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6)
386화세상에 뿌려진 바로스의 영상.
물론 마탑들의 동시다발적인 발표에도 그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한 가지 사실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다른 건 몰라도, 제국이 전쟁을 미리 준비해 온 것은 사실 같다.
성국을 정벌하기 위해 서부 5군단을 움직일 때만 해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추가 파병을 결정하고 나서 불과 며칠 만에 출정 준비를 마친 중앙군의 움직임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20만이 넘는 대군이 고작 3일 만에 출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아세리안으로 향하는 추가 물자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 수십만 대군을 움직일 물자를 제국 황실이 비축하고 있었다.
제국의 주변에 있는 국가들에겐, 성국에서 벌어진 전쟁의 명분과 결과보다는 그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자연히 영상이 퍼진 시기를 기점으로 주변국 대부분이 제국과의 국경에 군대를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왕실에서 수많은 사신이 이웃 국가로 향했다.
– 연합. 제국을 상대할 방법은 연합밖에 없다.
약소국은 약소국대로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국, 아세리안의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 * * 쾅!
“대계가 시작 전부터 일그러졌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보기 드문 황제의 고함이 살기를 가득 품고 대전을 장악했다.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설명해 봐라, 록터스.”
직함도 아닌 이름, 형식상의 반존대도 아닌 명백한 하대.
황제를 오랜 기간 보좌해 온 재상 록터스 구스펠트는 그 냉랭한 말투의 의미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
강직한 인상의 노인은 코앞까지 다가온 사신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차분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먼저 이 상황에 대한 참모부의 추론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옥좌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록터스는 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와 같은 자세로 엎드리고 있던 이십여 명의 대신 중 한 명이 재빠른 무릎걸음으로 그의 옆으로 튀어나왔다.
“참모부의 사무차관, 레리…….”
“간단히.”
“……예. 현 상황에 대한 참모부의 검토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상의 단호한 목소리에 젊은 사내가 긴장한 듯 마른 입술을 핥았다.
“특수감찰부 요원, 통칭 귀신은 그 임무의 특성상 탐지나 기록 마법에 대한 대처법을 가장 먼저 교육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에 나온 요원들은 하나같이 마법 기록에 대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귀신들은 그 무엇보다도 기록의 파괴를 우선시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눈.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청년, 레리 구스펠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바로 요원 훈련소의 5클래스급 아티팩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아티팩트가 쓰였거나, 마도사급의 탐지계열 마법사가 작정하고 정체를 숨긴 채 기록만 했다는 것입니다.”
5클래스보다 높은 수준의 아티팩트라면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 언급되는 신인들이나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답은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즉, 바로스 황자…….”
황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의 주인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꿀꺽.
레리는 곧장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빠르게 말을 바꿨다.
“아니, 바, 반역자 바로스가 사전에 사실을 인지한 후 마도사급의 적과 연계하여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작정하고 영상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연수 상대는…….”
“검은 뱀이겠지.”
스산한 옥좌 위의 음성이 처음으로 청년의 말을 받았다.
“예, 폐하. 그리고 영상 속 가려진 은빛 오러의 주인은…….”
“제롬이겠고.”
“예, 예. 그렇습니다. 요원들을 막아 낼 자와 영상으로 기록할 자까지 미리 준비해 둔 것입니다. 반역자 바로스는 그때부터 이미 제국에 대한 반역을 꿈꾸고 있었다고 사료됩니다.”
“그리고?”
“……예?”
“참모부가 하는 일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설명해 주는 게 전부였던가?”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과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레리는 일순 당황하여 옆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데, 재상인 조부는 그 간절한 눈빛이 보이지 않는 듯 옥좌를 향해 흔들림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손자를 거들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
오히려 그 모습이 참모부의 젊은 천재, 래리 구스펠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남에게 의지할 때가 아니다.
내 목숨이 걸려 있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폐하. 예기치 않은 암초가 생겼습니다만, 저희 참모부는 작금의 상황을 오히려 이용할 계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말해 보라.”
“그런데 그러자면……, 먼저 폐하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황제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조부가 그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레리. 네가 감히……!”
뒷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 황제 폐하께 요구를 해!
다행히도 조부의 호통이 이어지기 전에 황제의 손이 올라갔다.
“계속하도록.”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계책.”
냉정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다시 움찔하기는 했지만 레리는 이내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성국의 정벌은 포기하겠다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레리!”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진 황실의 염원을 포기하라는 말.
그 위험한 발언에 조부 록터스가 다시금 고함을 질렀지만, 황제는 담담히 반문했다.
“그리해야 하는 이유는?”
“억지로 성국을 점령해 봤자 제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라…….”
“예. 대륙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겠다는 황실의 목표는 지금 상황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명분을 무시하고 성국을 점령해 봤자 대륙의 신민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400년 전의 실수가 되풀이될 뿐입니다.”
400년 전, 타락한 교단을 무너트렸던 교단 해체 사건, 레솔루티움(Resolutium).
대부분은 그것이 사제들의 자정적인 노력에서 벌어진 일이라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제국 황실의 입김이 있었다.
당시 제국의 황제는 무너진 교단을 대신하여 9대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흩어진 진짜 사제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척하던 그들은 100년 만에 동시대에 나타난 아홉 성자를 따라 노비엔스를 세우고, 제국 안에서 성도를 만들었다.
제국 황제가 100년에 걸쳐 만들어 낸 권위가 신이 내린 성자들의 등장에 한 번에 무너져 내리고, 심지어 제국 영토 내에 강대한 외부 세력이 자리 잡게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의 황제는 크게 분노했지만, 아홉 성자가 보인 수많은 기적을 토대로 교단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버린 상황에서 그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신의 대리자를 자청했던 과거가 오히려 교단의 재구성을 도운 것이다.
당시 황제의 분노는 결국 신들을 향했다.
– 시기도, 성도의 위치도 너무 공교로웠다. 신들이 어디까지 인세에 간섭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라.
그때부터 황실은 극비리에 성녀와 성자의 탄생, 사제와 성기사의 탄생에 관한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밝혀내는 데엔 아레스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신인(神人)이 남긴 자료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한때는 허황될 뿐이라 생각했던 초고대의 자료가, 신과 신전의 비밀을 알아내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덕분에 황실은 신들과 성자들, 그리고 사제와 성기사의 메커니즘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 신들이 인정할 명분. 그것이 필요하다.
웃기는 점은, 그 명분이 꼭 진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9대신이 인정하는 명분이라는 것은 완벽한 진실이 아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중의 여론, 즉 신민들 대다수가 인정하기만 하면 교단의 권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선(善)을 표방하는 9대신의 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리부동한 메커니즘.
그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황실은 신들과 신전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신과 신전의 비밀을 알게 된 제국의 황제들은 9대신을 모셔야 할 존재가 아닌 꺾어야 할 경쟁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교단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장대한 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지만.’
흐, 하고 낮게 웃은 황제가 다시 레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라고 참모부를 만든 것이다. 포기하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지.”
서늘한 공기가 레리의 목을 옥죄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할 말을 할 수 있는 강단이 있기에 그가 참모부의 대표로 나선 것이기도 했다.
“성국을 포기하시고 세상을 얻으십시오, 폐하.”
“하.”
탄성인 듯 한숨인 듯, 알 수 없는 황제의 감탄사에 레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억울하지만 참겠다고 공표하시면 됩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참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그리고 물밑으로 성국과 접선해서, 정벌을 관두는 대가로 제국에 대한 존중과 지지 선언을 발표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국의 지지 선언으로 여론이 수습되면, 우리 군은 그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검은 뱀을 쫓으면 됩니다. 제국에 악질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대륙에 위기감을 조성하는 그들이, ‘우연히’ 주변의 왕국들에 숨어들었다는 명분으로요.”
아!
엎드려 있던 신하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래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주변 왕국의 지배자들을, 귀족들을 모두 바보로 보는 것이냐?”
“개인은 어리석을 수 있지만 집단은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집단은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기에 때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현자 아리우스의 말이로군.”
“예. 진실이야 어찌 되었건 표면적으로나마 명분을 들이댄다면, 집단의 의견을 갈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세히.”
“우리 주변국 중 제국과 무역을 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역으로 이득을 얻는 귀족들이 상당합니다. 제국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움직여 갈등을 유발하는 겁니다. 제국에 협조하라고.”
“호오?”
“협조한다면 제국의 군대를 대놓고 그 왕국에 들일 수 있습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제국의 적을 도우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명분으로 정벌을 하면 됩니다. 이미 뽑은 칼, 제대로 휘둘러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좋다. 돈을 들인 값을 하는구나.”
그 말 한마디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레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죽음을 각오했던 록터스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륙의 정벌과 성국의 병합.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 제국의 목표는 결국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황제가 이 대륙 모든 이에게 실질적, 정신적인 지배자가 되는 것.
‘둘 중 하나만 먼저 이루어져도, 나머지 하나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일이 조금 틀어졌지만 선후가 바뀐 것에 불과하다.
황제는 가슴속에서 들끓는 야망을 담아 소리쳤다.
“참모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신전과 협상한 후 계책대로 실행하라. 검혼과 삭풍이 돌아오는 대로 본격적인 대계를 시작한다!”
“예!”
“예! 폐하!”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건진 자들, 문관 이십여 명이 지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우렁찬 외침이 대전을 진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