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78)
378화에일렌 일행의 예상에 어긋난 것은 성녀만이 아니었다.
“아란, 애런……에 밀러. 이쪽은 로프랑 아밀?”
가명이라고 티 내는 거냐.
그런 뜻을 담은 눈빛이 일행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은 신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끄으응.”
“단장님. 무리하지 않으셔도…….”
“아니, 아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초췌한 모습의 신검이 앓는 소리와 함께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초라한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하먼 킬러브루입니다.”
“아닙니다. 신검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장 앞에서 응대하는 에일렌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뒤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는 일행들의 표정엔 상기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에 침투하기 직전에 들은 소문 때문이었다.
신검이 검혼을 꺾었다.
진정한 대륙제일검은 신검이다.
비록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조차도 세계 최강자의 훈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 봤자 지금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일개 필부일 뿐입니다.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국의 폭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래도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여러분뿐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신검은 비틀거리면서도 침대에서 내려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듣고 있는 성기사들을 의식했는지 굳이 국가명을 언급하지 않는 것까지, 신검의 태도엔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것뿐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그에 일행이 마주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레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너희들은 이만 나가 봐라. 전쟁을 위해 이분들과 할 말이 있으니.”
중상을 당한 상관을 두고 나가기는 어려운지 주춤주춤하는 성기사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눈앞의 단장을 얼마나 위하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듭된 재촉에야 간신히 문을 닫고 나서는 성기사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신검은 다시금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기 저분은 아무래도 저와 구면 같습니다만?”
빅토르를 가리키는 신검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그에 따라 졸지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빅토르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리아가 사실 천재가 아니라 헛똑똑이였나.’
성국에 오자마자 만난 주요 인물 둘이 단번에 자신들의 정체를 간파해 버렸다. 가뜩이나 이전에 성녀에게 들은 이상한 말 때문에 머리가 잔뜩 복잡해진 빅토르는 본의 아니게 동생을 째려보고 말았다.
그리고 동생은 눈빛만으로도 오빠의 뜻을 읽었다.
“아니거든!? 성녀님이랑 이 사람, 아, 아니 이분이 이상한 거거든!?”
빅토리아가 발끈하는데, 하먼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꿰뚫어 본 게 아닙니다. 포스의 느낌과 기세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나저나, 역시 그때도 맥라인이 끼어들었던 거군요. 여러모로 크게 도움을 받습니다, 이거. 허허.”
포스의 느낌과 기세를 기억해?
그게 가능한 거였던가?
에일렌은 그저 다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신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니, 정말 저희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을지 무척 걱정되는군요.”
소왕국 연합에서는 아티팩트만으로도 완벽한 위장이 가능했는데, 이곳에서는 마도사인 빅토리아의 은폐 마법까지 더해졌는데도 정체가 발각되고 있었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행의 걱정을 신검이 일축했다.
“그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국군 중에서는 검혼 그 양반이나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변장을 알아본다 한들 누군지 알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혹시 개인적으로 그 사람과 면식이 있는 분은 없겠지요?”
그 말에 일행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맥라인에서 검혼을 만나 본 이는 로건이 유일했으니까.
그 모습을 본 하먼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시 한번 이리 성국에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만 여러분이 가세해 준다 해도 저희가 불리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에일렌을 비롯한 일행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 * * 제국의 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은 에일렌 일행이 도착한 지 이틀 뒤였다.
그사이 성국은 제국이 무엇을 노리고 시간을 끌고 있는지 대략 추측하고 있었다.
신들이 직접 내렸다고 알려진 최강의 성법 결계, 대천 결계를 봉쇄하는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마법진은 성도 공략에 필수적인 요소였으니까.
“애초에 그것을 노리고 무리한 것도 있었으니까요.”
신검은 중상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그를 구하고 결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무리한 성녀 또한 바닥난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성국의 가장 큰 전력 둘이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이었지만, 성국 수장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충분한 대체재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중의 한 명, 밀러라는 가명을 쓰는 빅토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일리아의 말을 받았다.
“신검 단장은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성녀님을 모시고 빠져나가 달라고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신실한 분이시지요. 하지만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저보다야 하먼 단장님이 살아남는 것이 성국의 미래를 위해선 더 좋을 텐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평온하기만 한 성녀의 표정을 보며 빅토르는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성국의 검과 성국의 정신적 지주.
둘 중 하나만이 살아남아 성국을 재건해야 한다면 정신적 지주가 살아남는 것이 옳다.
빅토르는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번과 같은 생각은 접어 두시고, 스스로를 챙기십시오. 물론 저희가 있는 이상 그리 쉽게 무너지게 두진 않을 겁니다만.”
“저번처럼……이요?”
“예. 저번에 제게 말씀하신…….”
빅토르는 말을 하다 말고 성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예쁜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띄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
며칠 전 보았던 초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 얼굴이 어쩐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자꾸 폐를 끼친다고 미안하다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아…… 그랬지요. 빅토르 경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성녀.
그 모습을 보는 빅토르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기억을 못 해?!’
잊을 만한 말이 아닐 텐데?
전신에 소름이 돋는 순간, 그 어색한 표정을 느꼈는지 일리아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빅토르가 뭐라 변명을 할까 황급히 머리를 굴리는데, 일순간 근처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있었다.
스각.
쩌어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복면인이 가슴이 갈라진 채 피 분수를 뿜어냈다.
“성녀님, 뒤로 물러나세요!”
“윽! 예, 예!”
달갑지는 않지만, 다시 개전이 시작되는 순간 제국이 힘을 잃은 성녀와 신검을 노릴 것이라는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우우웅.
회색의 오러블레이드가 번개처럼 허공을 누볐다.
자신의 스승이자 주군인 로건 맥라인 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그도 귀신들의 기척을 약간이나마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성과.
지금은 오히려 놈들의 습격이 반가울 정도였다. 덕분에 애써 변명을 생각해 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빅토르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뒤편에 숨은 성녀에 대한 걱정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을 때.
외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양군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나 제국이 예상하던 것과는 꽤 달랐다.
쌔애애애애액.
타아아아앙!
제국 진형의 후방에서 대마법진을 유지하던 결계에 강렬한 파장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보호막이 튕겨 낸 것이다.
그 공격에 실린 힘이 범상한 수준이 아니라, 마력의 흐름을 유도하던 갈렌의 시선이 자연히 결계 쪽으로 돌아갔다.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힘이라면 일반적인 포스블레이드일 리가 없었다.
‘오러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 대마법진은 제국 진형 내에서도 가장 뒤쪽에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보호막에 오러가 실린 공격이라니?
심지어 그 공격을 한 당사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호위단 역시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들을 지휘하는 5군단장, 아르헨 투사트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한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갈렌의 생각에 이게 가능한 상황은 하나뿐이었다.
‘성국에 귀신들의 수장급 수준의 암살자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아차렸다.
타아아아앙!
다시금 결계를 때리는 강렬한 힘. 그것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 결과물이 다소 어이없을 뿐이었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쏜살같이 날아와서 방어막을 때린 물체. 그것은 전장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었다.
“화살?!”
화살에 오러를 실어 날릴 수 있는 초인이 있다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에 갈렌의 얼굴이 멍해지는데, 그 두 발을 끝으로 더 이상 오러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역시, 준비를 다 해 놨군요. 마법진은 안 되겠습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갈색 눈,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며 신검은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을 지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억지로 성벽 위에 나와 있을 뿐, 아직 그의 포스는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안목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먼은 자신을 아밀이라 소개한 이 맥라인의 초인이 가진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3km는 될 거리를 타격하는 오러화살이라니.’
저 거짓된 모습이 아닌 본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아밀, 아니 부르델은 돌진해 오는 제국군들에게 재앙을 선물해 주었다.
“기사들 전원 하마 준비! 그대로 성벽 위로……!”
쾅!
군의 선두에서 제국군을 이끌던 렉톤 아네스가 무언가 공격이 날아온 것을 느끼고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윽!”
묵직하게 전해진 강력한 충격은 그와 말이 동시에 비틀거릴 정도였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날아온 그 무언가를 검으로 쳐 내는 순간 썰물처럼 사라지는 포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격하의 상대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파괴의 권능. 그가 40년간 꾸준히 노력해도 손에 넣지 못한 그 힘.
“오러!?”
그리고 그 비명 같은 고함에 응답하듯, 벼락같은 붉은빛이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푸우우욱.
“렉톤 님!”
서부 1군단 만인장, 렉톤 아네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고작 두 발의 화살이었다.
“화살!?”
트리스가 이변을 감지한 것은 렉톤에 이어 두 번째 만인장이 허무하게 쓰러진 직후였다.
오러가 담긴 화살이라니.
천하의 검혼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기함을 토했지만, 대처는 빨랐다.
“붉은 화살! 막지 말고 피해!”
놀라운 재주였지만 한계는 뚜렷했다.
아무리 오러가 담긴 화살이라도 장거리에서 날아오는 무기. 미리 준비만 하고 있는다면 최상급기사가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미친 듯이 휘둘러지는 깃발들을 넘어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대처법은 금세 선두의 만인장들에게도 도달했다.
그사이에 다른 만인장 하나와 천인장 몇이 또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 후 제국군의 대처는 빨랐다.
피이잉!
“어림없다!”
파바박!
“합!”
다음 공격이 두 발 연속 빗나가는 순간, 붉은 화살은 만인장이나 천인장급이 아니라 그 아래급의 수위기사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눈앞으로 쏘아지듯 날아오는 붉은 벼락을 피할 재주가 없었다.
“아아아악!”
“꺼, 꺼억!”
“기사님!”
성벽을 향해 질주해 가는 길지 않은 시간.
만인장 셋을 포함한 제국 군단의 지휘부와 정예 병사들을 지휘하는 핵심 인력인 수위기사들 십수 명이 죽어 넘어졌다.
그리고 그 참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재앙에 트리스의 핏발 선 눈이 성벽 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