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
38화로건은 에스페란자 공작가의 치유사가 준 최상급 포션을 사용하지 않고 품속에 넣었다.
‘역시 공작가. 이런 포션을 외부인에게 그냥…….’
시가 50만 골드. 그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않아 구하기도 힘든 포션이었다.
그것을 굳이 지금 자신의 부상에 쓰고 싶지 않았다.
‘안 마셔도 치료가 되니까.’
그가 가진 힘, 진화한 포스는 심각한 내상을 입은 몸을 불과 몇 시간 만에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시켜 놓았다.
치유사 역시 로건이 포션을 먹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완전히 나으려면 며칠의 시간은 더 필요했다.
“살펴 가십시오.”
로건은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공작가 기사의 과분한 배웅을 받으며 검공가를 나올 때까지는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 돌아선 즉시 얼굴이 찡그려졌다.
“끄응…….”
걷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나고 짜릿한 통증이 뇌리를 울렸다.
그만큼 심각한 부상이었고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도 얻은 게 훨씬 크지.”
단순히 최상급 포션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건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씨익 웃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가슴을 더듬자 곱게 접힌 종이가 만져졌다.
그것이 최상급 포션보다 더욱 가치 있는 보물이었다.
– 내 사저의 통신구 좌표다. 중압검을 익히다 막히거든 연락해도 좋다.
‘설마 이 정도로 좋게 봐 줄 줄이야…….’
사실상 제자 취급이었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검공의 기술, 그리고 그와의 인연.
이것은 향후 험난한 미래를 헤쳐 나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통증도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주변의 정경도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멋지긴 해.’
천년 고도, 그랑의 중심부에 있는 대저택들은 지어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건축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라면 겉모습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없는 로건이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저택들이었고, 길가를 지나다니는 화려한 마차들은 그 풍경에 우아함을 더했다.
‘그러니 무너지지 않게 지켜야지.’
다시금 새삼스러운 다짐을 하며 번화가로 들어서는데, 지나가던 마차 하나가 그의 옆에 갑자기 멈춰 섰다.
“어머. 로건 공자님 아니세요. 오랜만이네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은빛 늑대가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보였다.
그 문양도 익히 아는 것이었거니와, 마차의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은발의 미녀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좋은 쪽은 아니었지만.
“……리이나?”
“어머. 우리가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했던가요.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래. 안 친했다. 그런데 왜 불러 세우고 난리란 말인가.
“……울브스 공녀님. 오랜만이군요.”
전혀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을 텐데도, 사두마차 안의 미녀는 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공자님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혹시 제가 불편한 건 아니죠?”
맞다. 불편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계속 인상을 찡그리고 계시는 것 같은데…….”
‘아파서 그런다. 이 년아.’
현생에서의 관계도 별로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생의 원한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로 리이나, 정확히는 울브스 가문과 무작정 적대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고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공녀님. 그럼 살펴 가시길.”
너랑 얘기하기 싫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가던 길 가라.
로건은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몸을 돌렸다.
“아, 듣기로 요즘에 수도에서 장사를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가문에 문제라도 생기셨나요?”
살짝 굳었지만 여전히 청아한 리이나의 목소리가 멀어지려던 그를 붙잡았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제가 드린 돈도 적지 않았을 텐데, 부끄러운 장사를 하신다고 들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로건에게는 전혀 다르게 읽혔다.
‘하여간 짜증 나는 여자.’
“후우.”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시비나 붙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냥 아시다시피 제가 돈 욕심이 좀 많아서 말입니다.”
“아, 그러셨죠. 하긴 척박한 영지에서 살려면…….”
“그렇지요. 그럼 이만.”
순간적으로 울컥했으나 로건은 그냥 고개를 흔들고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다각다각.
보기 싫은 마차가 여전히 따라왔다.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저는 없는데.”
노골적인 무시에 리이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최근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영지전에서 활약을 하셨다던데.”
그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수도에서 임포릭을 팔며 유명해졌어도 영지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수도의 귀족들은 변방의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말이지…….’
악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만큼, 그리 이상할 건 아니다.
다만 더 이상의 관심은 사절이었다.
“제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파혼한 사이에서 공녀님의 과분한 관심은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 대답에 리이나의 안색이 살짝 굳는가 싶더니, 매서운 반격이 돌아왔다.
“공자님보다 공자님이 사용한 무기에 더 관심이 있어서요. 혹시 판매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그 부탁은 거절하겠습니다.”
“흐음.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장사 잘하시길 빌게요.”
“공녀님도 잘 놀다 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교환하는 남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들은 싸늘하기만 했다.
다각다각.
멀어지는 사두마차를 바라보는 로건의 시선은 무거웠다.
‘울브스에서 벌써 관심을 가지다니…….’
옛 인연이 있었다 한들 생각보다 빨랐다.
하지만 석궁은 그 구조가 간단한 만큼 언젠가는 유출될 수밖에 없는 무기였다.
그저 보안에 주의를 기울이며 가까운 미래에 몇 번 더 써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나저나 리이나가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울브스 백작가는 분명 동부에…….’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행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저 문장은 울브스 백작가 아니야?”
“그 부호 가문?”
“헤이즈너 후작가와 약혼한다더니, 엄청 미인이네.”
리이나에게 향하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로건에게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그럼 저 남자는 누구야?”
‘씁.’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을 피해 로건은 가능한 한 빠르게 거리를 벗어났다.
* * *
“로건 님, 안색이 왜 그렇게…… 설마 진짜 사고 치셨습니까?!”
“골 울려. 조용히 좀 말해!”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설마 검공께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니죠?!”
필립의 간절한 눈길에 로건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검공 만나서 이 꼴이 된 건데?”
쿨럭.
기가 막힌 타이밍에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도, 도망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말로…….”
“크크크. 크하하하!”
새파랗게 질린 안색의 필립을 보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리이나가 남긴 약간의 찜찜함이 유쾌하게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미치셨습니까?!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아씨, 미치겠네. 내가 도대체 어쩌다가…….”
파랗게 질렸던 필립의 안색이 이번엔 새하얗게 변해 갔다.
혼자 상상을 펼치다 내상이라도 입은 것 같은 변화무쌍한 모습이었다.
로건은 그런 필립을 붙들고 대강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안도하는 필립의 얼굴을 보며 한동안 일을 전적으로 맡기겠다고도 덧붙였다.
죽다 살아난 기분의 필립은 그 말에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로건이 부상 때문에 쉬려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역시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건은 그 기간에 또 나름의 할 일이 있었다.
‘중급 검술…….’
로건은 오랜만에 펜과 종이를 앞에 두고 생각을 정리했다.
포스를 각성하기 위해 신체를 단련하는 기본검술이 하급검술이라면, 포스를 각성한 후 그 포스를 사용하여 펼치는 검술을 보통 중급검술이라 불렀다.
그러한 중급검술은 조금 오래된 기사단이라면 어디에나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그 질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중급검술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그저 포스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요령에 그치는 것이 있는 반면, 확실히 검술 자체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몸놀림을 달라지게 만드는 뛰어난 중급검술도 존재했다.
전자의 예가 현재 맥라인 중급검술이고, 후자의 예가 에스페란자 기사단이 익히는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오러유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급 검술이나, 포스유저에서 오러유저에 이르는 길이 담겨 있다는 극소수의 최상급검술은 웬만한 귀족들도 접할 수가 없는 보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일반적인 기사들이 접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검술은 결국 중급검술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히지 못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 중급검술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상향 평준화되어서.
십여 년 뒤, 제국의 한 상인이 유적에서 고대의 검술서를 발굴한다.
현시대의 중급 검술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검술서.
기사라면 자신만이 익히고 말았을 비전이었지만, 상인은 그 책을 복사하여 판매했다.
처음에는 소수에게만 아주 비싼 값에 팔렸던 검술서는 어디서 샌 것인지 결국 시중에서 자체 복사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대륙의 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익히는 공공재처럼 퍼져 버렸다.
그 후 대륙 전체에 중급 검술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기사들의 무력을 전반적으로 상승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거기까지는 지금 신경 쓸 필요 없지.’
그 검술서가 발견되는 것은 제국 전쟁 이후의 일.
그 후에 자신이, 가문이 살아남는다면 그때 처리하면 될 문제였다.
당장 중요한 것은 전생의 로건이 그 검술을 사서 배운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철혈(鐵血 : Iron-blood) 검법.’
검법의 본 주인이던 고대 기사단의 이름을 딴 검법이었다.
그리고 로건은 그 검법을 기술한 책에 검공의 직인이 붙은 증명서를 붙여 가문의 기사들에게 제공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허락하실 거야.’
철혈 검법은 포스를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검술이기에 수련 중에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로건 자신이 아무리 전쟁을 통해 평판을 끌어올렸다고 한들, 그런 단점이 분명한 검술을 불쑥 들이민다고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배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에 검공의 이름이 붙는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었다.
거기에 그동안 고민해 왔던 신검의 비전도 살짝 더할 예정이었다.
‘포스컨트롤, 환인공(換人功)과 1식 물결 가르기 정도만 먼저. 아버지나 로니안이 비장의 한 수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로건의 진짜 목적이었다.
검공의 이름으로 자신이 아는 비전을 가문에 전하는 것.
그런데 진짜 검공의 비기까지 가르침을 받았으니, 바라는 것 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로건은 흥겨운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펜을 놀렸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이미 알고 있는 검법을 분해하여 서술하는 과정이 의외로 로건의 흥미를 끌었다.
이내 그가 완전히 작업에 빠져들자, 눈이 절로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 황금빛이 진해질수록 오래전 보았던 원본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포스코어가 만들어 낸 감각의 증폭 효과가 이런 곳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생의 그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세밀한 그림과 묘사와 더불어 세세하게 주석까지 달린 검술서가 완성되는 데에는 고작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 * * 로건이 부상을 치료하며 검술서를 만드는 동안, 필립은 장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로건이 검술서 집필을 완료하던 날, 그가 가져온 임포릭이 전부 판매됐다.
그때 그들이 손에 쥔 돈은 무려 410만 골드였다.
원가를 크게 잡아 계산해도 400만 골드의 순이익이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의 성과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와아아아!”
“이번 달은 성과급이 없는데도 그리 좋으냐.”
“제 상상을 방해하지 마십쇼! 이 페이스만 유지해도 다음 달엔…….”
고용인이 자기 일처럼 사업을 생각해 주는데 싫어할 고용주가 있을까.
로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필립을 보았다.
“내가 돌아가서 다시 물량 보낼 때까지 보채는 고객들이나 잘 달래고 있어라. 아! 카일에서 하던 일은 어떻게 됐어?”
“빨리도 물으십니다그려. 뭐 그 일이야 이제 거의 손을 안 써도 알아서 흘러가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 아예 이곳에서 집을 구하는 게 어떨까요? 숙박비로 나가는 원가를 생각하면…….”
“아니, 이곳에서 일은 1년. 길게 잡아도 1년 반까지야. 그때까지만 임포릭의 판매에 집중해. 그 후로는 싫어도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테니까.”
“예?”
“그런 게 있어.”
“또 그 비밀이란 겁니까? 쳇.”
투덜거리면서도 필립은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릭보다 필립이 편했다.
릭이라면 대답해 줄 때까지 캐묻다가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을 테니까.
로건은 조용히 상념에 잠긴 채 몸 상태를 점검하고 계획을 되새겨 보았다.
‘이 추세만 유지해 준다면, 임포릭만으로 한 달에 450만 이상의 수익이 날 거야. 인기가 사그라든다고 해도 300만은 넉넉하겠지. 거기다 검공과의 인연도 만들었고…….’
덕분에 철혈 검법을 기사들에게 전수할 핑계도 만들었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에 기사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올라 있을지 벌써 기대가 될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하고자 한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그럼, 이제 물건을 살 차례인가.’
수도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들. 당장 영지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야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척박한 영지가 그리웠다.
“반드시 지켜 낸다.”
서남부의 하늘을 바라보는 로건의 눈빛이 그곳에 비친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