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3)
383화 ‘버티자. 버티면 돼.’
에일렌은 처음의 계획을 다시금 되뇌었다.
성군단이 아닌 맥라인의 목표는 제국의 초인 전력을 줄이는 것.
원래부터 우세했던 북쪽 성벽을 제외한 다른 성벽들에 무려 4명의 초인이 추가되었다.
부르델의 능력이야 원래 격하의 적을 학살하기 위한 힘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은 달랐다. 로니안과 빅토르가 성전기사단의 부단장들과 힘을 합쳐 제국의 군단장들을 쓰러트리는 순간, 그들은 바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참절검과의 전투로 훨씬 강화된 불굴의 성채는 버티기에 특화된 능력이니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검혼과 검을 나눠 보기 전까지는.
스각.
“윽!”
검혼의 검 끝에 맺힌 희미한 오러가 불굴의 성채를 너무나도 쉽게 뚫고 들어오며 팔에 상처를 남겼다.
이미 에곤 밀러가 만들어 낸 상처까지 치면 사지에 성한 곳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에일렌은 애써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이 또한 예측했던 범위 내였으니까. 물론, 그중 최악의 상황이긴 했어도 말이다.
“놀랍군요. 부상이 심해 보이는데, 그 상태에서도 공간의 권능을 쓸 수 있나 봅니다.”
“호오, 그것도 아나? 식견도 풍부한 처자로군. 정말 아까워…….”
태연히 반문한 검혼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슬쩍 닦아 냈다.
이쪽은 여유를 연기하며 시간을 끌려 하는 속셈이었지만, 검혼의 몸 상태도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에일렌에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그이는 공간의 권능을 쓰려면 막대한 힘이 소모된다고 했어. 그런데…….’
저자는 달랐다.
간신히 형성한 이슬만 한 오러로 최상급의 권능을 쉽게도 발현한다.
같은 경지에도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차이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 이제는 검혼도 상대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은 검혼이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알까?
물론 남편의 사기적인 특성을 생각한다면 지지야 않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에일렌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아니, 아니야. 이자가 이렇게 약해졌을 때가 기회다. 여기서 끝장을 보면 돼.’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검혼은 피식 웃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 했나?”
마치 친척 어르신과 같이 푸근한 웃음에는 여유가 묻어 나왔다.
전투의 와중에도 그녀가 이렇게 잡념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검혼이 그녀를 압박하면서도 이렇게 선뜻 틈을 주기 때문이었다.
“항복하고 자네가 어디 출신인지만 밝히게. 폐하께서는 인재를 아끼시니, 제국에서의 출세는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아, 물론 남녀의 차별도 없지.”
저것은 정말 여유일까, 아니면 좋지 않은 몸 상태를 숨기기 위한 연기일까.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시간을 끄는 것이야 이쪽도 환영할 노릇이었다.
그녀가 다른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검혼으로서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안다면 절대 저런 여유는 부리지 못할 테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에일렌은 빙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검혼의 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 제의는 사양해야겠군요. 성국 소속 성전기사단 부단장 후보, 아란 에스넬입니다. 신의 적에게 투항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 성국 소속이라고? 신성오러를 한 줌이라도 보이면 내 순순히 인정해 주지.”
“아직 신들께 인정을 받지 못한 몸이라…….”
그 말에 검혼이 푸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를 간살한 흉악한 놈일지라도 신앙을 맹세하고 파장만 맞는다면 쥐꼬리만 한 신성력이라도 내려주는 것이 신들이다.”
파장?
“그리고 포스를 각성할 수 있는 인재라면, 9대신 누구와도 파장을 맞출 수 있지. 그런데 신들이 자네 같은 인재를 내버려 둔다고?”
대체 무슨 소리지?
무언가 어마어마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마치 신들을 무슨 거래하는 상인처럼 표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표현과 내용에 당황한 에일렌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검혼이 재차 피식 웃었다.
“역시 모르는군. 성기사들이 탄생하는 과정도 모르면서 성국 소속이라고? 부단장 후보? 흐으, 재미없는 농담일세. 그러니 이제 그만하지.”
그 말과 함께 겨눠진 검에서 다시금 자욱하게 살기가 일었다.
“마지막 권유일세. 소속을 밝히고 항복하게. 초인을 정체조차 숨겨서 타국의 전쟁터로 내보낸 고국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가. 제국으로 오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검혼의 진심이 느껴졌다.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는 마음가짐이.
그것은 아마도 소란스럽게 변해 가는 주변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후방에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제국의 깃발들. 동쪽 성벽의 전황만 보아서는 별 변화가 없어야 할 곳의 움직임이 에일렌의 눈에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 에곤 밀러를 쓰러트렸다!
‘됐어!’
익숙한 목소리에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대치한 두 사람의 안색이 확연하게 바뀌고, 에일렌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아깝군.”
‘군’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이 그녀의 옆에 나타난 검혼.
깔끔하게 가로로 그어진 검격이 그녀의 목을 중심으로 하는 붉은 선을 그려 냈다.
하지만 선명한 붉은빛은 그의 공격을 예상한 듯 이미 고개를 숙인 에일렌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내 그녀가 숙인 자세 그대로 검혼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회심의 반격이었지만 검혼은 그저 일 보를 움직여 검을 허공으로 흘려보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아슬아슬한 공세가 이어졌다.
파바바방.
초인끼리 싸우는데 허공을 치는 소리만 연달아 들리고.
“실력을 숨겼었나?”
그 붉은 잔영들 사이로 분노 섞인 검혼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방식을 바꿨을 뿐이지요.”
에일렌의 여유로운 답변에 트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태평한 음성과 달리 에일렌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부 한 끗 차이야. 집중!’
공간을 갈라 버리는 권능 앞에서는 불굴의 성채도 그냥 맨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검혼과 동일한 경지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대로 막아 낼 수 없는 참격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검을 맞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에일렌은 최소한의 반격만 하며 회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방어조차 포기한 채 회피에만 집중한 깃털 걸음은 이전보다 기동력을 확연히 높여 주었다.
물론, 그래도 한눈을 팔 틈은 없었다.
검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물방울만 한 오러도 위안이 되진 못했다. 오히려 바닥을 보인 적의 공세조차 피하기 바쁜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밀 뿐.
그나마 그조차도 금세 한계에 봉착했다. 격상의 적을 상대로 검을 부딪치지도 않으려 하니, 점차 궁지에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에일렌은 자신이 피한 곳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반전하며 날아드는 검날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목을 노리는 붉은 검날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방어를 도외시한 채, 검공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같이 죽자는 듯한 반격.
그 공격을 본 검공의 검이 급격하게 궤도를 틀었고, 상황이 바뀐 뒤 처음으로 두 사람의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콰아아앙!
“윽!?”
에일렌은 강력한 충격을 받으며 성벽의 안쪽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안색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검의 파괴, 최대로는 한쪽 팔의 절단 정도도 각오했던 그녀로서는 이 충돌이 일어난 것 자체가 의외였던 것이다.
‘……한계가 있었어?’
중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최상급의 권능을 자연스럽게 쓰는 듯하더니 역시 허세였던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전에 그녀가 당했던 검상들 역시 거짓은 아닌 터라 에일렌은 당황하면서도 금세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애초에 작정을 하고 노린 공격에만 가능했던 거야!’
급작스러운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변식에는 적용을 못 한다. 정확히는 그가 예측한 ‘정상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끌어모은 오러가 흐트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짐작을 증명하듯, 이번 충돌에서는 오히려 검혼의 안색이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
거기다 기다리던 목소리들까지 들려왔다.
“왕……, 아란 님!”
“아란 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든든한 아군 셋이 합류하자 에일렌의 창백한 얼굴에 절로 미소가 돌아왔다.
“하, 궁수 말고도 오러유저 하나 더에 마도사까지? 대체 정체가 뭔가, 자네들?”
어이없다는 듯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 검혼.
그 말과 함께 살짝 내려간 검 끝은 마치 전의를 잃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에일렌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검 끝의 오러와 부딪치지 말고 임기응변 위주로! 여기서 검혼을 잡는다!”
이곳에서 그를 꺾는다면 전쟁이 한결 쉬워진다. 지금의 전쟁뿐만 아니라, 맥라인에서 벌어질 미래의 전쟁까지도.
일행의 생각은 이 순간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검혼은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흐흐, 그건 내가 할 말일세. 다들 도망치지는 말아 주게.”
초인 넷을 앞에 두고도, 검혼의 얼굴에 어린 살기는 더욱 진해지기만 했다.
‘저 몸으로?’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몸 상태였다. 대륙제일검이라는 위명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하고 작은 오러를 보면, 방금의 장담이 초라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검혼이 눈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검을 곧추세웠다.
“어쩔 수 없이 수명을 좀 줄여야겠군. 대가는…….”
화르륵.
그의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슬쩍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같은 오러가 내뿜어졌다.
“자네들의 목숨일세!”
“합!”
빅토리아의 놀란 목소리와 동시에 강력한 마력이 그를 짓누르고, 부르델이 쏘아 낸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동시에 에일렌과 로니안이 검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꽈아아아앙!
내딛는 발걸음에 성벽의 일부가 터져 나갔다.
빅토리아의 중력 마법이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검혼의 몸은 순식간에 빅토리아의 앞에 나타나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빅토리아가 본능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순간.
쩌어어어억!
그녀의 몸을 뒤로 밀어내며 튀어나온 거대한 골렘이 그대로 검혼의 검격을 막아섰다. 아니, 막아선 채 그대로 둘로 쪼개졌다.
“악!”
골렘이 쪼개지며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가 반 박자 늦게 비명을 토해 내며 힘없이 주저앉을 때.
‘골렘?’
검혼 역시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단순한 돌 인형이 아니었다. 공간의 권능으로 베어 냈는데도 강력한 저항력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오러가 담긴 검격이었다면, 채 베어 내지도 못하고 막힐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방향을 바꾼 화살들이 일제히 날아들고, 급반전한 에일렌과 로니안이 그대로 그의 뒤를 덮쳤다.
꽈아아아앙!
검혼의 전신에 솟구친 불꽃 형태의 오러가 일순간 반감되었지만, 그 대가로 두 초인은 아예 성벽 바깥으로 날리듯 튕겨 나갔다.
“이 괴물이……!”
부르델이 수십 발의 화살을 미친 듯이 퍼부었고, 빅토리아는 주저앉은 채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마법으로 그를 옭아맸다.
하지만 불꽃 같은 오러 보호막을 믿는 것인지, 그대로 전진한 검혼은 다시금 빅토리아를 노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검혼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호오?’
강렬한 충격 탓에 변장 마법이 깨어지며, 푸른 머리에 붉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특이한 외모도 인상적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모습에 검혼의 검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아주 살짝 느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빅토리아를 살렸다.
“합!!”
꽈아아아아앙!
급작스레 그의 옆을 강타하는 회색의 오러.
그것이 검혼의 검격을 옆으로 틀어 내고,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든 검혼의 불꽃 오러를 다시금 반으로 줄였다.
“오빠!”
“버텨!”
한마디 고함만을 남긴 채 무섭게 검혼을 몰아치는 빅토르.
그의 전신에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기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