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1)
381화노비엔스 서쪽 성벽.
두두두두.
전쟁이 시작되고, 사방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마 소리가 들려올 때도 빅토리아는 한 곳만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오는 4군단의 중심부, 황금룡이 새겨진 붉은 갑옷을 입고 붉은 검을 든 채 돌진하는 기사를.
– 우리의 참전이 성국의 승리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제국의 전체 전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어렵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국의 초인 전력을 줄이는 것.”
“음?”
빅토리아가 에일렌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금 다짐하듯 되뇌자 그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애런 님. 방금 뭐라고……?”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흠……. 역시 긴장이 되는가 보군요.”
2m는 넘을 듯한 키 때문에 더욱 말라 보이는 길쭉한 체형의 기사.
기사치고는 너무 가느다란 체형. 그 체형에 맞춰 제작한 듯한 은빛의 전신 갑옷이 다소 어색해 보이는 사내는 투구 아래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드러내 보이며 등 뒤에 멘 은빛 창을 꺼내 들었다.
“걱정 마시오. 약속대로 마도사님 근처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마치 조금 두꺼운 창이 다른 창을 들고 호언장담하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빅토리아는 그 모습에 가슴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기사가 바로 성전기사단의 세 부단장 중 한 명이자 신검의 후계자로도 불리는 성창(聖槍, Saint Spear), 앤소니 에버렛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빅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저를 호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단장님은 혈기사를 맡아 주셔야지요.”
빅토리아는 자신의 키만 한 지팡이를 들고, 제국 서부 4군단의 중심에서 돌진해 오는 붉은 갑옷의 기사를 가리켰다.
제국의 초인 전력 중 하나이자 4군단장. 혈기사(血騎士, Blood Knight), 올란도 브라운. 서쪽 성벽에서 그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앤소니밖에 없었다.
빅토리아로선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앤소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놈이야 바로 이곳으로 오겠지요. 애런 님의 마법을 보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테니까요.”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빅토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틀 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 원군이라더니, 보모를 시키실 생각이십니까?
신검 앞에서도 불만을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따지고 들던 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빅토리아는 작은 키와 체구 때문에 변장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자연스럽게 20대 초반의 왜소한 남성 마도사로 분했지만, 그 모습 역시 걸림돌이 된 것이다.
또한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마도사였기에, 겉으로 보이는 기세만으로는 실력을 정확히 판별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덕분에 빅토리아는 본의 아니게 전쟁 전부터 아군을 향해 실력 행사를 해야만 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보모 역할을 제대로 하실 생각인가요?”
“……거, 사내가 그렇게 뒤끝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쩝.”
민망한 듯 빅토리아의 시선을 회피한 앤소니가 다시금 전면으로 창을 겨눴다.
“애런 님의 마법을 생각하면 전술적으로도 이게 맞습니다. 그러니 잡담은 그만, 욕은 전쟁이 끝난 뒤에 실컷 먹겠습니다.”
“그 약속, 기억해 두겠습니다.”
피식 웃은 빅토리아는 4군단의 선두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천천히 지팡이를 내밀었다.
한때 그란디아 왕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마도사, 후안 더글라스가 쓰던 ‘켈라한의 지팡이’가 그녀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짙은 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나(mana)가 아닌 마력(mana force)을 증폭시키는 효과. 그 효과 하나만으로 5서클의 아티팩트로 평가받는 보물이 온전히 그 힘을 전해 주기 시작했다.
우우웅.
차오르는 마력. 그 고양감 속에서 빅토리아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 이제 이건 네가 쓰는 것이 좋겠다.
전에 쓰던 아틀란의 지팡이가 바람 속성을 다루기엔 더 좋다는 핑계를 대며 스승이 바꿔 준 보물. 아마도 전장으로 향하는 제자를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성과를 보여야 했다.
‘골렘은 안 돼.’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은 봉인이었다.
다른 일행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포스의 색이 특이한 경우도 충분히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었지만, 그것은 추정 정도에 불과하다. 같은 색의 포스를 쓰는 이들이 맥라인에도 있다더라, 정도로는 제국이 왕국을 압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골렘 마법이 전쟁에 나타난다면 대번에 맥라인의 골렘 학파로 특정되어 버릴 것이다. 최근 맥라인이 일궈 낸 성세, 그 마법적 측면에 있는 골렘 학파는 이미 대륙 동부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했으니까.
다만, 굳이 골렘이 아니더라도 빅토리아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이뤄 낸 성취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일 속성 강화. 이게 서클 마법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다.’
현대 마법에서는 사라진 체계.
그 이유를 이제는 그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 대륙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의 양이 줄어들고 있었고, 그 사라져 가는 마나를 집중해서 한계를 넘는 길보다는 다른 속성을 터득하여 벽을 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물론 그조차도 범인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재능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편법.’
편법으로 넘은 벽은 그다음 벽을 훨씬 더 두껍고 높게 만들어 버릴 뿐이다.
빅토리아는 최근 수백 년간 7서클의 대마도사가 나오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일 속성의 마도사는 그 범용성은 떨어질지언정 단순히 마법의 위력에선 이중 속성의 마도사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한다.
지금 그녀가 시전할 마법이 스승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 처럼.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땅 위로 갈색 마력이 퍼져 나갔다.
우우우우웅.
모든 것을 품 안에 끌어안고자 하는 대지. 그 포용의 속성을 반전시키는 마법이 막 성벽을 향해 뛰어오르려던 제국 기사들을 더욱 높이, 하늘 위로 날려 버렸다.
“으아압!”
“으헙!”
“이, 이게 무슨……!”
일순간 수십 명의 기사들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지켜보던 성벽 위의 병사들도 황당한 듯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20m에 달하는 성벽보다도 두세 배가량 높이 솟구친 당사자들은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상황에서 다시 한번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비티 컨트롤(Gravity Control), 헤비 프레셔(Heavy Pressure.)”
다시금 퍼져 나온 갈색 마나가 하늘 위로 솟구친 그들을 몇십 배의 힘으로 다시 끌어내렸다.
“으아악!”
“이, 이런……!”
“안 돼!”
이내 그 기사들은 하늘 위에서 떨어진 사람 크기의 흉기가 되어 진격하던 제국군들을 깔아뭉갰다.
콰아아아앙.
“아아악!”
“사, 살려 줘!”
피떡이 된 기사들과 그 아래 깔린 병사들.
그 처참한 광경에 진격하던 제국군의 본진 병력 중 일부가 주춤했고, 운 좋게 마법의 대상이 되지 않은 기사들조차 기껏 뛰어오른 성벽 위에서 추락한 동료들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순간의 공백이 전장 초반의 기세를 결정지었다.
“우와아아!”
“죽여!”
“마도사, 성국에 마도사가 있다!”
“젠장! 어디야!? 빨리 위치를 찾아!”
한껏 기세가 오른 성국의 병사들과 극심한 혼란에 빠진 제국의 기사들.
빅토리아는 그 정신없는 틈을 타 제국의 기사들을 두 차례나 더 허공으로 던졌다 다시 땅으로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악!”
“대체 뭐야!”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제국군의 중심에 있던 붉은 갑옷의 기사가 무서운 속도로 빅토리아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성창의 뒤다. 마도사를 죽여라!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함성.
“후우. 이제부터로군요.”
그 순간 이마에 흐르기 시작한 땀을 훔친 빅토리아가 가쁜 숨을 고르며 마력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앤소니는 씨익 웃었다.
“보십쇼. 제가 이쪽으로 올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세요.”
“물론입니다. 올란도 저자는 성법과 상극이니까요.”
달려오는 혈기사를 창으로 겨눈 앤소니는 더 이상 곁눈질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성법과 상극이란 건 빈말이 아니었다.
혈기사 올란도 브라운은 피를 조종하는 이상한 특성의 소유자였다.
피를 조종한다고 하니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포스를 깨우치지 못한 일반 병사는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칠 공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만들 수 있는 살벌한 특성이었다. 더하여 그가 작심을 하고 휘두른 검에 의한 상처는 성법으로도 쉽게 낫지 않는 저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 육체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 했던가. 일시적으로 몇 배 이상의 힘을 낸다고.’
성기사가 사용하는 성법과 비슷한 버프 효과를 보이고, 상대의 치료 능력은 무시한다.
성기사가 일반 기사에게 보이는 장점을 상쇄하는 특성의 보유자였기에, 앤소니 역시 지난 격전에서 상당히 고전했다고 들었다. 그가 일방적으로 묶여 버린 탓에 가뜩이나 불리한 병력이 그대로 무너질 뻔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마도사의 도움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앤소니의 말에 빅토리아는 긴장하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처럼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 초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와 앤소니가 같이 있는 곳에 홀로 덤벼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군단장님을 위해 길을 열어라!”
“인원수로 밀어붙여!”
“제국을 위하여!”
광기 어린 눈빛을 한 제국의 기사들이 그들이 자리한 성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편중되어 버린 진형. 서쪽 성벽의 다른 곳에선 수비가 한결 쉬워진 극단적인 무리수였다.
하지만 쏜살같이 달려드는 기사의 숫자가 기백에 달하는 순간, 그 표적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막아!”
앤소니의 외침에 주변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모여들었지만, 애초에 그 숫자가 차이 나는 전력은 집중시킬 수 있는 수 역시 한계가 뚜렷했다.
그러나 제국 기사들의 그것처럼 광기 어린 신념으로 무장한 성기사들은 수백의 적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을 위하여!”
“적들에게 천벌을!”
앤소니와 성기사들이 제국 기사들을 가로막자 일순간 무거워진 중력이 좁은 범위에 몰려든 제국 기사들의 발길을 묶었다.
“으아악!”
“제, 제국을……!”
“황제 폐하 만…….”
달려들기가 무섭게 쓰러지는 제국 기사들의 모습은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았다.
푸우우욱.
“이것이 신벌이다!”
이내 앤소니가 빅토리아를 보며 미소 짓던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한 번에 두 명의 기사를 꿰뚫어 버리는 순간.
그 사이로 붉은 빛살 하나가 번뜩였다.
스각.
“큭!”
“혈기사!”
앤소니의 목 근처에 붉게 그어진 검격. 다행히도 상처는 얕았다.
꿰뚫린 제국 기사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 투구 아래로 보이는 눈빛에선 아깝다는 감정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은신? 이런 능력도 있었다고?’
앤소니가 적장이 보인 새로운 능력에 눈을 부릅뜨는데, 빅토리아가 당황하는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회!”
마력이 솟구치며 일순간 그녀의 갈색 눈이 본래의 붉고 푸른색을 되찾았지만, 급박한 상황에 그것에 집중하는 이는 없었다.
동시에 일대의 적을 묶어 누르던 마력이 적 군단장에게로 집중되었다.
우우우우웅.
이미 펼쳐진 마법의 즉각적인 변용과 자유로운 컨트롤. 이것 역시 속성 강화가 가져다준 최대의 이점 중 하나였다.
“큭!”
“합!”
그 예상치 못한 수에 두 초인의 희비가 갈렸다.
물러서려던 발길이 갑자기 느려진 혈기사, 그 앞으로 저돌적인 돌진에 의한 찌르기(charging)가 특기인 성기사의 창이 쭉 뻗어 나갔다.
푸우우우욱.
“커헉!”
“으라차차!”
옆구리가 꿰뚫린 채 정신없이 밀려나는 혈기사와 그 앞으로 달려드는 앤소니.
한순간에 우열이 정해지는 순간.
‘끝장낸다!’
빅토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 때, 그녀의 눈에 붉은 오러가 담긴 화살이 날아드는 게 보였다.
피슉.
“으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오러화살들이 제국 기사들을 저격하고 있었다.
반갑지만, 한편으론 반갑지 않은 지원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으니까.
‘왕비님이!?’
– 명심해라. 제국의 전력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너희 일행의 안위다.
그들 남매의 은인이자 군주인 로건이 신신당부한 말.
적을 끝장내려던 빅토리아의 마력이 일순 변화하며, 이내 그녀의 몸이 성벽의 돌들을 타고 미끄러지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