안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음성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만……세!”
그와 동시에 갑자기 뒤로 몸을 날리는 제롬의 모습, 그리고 반대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남은 3인방의 모습이 하먼의 시야에 느리게 들어왔다.
‘뭐?’
미친 듯이 불길한 예감이 영혼을 두드릴 때.
그의 발목을 잡은 적의 몸통이 그대로 폭발했다.
꽈아아아앙!
우르르르릉.
폭발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고 너무나도 강렬했다. 동쪽 성벽 밑에서 전투를 치르던 성기사와 제국군들 역시 그대로 쓸려 나갈 정도로.
그리고 그런 폭발은 연달아 ‘3번’을 더 이어졌다.
꽈아아아아아앙!
그그그그그극.
마지막 폭발과 함께 솟구친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지진이 난 듯 쩍쩍 갈라진 지면은 끊임없이 돌진하던 제국군 진영을 일순간 멈춰 세웠다.
동쪽 성벽에서 이루어지던 치열한 전투를 한순간에 멈춰 버린, 재앙과도 같은 폭발이었다.
“……엄청나군요.”
제롬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리 중얼거리자 허망한 얼굴로 솟구치는 흙먼지를 바라보던 트리스가 쓰게 웃었다.
“그래. 놈들 하나에 투자된 비용만 1억 골드가 넘는다더니, 그 값은 하는구나. 일회용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다.”
“1억…….”
너무 놀라면 오히려 목소리도 줄어드는 것일까.
“저런 것들이 황실에 얼마나 더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많지는 않겠지. 아무리 위력이 대단해도 오러가 발동된 뒤에는 급격히 생명이 다하는 소모품인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위력. 비용.
그 비인간적인 단어에 제롬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생명을 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느냐?”
“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라.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서.”
“그래.”
제자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트리스는 이내 흙먼지를 보며 마치 사람을 대하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정신 마법 면역에 내 기본 검술까지 완벽하게 새긴 병기들이었네. 대마도사, 진실을 삼킨 뱀을 잡기 위한 병기였어. 신검, 자네는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던 거야.”
그가 검술로서 이기지 못하고 다른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던 인물.
트리스는 남은 생 동안 결코 신검을 잊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추도했다.
그런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흙먼지 사이로 하늘 위로 솟구치는, 신경에 거슬리는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음?”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빛.
그리고 지금 자신은 성국의 적이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안색이 굳어진 트리스는 주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돌격해! 전쟁을 재개한다!”
“가, 각하. 하지만 지면이…….”
“기마대는 우회하고, 마법사들은 지면을 메꿔! 바로 성도를 점령한다!”
트리스는 여력을 짜내서 전장이 울리도록 커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제국군이 그 명령을 따라 다시 체제를 갖추는데, 거의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로 솟구치는 빛 속에서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법관을 머리에 쓰고 온몸을 가리는 새하얀 법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폭발의 진원지, 깊게 파인 구덩이 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 그대는 아직 쉴 때가 아니다.
기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함께 지면 위에서 솟구친 빛살.
그 사이로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를 한 남자가 성벽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신검!!!’
트리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안돼! 전군 돌격! 반드시 신검을 죽여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하지만 제국군의 기사들과 기마대가 우회하는 사이 여인은 신검의 몸과 함께 성벽 위로 사라져 버렸다.
‘성녀? 성녀에게 저런 힘이 있었다고? 빌어먹을! 왜 정보가……!? 아니, 아니야. 아직은 우리의 확고한 우세다.’
입술을 질끈 깨문 트리스는 연신 부하들을 재촉했다.
“신검은 싸우지 못한다! 적군의 수장이 쓰러졌다고! 어서 돌진해!”
그의 명령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메시지 마법이 그를 막았다.
[각하. 마법진에 생각보다 빠르게 한계가 왔습니다. 성법 결계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뒤에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성난 황소처럼 돌진하려던 제국군은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