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신성 왕국은 용단을 내려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을 종식한 제국의 황제 폐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없기를 바라며, 성국의 모두가 대륙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
– 오해에서 비롯된 양국의 분란과 그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그 오해를 불러일으킨 검은 뱀, 카셀 마탑을 대륙의 공적으로 지정하고 추살령을 발동한다.
성국과 제국의 잇따른 발표는 다시 한번 세상을 뒤흔들었다. 제국이 성국 정벌을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그것도 서로를 칭찬하는 듯한 공표로 이뤄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바로 이어진 제국의 움직임은 주변국들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 카셀 마탑의 마법사들이 제국의 주변국들에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있다. 각 왕국에 놈들을 잡아내기 위한 협조를 구한다.
수확기가 끝나 가는 늦가을.
일방적인 통고와 함께 국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제국의 군단들이 대륙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 * *
“거절한다.”
로건은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그 단호한 모습에 그의 앞에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던 제국의 사절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른 나라에서 온 사절이 그 왕에게 하는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도발적인 언사.
로건은 피식 웃으며 사절을 바라보았다.
“후회? 그건 다른 나라의 군대를 왕국 안에 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면 하게 되겠지.”
“……거부하신다면 황제 폐하께서 맥라인이 검은 뱀과 협력한다고 간주하실 겁니다.”
사절이 대놓고 싸우자고 도발하는 꼴이었다.
뻣뻣하게 세운 고개가 마치 목을 쳐 달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미트라 자작이라 했던가.’
죽음을 각오한 눈빛.
대체 사람을 어떻게 다루길래 사절로 올 만한 수준의 귀족이 이렇게 서슴없이 목숨을 버리려 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정말 목을 쳤다가는 바로 쳐들어오겠지.’
– 제국의 서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셋이지만, 동쪽은 저희 왕국뿐입니다. 제국이 정복 전쟁을 벌인다면 우선 저희 왕국부터 정리하고 서방을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외부의 시각으로는 저희 왕국의 군사력이 그 세 왕국 중 하나와 비등할 뿐이니까요.
데미안의 말은 정론이었다.
현재와 명분은 달랐지만, 전생에 제국 역시 결국 그란디아부터 쳤었으니까.
물론 사절을 그냥 돌려보낸다고 안 쳐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의 시기는 우리가 선택해야지.’
성국에서 돌아온 에일렌 일행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제국의 초인을 노리되 서로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했더니, 미친 듯이 날뛰어 전과를 만들어 냈다. 심지어 동생 놈은 목숨이 위험했을 치명상을 입기까지 했으니 로건으로선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마수림에서 한 방 먹었을 카셀 마탑이 수작을 부릴까 염려되어, 또 그곳에 있을 검혼이 자신을 알아볼까 하는 우려에 따라가지 못했던 일이 천추의 한이 될 뻔했다.
그런 그들이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맥라인은 검은 뱀과 협력하지 않는다. 검은 뱀에 대한 수색과 색출 작업에 협조할 생각은 있으나, 제국군의 진입은 허용할 수 없다. 내가 할 말은 그뿐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제국의 분노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절의 모습에 대전에 모인 대신들의 시선 역시 차가워졌다.
도가 지나치다 못해 그야말로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 꼴이었지만, 로건은 그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절을 모셔라. 그리고 국경까지 안전하게 호위해서 보내 드려라.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그 말에 한껏 목소리를 높이던 사무엘 미트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내가 안 죽이면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겠지.’
실제로 전생에 그란디아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로건은 조금의 빌미도 남길 생각이 없었다.
“저, 전하. 이건 국제관례에 어긋나는…….”
갑자기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무엘.
하지만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고, 로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군대를 들이라는 사절에게 환영 파티 같은 것을 열어 줄 수는 없지. 얌전히 돌아가게, 자작.”
제국의 속셈이야 머리가 있는 식자들이라면 모두가 유추하고 있는바.
하지만 불꽃의 눈이 전해 준 서방의 정보에 따르면 이미 서쪽의 국가들에선 분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친제국파와 반제국파의 싸움으로 내란의 조짐이 보이는 곳까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분란을 일으킨 귀족들도 멍청해서 그리 행동한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나라의 이득보다 자신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기회주의자들일 뿐.
‘황제가 머리를 잘 썼어.’
하지만 맥라인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혹시 제국의 사절과 친분을 다지고 싶은 이가 있는가?”
로건의 시선이 슬쩍 대전을 훑자 대전에 가득한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없습니다!”
“뜻대로 하소서, 폐하.”
“폐하의 뜻이 곧 왕국의 뜻입니다.”
그에 로건은 씩 미소를 지으며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
이제는 아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준비는?”
대전을 나오자마자 바짝 따라붙는 이들.
그중 오른편에 있던 데미안이 로건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2, 3군단은 이미 요새를 중심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방어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1군단 역시 출정 준비가 끝났으며, 4, 5군단도 지원이나 직접적인 참전이 가능하도록 준비 중입니다.”
“자경단은?”
그 말에는 왼쪽에 있던 드웨인이 바로 응답했다.
“아직 수확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심이 요동칠까 소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연사 석궁의 보급량은 늘렸습니다. 리베라티오 역시 마도공방에서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래, 좋군. 제국의 움직임은?”
“필립의 보고에 따르면 동부 군단으로 전쟁 물자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예상보다 그 물량이 많습니다.”
“……많아?”
“예. 5개 군단이 아닌 8개의 군단 전부,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움직일 만한 물자라고 합니다.”
그 말에 로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전생과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시작부터 그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물론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부 5군단만으로도 속절없이 무너졌던 전생의 그란디아와 지금 맥라인이 같지는 않을 테니까.
“데미안. 예상 침략 시기는?”
“명분 쌓기용 요식 행위가 몇 차례 더해진다 해도, 길어야 한 달로 보입니다. 동부 군단들이 루스펠하임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면상으로야 합동 훈련이라고 합니다만.”
“……한 달이라.”
구체적인 기간을 듣고 나자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회귀 직후부터 대비해 온 재앙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확 실감 났다.
전생에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던 20년간의 투쟁, 그 발악 같은 나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결국 끔찍한 시체의 산으로 이어졌다. 염원의 힘으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내 준 고국 유민들의 한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제는 그런 참상이 생기지 않게.’
후.
로건은 짧은 한숨으로 한순간 몰아친 격정을 털어 내고는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할 일을 물었다.
“……로니안은?”
“백작 각하께서는 오늘부터 수련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 가 봐야겠군.”
“저기, 그런데 폐하.”
“음?”
“정말로…… 승산이 있는 거겠지요?”
잠시 망설이다 꺼낸 말.
드웨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로건의 답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하지.”
그 말에 비로소 걱정 가득한 얼굴에 조금은 화색이 돌았고, 로건은 피식 웃으면서 충직한 신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니안을 만나러 가는 길.
로건은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을 먼저 마주했다.
“……루이사 공주.”
“그간 격조했습니다, 폐하.”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상대가 정중히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로…….”
“저야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길일 뿐입니다만?”
“아…….”
“몇 달간 폐관 수련이라는 핑계로 만나 주지도 않던 약혼자가 드디어 밖에 나왔다는데, 궁금할 수밖에요. 폐관 수련 중에 ‘크게 다치거나’ 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
이 여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완전히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한시가 바쁜 이 시간에 괜한 연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황제가 노골적으로 세상에 정복욕을 드러냈다. 게다가 그 명분으로 카셀 마탑을 내세웠고. 공주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제국의 왕족이자 카셀 마탑의 마도사.
좀처럼 갖기 힘든 두 복합 신분의 주인은 그 말에도 싱긋 웃음만 보였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폐하?”
“……?”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저와 아버지는 혼약을 조건으로 전쟁이 벌어졌을 시 맥라인을 돕기로 했습니다. 설마 이 민감한 시기에 저를 돌려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봤자 너만 손해다.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루이사의 답변에 로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카셀 마탑은 이제 대륙 어디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할 불똥이 되었다.’
대충 생각해도 그 신분은 버리고 왕부로 돌아가는 게 현명한 선택 같은데, 왜인지 눈앞의 공주는 안전한 길 대신 불구덩이 속에 몸을 담그는 길을 택한 것 같았다.
이유부터 납득이 되지 않는 터라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약속을 지킨다 해도 이득은 하나도 없는데다가, 잘못될 경우는 타고난 신분과 지위까지 모두 잿더미가 된다. 그런 짓을 자처하는 사람을 나보고 믿으라?”
“제가 정보를 드린다 해도 어차피 교차 검증을 하실 것 아닙니까. 폐하께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텐데요?”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의 푸른 눈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말 돌아갈 생각이 없군.’
왜일까?
카셀 마탑의 지시?
아니면…….
“공주가 제국을 증오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루이사의 푸른 눈에 일순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또한 전신에서 뿜어지는 회색 마력이 일순간 미미하게 일렁였다.
자신이 마력을 볼 줄 안다는 것을 모른다면, 절대 연기일 수가 없는 반응이었다.
“……정말이었군.”
“……정말 곤란한 분이시군요.”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지며 정색하는 루이사의 표정.
하지만 로건은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왜, 어째서 제국의 공주가?
설마 동익왕도?
온갖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유나 알아보고 있을 시기는 아니었다.
지금은 목전에 닥친 전쟁만 신경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그래도 다른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좋아. 그렇다면 협조하도록 하지. 그런데 제국 공주로서는 그렇다 쳐도, 카셀 마탑의 입장은 어떠한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륙의 공적으로 선포되어 설 자리를 잃었는데, 앞으로 어찌할 셈인가 말이다.”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군요.”
꿍꿍이가 있군.
카셀 마탑.
바로스를 부추겨 그 재앙을 만들었던 무리들.
언제고 반드시 처리해야 할 적들이지만…….
‘놈들 역시 제국의 적. 놈들에 대한 건 제국을 극복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로건은 그렇게 생각을 접어 둔 채 고개를 돌렸다.
“뭐,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공주, 혹여나 다른 속셈이 있다면 일단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호호. 그럴 리가 있겠…….”
“왕국에 타격을 입히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접어 두고서라도 공주와 카셀 마탑의 뿌리를 뽑아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지요, 폐하.”
뒤돌아선 상태에서도 짜릿하게 전해지는 살기.
잠시 멈칫한 루이사는 이내 억지웃음을 지으며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폐하.”
“폐하를 뵙습니다.”
길을 가는 족족 고개를 숙이는 시종들과 신하들.
그들은 로건의 뒤를 따르는 루이사의 모습을 이채롭게 바라보았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대륙에 분쟁의 씨앗을 심고 있는 시기에 그랑피아에서 자유로이 활보하는 제국의 공주는 분명 이질적인 모습이었으니까.
그 결과.
“그 공주님이 로니안 백작님이랑 약혼했잖아.”
“파혼도 하지 않고, 돌아가지도 않는대.”
“그럼…….”
맥라인 왕성의 시종들을 중심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소문이 생겨났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양국의 움직임은 전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