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0)
380화
“로프 경,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쪽 성벽에 배치된 지 이틀, 첫인사 후에 처음 듣는 목소리에 로니안은 마주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작고 단단한 인상의 중년 남자, 성전기사단의 세 부단장 중 하나인 아스트로 하이젠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지만, 로니안의 눈은 여전히 그 뒤를 쫓았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서 몰려드는 제국군,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눈부신 백마를 타고 기묘한 푸른빛이 번뜩이는 창을 들고 있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기사.
‘제국 서부 3군단장. 섬광창, 말톤 하이츠.’
열흘 전, 남쪽 성벽을 거의 함락시킬 뻔했다는 초인의 모습을 보며 로니안은 서서히 몸을 달궜다.
‘벼락이 내리꽂히듯 이어지는 날카로운 공격이 특기라고 했던가.’
튼튼한 방어력과 눈부신 회복력을 바탕으로 동급의 적에게는 대부분 상성의 우위를 보인다는 성기사, 아스트로 하이젠이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속공의 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로니안은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여유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멀리에 있는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뇌리에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말톤 하이츠는 속도에 특화한 특성을 가진 게 아니다. 그 놀라운 속도는 그저 그자의 무술이 가진 특징일 뿐, 다만 그 무술이…….
맥라인의 초인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과 빅토르는 제국의 군단장들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강제로 외워 왔다.
‘대체 그런 정보는 다 어디서 얻으신 건지…….’
물론 그 분석은 주로 동부 군단장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서부 군단장들의 특기나 특징까지 모두 염두에 둔 채 모의 대련을 해 왔던바.
저자와 동부 3군단장 블레이크 이븐도어 같은, 속도가 특기인 자들과의 가상 대련에서 형에게 농락당하듯 털린 것만 수백 번에 달했다.
‘특히 그 빌어먹을 잔영에.’
그 지독한 괴롭힘 끝에 로니안은 자신보다 빠른 자를 상대하는 법을 반강제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이 정도라면 속도전에 대한 대비는 충분하겠다. 이제는 네 장점을 살리자.
그리고 그가 무엇보다 자신하는 이유는 정보의 차이에 있었다.
‘내가 있는 줄이나 알까?’
3군단의 초인은 말론 하이츠 하나뿐, 자신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전에 아스트로가 보였던 열세는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터였다.
게다가 말톤 하이츠만 쓰러트릴 수 있다면, 3군단과의 병력 차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로는 신검에게 전해 들은 그 인간 폭탄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대처법 또한 함께 들었다.
– 어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면 바로 피하게.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하고 자멸할 것들이니.
그 신검이 목숨을 잃을 위기를 겪어 가며 내린 판단이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 변수였다.
‘형수님…….’
검혼과 1군단장이 있다는 동쪽 성벽엔 형수님과 부르델만이 남겨졌다. 아무리 검혼이 중상에서 회복되지 못했다지만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부르델의 원거리 저격 능력은 분명 경이롭지만, 근거리에서는 최상급기사 둘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단점이 있었다.
더하여 5군단의 정예들이 동서남북의 군단을 돕는 대신 그 군단장과 최정예는 삭풍의 마도사가 만든 마법진을 호위 중이라 했다. 최악의 상황에는 형수님 혼자 검혼과 1군단장, 그리고 5군단장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형수님의 특성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걱정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섬광창을 정리하고 동쪽 성벽으로 간다.’
로니안은 오직 그것만 생각하며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남쪽과 서쪽에 배치된 자신과 빅토리아가 부단장들을 도와 적 군단장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동쪽 성벽을 돕는다.
그것이 지금 그들의 기본 전략이었으니까.
“와라!”
제국군의 기사들이 성벽 위로 솟구치는 순간, 로니안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적들을 맞이했다.
“우와아아아악!”
“죽어!”
“뒈져라!”
거침없이 성벽을 넘어오는 제국의 병력.
온갖 소음이 범람하는 광기의 현장에서 로니안은 미친 듯이 제국의 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말톤 하이츠를 찾았다.
그리고 이내, 아스트로 부단장을 몰아치는 푸른 벼락을 마주했다.
꽈아아아앙!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초인들의 격전 속에서는 병장기의 충돌음과 폭발음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흔한 기합마저도 없이 굉음만 가득한 공간.
요 며칠간 정도 이상으로 과묵하던 아스트로 부단장처럼, 어쩌면 적 역시 그런 스타일이 아닐까.
로니안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초인들의 공간, 그들만의 세상에 끼어들었다.
터엉.
충돌의 여파에 날려 온 사망자의 투구를 한 손으로 날리며 가까이 다가서자, 두 사람의 상성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흰빛이 어린 방패를 들고 쏟아지는 푸른 벼락들을 막아서는 아스트로 부단장. 몸통만 한 카이트 실드의 뒤편으로는 혹시나 생길 빈틈을 주시하는 묵직한 눈동자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손에 들린 그의 메이스가 적을 맞추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그것은 번개처럼 전후좌우를 옮겨 가며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어 대는 창술가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몸이 4개, 팔이 8개로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움직임. 왜 섬광을 뿜어내는 창이라 불리는지가 여실히 느껴지는 무술이었다.
물론 저 모든 공격을 용케도 막아 내는 아스트로 부단장 또한 대단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모든 광경이 로니안에겐 더욱 굳건한 확신을 심어 주었을 뿐이었다.
‘전부 상정했던 범위 안이다.’
적의 몸이 4개라면.
‘그 4개를 전부 쓸어 버리면 된다.’
마음이 이는 순간 로니안의 검이 7개로 불어나더니, 그 검들은 이내 각각 7개씩 도합 49개의 검이 되어 말톤 하이츠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난도질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컥!”
갑작스레 검의 폭풍에 휘말린 말톤 하이츠가 피투성이가 되어 튕겨 나왔다.
날카로운 인상에 어울리는 가늘게 찢어진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지는데, 막상 함께 협공해야 할 아스트로 하이젠조차 멍한 눈으로 로니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단장!”
일순간 은하검의 최대치를 쏟아 낸 로니안이 한 박자 늦게 말톤을 향해 돌진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스트로의 메이스가 말톤에게로 휘둘러졌다.
파아아앙.
하지만 이미 기회를 놓친 것인지, 메이스는 말톤이 사라져 버린 빈 공간만을 헛되게 가르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말톤은 어느새 아스트로와 로니안을 일직선상에 두는 뒤쪽, 10여 미터는 떨어진 지점에 나타나 있었다.
“웬 놈이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모습.
상처 역시 급소 대부분을 비켜 간 듯하여 로니안은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기습으로 끝장을 내는 것은 그른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로니안의 눈은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전권 바깥에서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있는 ‘붉은 화살’에 꽂혀 있었다.
기사를 잡는 화살. 그 화살에 쓰러지는 것은 적들이지만, 그것을 보는 로니안의 붉은 눈썹엔 작게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게 지금 여기 나타나서는 안 됐으니까.
“부단장님, 성법은 잘하시죠?”
“그……렇습니다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물음에 멍하니 답하는 아스트로를 뒤로한 채 로니안은 곧장 적을 향해 다가갔다.
“설마 도망치진 않겠지? 제국의 군단장이?”
로니안이 어울리지 않는 도발을 섞어 가며 성큼 앞으로 나서자, 말톤 하이츠 역시 이를 갈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기습으로 득수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러니까 빨리 시작하자고.”
심드렁하게 검을 까딱이는 로니안.
그 모습에 말톤 하이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흐려지는가 싶던 그의 몸이 불쑥 로니안의 옆에 나타났다.
좀 전에 아스트로를 상대할 때보다 한층 빨라진 모습.
마치 방금까지 분노했던 모습은 모두 연기였다는 듯,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말톤의 눈빛은 차분하다 못해 예리하기만 했다.
반면 심드렁한 얼굴로 검을 까닥이던 로니안은 크게 놀란 표정으로 반 박자 늦게 검을 휘둘렀다.
‘애송이.’
말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고, 푸른 번개를 쏘아 내는 창이 그대로 로니안의 옆구리를 꿰뚫으려는 순간.
퍼버버버버벅.
수십 개의 주황빛 검들이 로니안의 전신에서 튀어나오며 푸른 번개와 교차했다.
콰콰콰콰쾅.
그 충격파에 휘말린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가 아스트로의 눈을 가린 것도 잠시, 다시 눈앞에 드러난 믿지 못할 광경에 성전기사단의 부단장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윽.”
“끄으응…….”
왼쪽 옆구리를 꿰뚫은 창을 두 손으로 움켜쥔 로니안 역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말톤 하이츠는 목에 검이 꽂힌 채 끅끅대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으읍, 합!”
푸슈슉.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옆구리에 박힌 창을 뽑아낸 로니안이 거의 귀신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으윽, 아스트로 님!”
“예, 예!?”
“치료 좀 해 주시죠. 빨리!!”
그 강렬한 기백이 멍한 아스트로의 정신을 깨웠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과묵하던 성전기사단의 부단장은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이내 신성한 흰빛이 창백한 얼굴의 로니안을 감쌌다.
오러로 인한 중상. 고위 성법으로도 쉽게 회복될 만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큼은 대충 아물었고 지혈 또한 확실히 되었다.
“후우우.”
로니안은 ‘7개의 혼’ 중 하나를 할당하여 말톤이 남긴 오러의 잔재를 틀어막고, 또 하나의 혼을 할당하여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임시적인 조치였고 전력의 삼 할 이상을 봉쇄하는 손해였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내 로니안은 말톤 하이츠의 등 뒤에 박힌 화살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오러가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화살 한 대.
격돌의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든 화살이었다.
로니안은 저 화살 덕분에 말톤 하이츠를 쉽게 잡을 수 있었고, 또 저 화살 때문에 지금처럼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무식한 전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델이 이쪽을 향해 손을 썼다는 것은 최선의 경우 동쪽 성벽이 일찍 정리되었다는 뜻이겠지만, 최악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후자일 확률이 너무 높았다.
‘형수님이 위험해. 이럴 때는 빅토르가 너무 부럽군.’
말톤의 공격이 남긴 상처가, 그 상처에 남은 놈의 오러가 지독한 통증을 유발했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눈앞이 핑 돌 지경이었다.
“으아아압!”
로니안은 다른 사람들로선 그 영문을 모를 고함을 내지르며 통증을 잊으려 애썼다.
그에 열심히 상처를 치료하던 아스트로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을, 뒤를 부탁합니다.”
설명할 시간조차 아까웠던 로니안은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동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게 저럴 수 있는 상처였던가.
아스트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로니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나 들리지도 않을 답을 간신히 뱉어 냈다.
“무, 물론입니다, 로프 경.”
자신도 모르게 상관에게 하는 경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린 것은 훗날 흑역사가 될 예정이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이겨야 가능한 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