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89)
389화- 우리가 옳다.
그런 생각이나 근거, 혹은 주장. 곧 명분은 전쟁에 있어, 특히 침략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침략하는 군대의 병사는 그 누구도 자신들이 침략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정의를 구현하는 징벌자이길 원하지, 선량한 피해자를 공격하는 악당이길 원하진 않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찔러야 하는 병사는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이유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명분이 없다면, 아무리 훈련이 잘된 군대라도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제국의 명분은 꽤 그럴듯했다.
– 성국 전쟁의 비극을 만들어 낸 대륙의 공적, 검은 뱀의 수색에 대한 협조를 맥라인은 철저히 거부했다.
–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맥라인을 일벌백계하겠다.
물론 양식 있는 지자들은 누구나 핑계라고 생각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주 일부의 사실을 포함한 선전 포고와 적절한 선동, 거기에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은 압도적인 병력의 출정식까지 더해지자 제국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 동부 8군단 전체 동원.
– 황실 중앙군 출정. 3개 군단, 15만 명에 이르는 병력.
– 검혼을 비롯한 황실 친위대와 초인 6명 출정.
– 삭풍의 마도사를 비롯, 아세리안의 7대 마탑 마탑주 다섯 출정. 마법 병단 출정.
그것은 세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질적, 양적으로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 * *
“1군단은 일단 프란시스코 경의 주도하에 카일 성에 주둔해 있습니다. 2군단은 검공께서 직접 이끌고 서북부의 요새 쉴드에 들어섰으며, 3군단은 패드릭 대공 각하의 지휘하에 동남부의 요새 아머에 주둔 완료했습니다.”
“왕국 연합은?”
대전의 옥좌에 앉은 왕, 갑옷과 검까지 패용한 젊은 군주의 모습을 응시하며 데미안 나달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협약에 따라 리버티와 테로난의 지원군들 역시 4, 5군단과 함께 서쪽 국경으로 이동 중입니다. 리버티에선 초인 군터 공이, 테로난에서는 철벽 라틴 로렌스와 해일의 마도사 구스타프 클레멘까지 동시에 출전했습니다.”
“셋이라……. 초인을 전부 동원하다니, 기대 이상이군.”
“제국의 속셈이야 뻔하니 왕국 연합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지요. 저희와 맺은 협약도 있고요.”
전쟁 준비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달가운 소식.
하지만 그럼에도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그런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건은 다시 담담하게 물었다.
“제국군과의 전력 차이는?”
“순수 병력만 따지면 저희 병력은 5개 군단, 왕국 연합의 병력까지 더해도 7개 군단 수준입니다. 제국군의 11개 군단과 마법 병단까지 포함하면 확연히 모자란 수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리한가?”
“절대 아닙니다.”
로건의 반문에 데미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귀족들의 의아한 시선이 데미안에게로 몰렸다.
“수적 열세는 자경단과 신무기, 그리고 폐하께서 준비한 ‘비책’ 등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습니다. 저희 왕국은 충분히 강합니다. 제국은 맥라인의 땅을 단 한 뼘도 점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드웨인 필스너와 더불어 문관 대신의 양대 대표라 할 수 있는 데미안 나달의 말에, 귀족 중 절반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그야말로 낙관적인 이들 뿐. 나머지 절반의 귀족들은 데미안의 장담에도 회의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무슨 비책으로 그 병력 차이를 메꾼다는 거지? 또 초인들은 어떻게 하고.
그 암묵적인 생각이 각자의 불안한 시선을 타고 공유되었다.
왕국 서부 중소 영지의 귀족, 클란 루프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제국으로 망명을 준비해야 하나.’
왕의 전시 소집령에 어쩔 수 없이 대전 회의에 참석했지만, 왕국에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 재산이나 바치라고 부른 거겠지.’
영지가 아깝기는 했으나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일단은 왕명을 따라야겠지만 그 후라도 가문의 남은 재산을 싸 들고 망명을 하면…….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그사이 무슨 말이 오갔는지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불안한 이가 많은 걸로 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챙.
갑자기 뽑아 든 검.
‘저걸로 뭘 하려고?’
클란을 비롯한 여러 귀족의 시선이 일제히 왕에게로 꽂혔다.
“보아라! 그대들의 군주가 가진 힘을!”
우우웅.
번쩍.
대전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검에서 솟아오른 찬란한 황금빛이 대전 지붕을 뚫고 솟구쳤다.
조금이나마 견식이 있는 자라면 알아볼 수 있는, ‘맥라인의 태양’을 상징하는 황금빛 오러.
붉은 해가 황금빛 햇살을 뿌리듯, 붉은 머리의 왕의 손에서 치솟은 황금빛이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눈을 파고들었다.
스각.
이내 얇은 칼이 종잇장을 가르는 듯한 가벼운 소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가 만들어 낸 결과는 너무나도 컸다.
쩌저저저적.
옥좌의 지붕부터 대전의 입구, 나아가 그랑피아의 본궁 입구까지 이어지는 3백 미터에 가까운 궁전 내부가 일제히 똑같은 각도로 갈라지는 모습.
그러면서도 어떤 기둥도 건드리지 않고 절묘하게 검흔만 남겨 놓은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그랑피아의 벽화에 입체적인 획을 그려 넣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영혼을 짜릿하게 압박했다.
이곳에 있는 귀족 중 그 누구 하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압도적인 무력 시위.
– 검혼이라 한들, 아니 신검이라 한들 이런 일이 가능할까.
턱이 빠지기라도 한 듯, 모두가 감탄사 하나 내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옥좌에서 이글거리는 불꽃 같은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던 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의 초인들을 결코 나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대전에 침묵이 내려앉길 잠시.
짝. 짝.
“우와아아아!”
누군가의 작은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후.”
대전을 나오자마자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특성 ‘업’을 쓴 직후, 바닥까지 고갈된 몸 안의 포스는 자신의 육체가 빈 깡통이 된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로건은 담담한 표정을 계속 유지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지켜보는 눈을 염려한 행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덕분에 전비 모금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바로 따라붙은 데미안과 드웨인의 목소리에 로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돈이야 문제가 아니지. 다만 혹시나 내부에 균열을 일으킬 얼간이들을 단속하려던 것뿐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누가 감히 딴마음을 먹겠습니까.”
“다만 궁전 수리비가 좀……. 아, 아니, 아닙니다. 하하.”
드웨인이 살짝 딴지를 걸긴 했지만 퍼포먼스는 훌륭하게 먹혀든 것 같았다.
‘이걸로 그랑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로건은 아주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 포스를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군 동향은?”
“동왕부에서 전해 준 정보와 아직은 다른 점이 없습니다. 초인들의 배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세 갈래?”
“예. 새롭게 군단장이 배치된 1군단과 2~4군단이 사냥꾼의 길을 따라 북쪽 쉴드로, 5~8군단이 모험가의 길을 따라 남쪽 아머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실 중앙군이 루스펠하임 근처까지 도착하여, 그대로 카일까지 대로를 따라 진군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말에 로건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평야가 뚫린 중앙 대로로 오는 군대가 오히려 숫자가 적다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친위대의 초인들은 죄 흩어 놨다면서.”
“검혼과 삭풍의 마도사가 있지 않습니까. 중앙군이니 동부 군단보다 더 정예겠지요. 마법 병단도 있고요.”
“……그래. 그렇겠지.”
황실 중앙군에 대한 정보는 제국에서도 극비라 그 이상의 짐작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직접 눈으로 보고 대응해야지.’
로건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내일쯤 출발해도 시간상 여유는 남겠군.”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친정하시면 병사들의 사기가…….”
“그만. 너까지 쓸데없는 아부를 할 필요는 없다. 전쟁에서 이기는 데만 집중해. 동익왕과 불꽃의 눈의 정보를 교차 비교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죄송합니다.”
흠칫하며 바로 고개를 숙이는 데미안.
그 모습에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은 로건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라는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저는요, 폐하?”
“……자네도.”
“에이…….”
털보 신하의 어울리지 않는 투정이 긴장감 가득하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환기시켰다.
그래서인지 속마음이 툭 하니 삐져나왔다.
“지금 전장에 있는 이들도, 또 자네들도. 그대들 덕분에 항상 든든하고 고마울 따름이야. 그러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나름대로 감상적인 말을 뱉고 보니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진 로건이 냉큼 돌아서는데, 듣는 이들이 갑자기 펄쩍 뛰었다.
“……폐하, 마지막이라뇨!?”
“무슨 그런 불길한 말씀을……!”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전쟁의 마지막! 이 인간들아!”
“아…… 예. 하하, 그 뜻이었군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뜻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크흠.”
딴청을 부리는 신하들.
단어 하나에 저리 민감한 반응이라니,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들 역시 불안했던 것이리라.
그에 로건은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지금껏 내가 밀어붙였던 일 중에 잘못된 건 하나도 없잖아. 이번에도 똑같아. 나를 믿어.”
해야만 하는 일.
실패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렬한 눈빛으로 신하들을 쏘아보자, 그들이 이내 주섬주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저기서 시비 털리고 욕도 많이 먹긴 했지만, 결국 성공은 하셨죠”
“……어?”
“그럼요. 위태위태한 적은 꽤 있었지만, 어쨌건 성공은 하셨죠.”
“……뭐 인마?”
이 인간들이…….
황당한 마음에 절로 눈꼬리가 올라가는데, 피식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보다는 왜인지 똑같이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마주친 세 쌍의 눈동자는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울려 퍼지는 웃음 속에서 긴장감은 더욱더 줄어들었고, 로건은 충직한 신하들의 배려에 고마워하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연무장에 들어섰다.
출정하기 전, 마지막 수련을 위해.
‘그래. 준비는 철저히 했어.’
연무장에 들어선 로건은 전쟁에 대한 걱정도 잠시 내려놓은 채, 검에만 집중하려 했다.
‘오늘의 퍼포먼스가 왕궁 밖까지 알려진다 해도 제국에서 믿지는 않을 거야. 카일에서 검혼이 일대일 대결에 응해 주면 좋겠는데…….’
아내와 빅토르 등이 전해 준 검혼의 무력을 떠올린 로건은 이내 그와의 대결을 상상하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검혼은 공간을 가르는 권능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아무래도 그만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최상급의 경지에 오르며 신검 비전의 7식인 공간 가르기의 비전을 쓰지 않아도 그 권능을 발현할 정도가 되었지만, 적어도 힘을 모으는 몇 초의 시간은 필요했다.
매 검격마다 권능을 싣는 것은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일.
‘특성을 쓰면 질 리야 없겠지만.’
그러지 않고서도 검혼을 꺾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검혼을 베고 탈진하여 전장을 이탈하는 것보다야 훨씬.
‘그러다 나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그에게는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
최근에서야 감을 잡고 시전할 수 있게 된 신검 비전의 8식.
그것을 연무장이 아니라 전장에서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면, 굳이 특성을 쓰지 않고서도 검혼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우우웅.
로건의 정신이 곧추세운 칼끝으로 서서히 집중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스으으.
언제가 경험해 본 불쾌한 기척이 그의 넓은 기감에 잡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