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7)
377화
“완벽한 계산이었습니다. 보셨던 대로 초기에는 결계를 완벽하게 무력화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쾅!
좀처럼 보기 드문 검혼의 흥분한 모습.
박살이 나 흩어진 탁자를 흘깃 본 삭풍의 마도사, 갈렌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기는 확실합니다. 그 여자, 성녀가 다시 등장한 직후부터입니다.”
“그게 다 성녀의 힘이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삭풍의 마도사가 굽실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희귀한 광경이었지만,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완벽히 승기를 잡아 가던 전쟁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춰 버린 상태였으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그 광신도들의 발광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피해를 쌓을 대로 쌓은 다음에나 성국을 점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악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녀가 다시 그런 이적을 발휘하기는 아마 힘들 것입니다.”
“근거는?”
“성국 내 첩자가 교황의 법관, 센텐티아가 빛을 잃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물의 힘을 일시적으로 소모해서 만든 기적이 확실합니다.”
“9대신의 성물? 설마 그럼 다른 8개가 성국에 남아 있단 건가?”
“아닙니다. 그중 3개는 지상 최강의 성법 결계라는 저 대천 결계의 유지에 쓰이고 있고, 나머지 다섯 개는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교단에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당장 전쟁을 재개해야지!”
“……피해를 줄이자면, 중화 마법진을 위한 자원의 보급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에 신검이 깨어나면!?”
“진정하시지요, 각하. 아무리 결계 안이라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각하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갈렌의 말에 트리스가 겨우 흥분을 억눌렀다.
그렇다. 타인의 오러가 남긴 잔재는 오러유저에게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큰 후유증을 남긴다. 특히 격전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후유증이 더 심하기 마련이다.
‘나만 해도 오러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포스를 회복하려면 대략 열흘은 걸리겠지.’
하물며 사망 직전까지 갔을 신검이라면 신성력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이른 시일 내에 전장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할 것이리라.
하지만 트리스는 마지막에 보았던 성녀의 이질적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게’ 정말 인간이던가?”
“예?”
“아, 아니야. 그냥 느낌일 뿐이다.”
그것, 아니 성녀는 왠지 인간 같지 않았지만 신검은 분명 인간이다. 아무리 성법이 대단해도 1, 2주 이내에 회복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아직 승세는 확고하니 다시금 때를 기다리지.”
“예. 사실 아시겠지만 이대로 포위한 채 기다리기만 해도 성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국이 쌓은 부가 있는 만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요.”
“아니, 그건…….”
“아,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신검을 비롯하여 성녀와 성국의 주요 인사들이 빠져나가거나 변수가 생길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요. 하지만 열흘, 열흘이면 충분합니다. 마법진의 가동이 다시 준비되기만 하면 바로 성국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열흘이라…….”
마침 자신이 최소한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한 기간이다.
더하여 신검은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좋다. 열흘 후, 그때 비로소 성국과의 전쟁을 끝낸다.”
트리스는 성녀로 인해 생긴 찜찜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크나큰 파란을 몰고 올 변수 하나가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은밀히 노비엔스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 *
“여러분이 로건 폐……하께서 보내신 분들이군요. 반갑습니다.”
창백한 안색의 일리아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숙이자 갈색 머리, 갈색 눈을 한 미형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교황 성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맥라인의 아란이라고 합니다.”
중성적인 톤에 유려한 음성. 하지만 초인이라기엔 너무 젊은 나이 때문일까.
눈을 가늘게 뜬 일리아가 잠시 어지러운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아란을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비님. 설마 왕비님이 오실 줄은, 그것도 오러유저이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억!?”
아란, 아니 에일렌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일리아는 미소 띤 얼굴로 비슷하게 갈색 눈, 갈색 머리인 다른 일행들에게 찬찬히 시선을 옮겼다.
“빅토르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전에는 너무 폐를 끼쳤었지요. 리아 양도 오랜만이에요. 빈민가 봉사활동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그런데 벌써 마도사라니, 놀랍군요.”
“!?”
“헉!?”
“그 붉은 눈은 로니안 백작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빅토르 경과 폐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 분은 정말 처음 뵙는 분이군요. 역시나 오러유저……. 역시 맥라인은 인재가 많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는 족족 일행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어, 어떻게…….”
“그러니까 내가 좀 무리하더라도 다 갈색으로 하지 말고 다른 색으로 하자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로니.”
한마디로 로니안의 입을 닥치게 한 에일렌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그녀가 자신들을 알아본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눈에 정체가 발각됐다는 건 일이 근본적으로 틀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 고위 성직자분들이 마법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으셨던가요? 그러면 저희가 활동하기 곤란해집니다만.”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알려지지 않은 초인으로 성국을 돕기 위해서다. 어디에 제국의 첩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신분이 고스란히 까발려지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국과 맥라인의 전쟁이 갑작스레 앞당겨질 테니까.
“아, 제가 반가운 마음에 실례를 했군요. 제가 특이한 경우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예?”
“변신 아티팩트에 리아 양의 마법으로 유지 및 보완까지 하고 계시네요. 마나 은폐도 잘되어 있고, 이건 아티팩트나 리아 양 둘 다 잘못되지 않는 좋은 방법……. 아, 이것도 실례……였나요?”
이어지는 일리아의 말에 일행, 특히 빅토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건 또 어떻게…….”
“그게, 그, 제가 최근에 교황이 된 후에 신께서 내려 주신 은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미안해요, 리아 양. 다행히 그런 사람은 저뿐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일리아의 변명에도 일행의 곤란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이 방에 성녀 혼자 있어서 다행이지.’
에일렌은 쪽잠만 자며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도착부터 일이 꼬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저희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신분이 탄로 나면 저희는 그 즉시 성도를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 왕비님. 명심하겠습니다.”
“그 호칭도…….”
“아, 예. 자꾸 실수를 하는군요. 잊지 않겠습니다, 아란 님.”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그런데 성녀가 리아 양의 마법도 꿰뚫어 볼 수 있었나? 성자가 되면 그런 것도 가능한 거야?’
에일렌이 찜찜함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빅토리아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굉장히 기감이 좋은 오러유저나 마도사가 가까이서 살피지 않는 이상 절대 들키지 않을 거예요.
그리 호언장담했던 마법이 도착하자마자 간파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일행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일리아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다가 반가운 얼굴들을 뵙게 되어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성급한 마음에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요점이 그게 아닌데.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적어도 곧바로 사과하는 그 진정성 있는 모습이 그나마 일행의 혼란을 잠재웠다.
무엇보다 그녀는 교단의 성녀라고 일컬어지기 이전에 그랑에서 빈민가의 성녀로 유명했던 진짜 사제. 일행 중 그 이름의 가치를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성녀가 일부러 우리에게 잘못된 일을 할 리는 없지.’
에일렌은 짧은 한숨을 끝으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워 버리고는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성녀님. 아무쪼록 저희가 온 것이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와 주신 것만으로도 아주 마음이 든든한걸요.”
일리아의 창백했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일행 역시 좀 전의 당황을 잇고 자연스레 따라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풀리는 것 같자 일리아는 새삼 감탄하듯 일행을, 아니 그들의 왕국을 칭찬했다.
“그런데 정말 맥라인은 대단하군요.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를 다섯이나 숨기고 있겠습니다. 저는 로건 폐하께서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만한 일이었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오히려 보란 듯이 자랑하면서 국력을 과시하거나, 최소 전쟁 억지력의 증대를 꾀할 테니까. 그 상대가 제국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혹시 맥라인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계셨던 건가요?”
에일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국에 다녀오신 부군이 그리 예상하셨지요. 황제는 욕심이 가득한 인물이라고, 절대 평화 정책을 끝까지 유지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말 한마디로 이렇게까지 준비를 하신 겁니까? 여러분이 초인으로서 영예도 마다하고 이런 고된 길을 자처할 만큼?”
“여기 있는 모두가 부군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니까요.”
에일렌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로 이 중 로건과의 끈이 가장 약한 부르델만 하더라도 마냥 마수 사냥꾼으로 살았다면 초인이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로건 폐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멋지게 성장했다는 거군요. 로건 폐하도 사람 보는 눈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우연일 뿐입니다. 초인이 되는 게 원한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저 부군께서 인복이 많으신 거죠.”
“그렇군요. 로건 폐하의 곁에는 초인이 될 인재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된다라……. 역시…….”
일리아의 말에서 묘한 뼈가 느껴진다고 하면 착각일까.
점점 대화가 이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에일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
서로 간의 인간관계에 따른 호의를 걷어 내고 따져 보면, 마치 전시에 도우러 온 아군을 취조하는 분위기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그녀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성녀님, 혹시 저희에게 따로 묻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뒤에 있던 로니안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일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요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져서……, 으으윽.”
“성녀님!?”
말을 하다 말고 일리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황당한 상황에 모두가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데, 마주한 내내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빅토르만이 바로 튀어나갔다.
“으, 으윽. 버, 법관이 힘을 잃었는데도……. 왜…….”
“성녀님!”
창백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일리아를 빅토르가 부축해 간신히 일으켰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제, 제가 로건 폐하에 관해서 물으면, 구, 굳이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대답하지 마세요!!”
연신 비틀거리는 일리아의 입에서 더듬거리며 나온 말의 끝은 비명 같은 고함으로 이어졌다.
처음 만날 때보다 훨씬 더 창백해진 표정의 성녀.
그리고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 끝에 터져 나온 고함.
놀란 표정의 일행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순간.
쾅!
“무슨 일이십니까, 성하!”
“당신들! 성하께 무슨 짓을!”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성기사들이 뛰쳐 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말린 것 또한 일리아였다.
“아니, 아니에요. 제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이분들을 하먼 단장님께 소개시켜 주세요. 지금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분들입니다.”
다시금 조용해진 음성. 하지만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예, 성하!”
“예.”
당황하던 성기사들은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하지만 일행은 여전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성녀님, 대체…….”
그런 그들을 보며 일리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빅토르 경. 경만 잠시 남아 주실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예?”
당황한 빅토르가 자기도 모르게 에일렌을 쳐다보는데, 일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말, 정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혹시나 제가 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될 때…….”
“성녀님 대체 무슨 말씀을…….”
곤혹스러운 표정의 빅토르, 그리고 창백한 안색의 성녀.
두 사람의 친분을 아는 에일렌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독대를 위한 시간을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