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0)
40화쪼르륵.
“명정차입니다. 정신을 맑아지게 하는 약초로 달인 차지요. 저희 마탑의 특산품입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레디오스는 찻잔을 내밀며 오랜만에 마탑에 찾아온 대박, 아니 호구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일단 어린 건 확실하고. 잘만 꼬드기면…….’
고작 150만 골드에 마탑주가 직접 나서서 목을 매야 할 정도로 현재, 정확히는 이번 달 예산 사정이 좋지 않았다.
마탑이 만들어 내는 최고 부가가치의 상품은 누가 뭐래도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최저 단가가 천만부터 시작하는 아티팩트는 1년에 몇 개라도 팔면 다행일 정도로 찾는 손님이 없었다.
결국 주력 상품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스크롤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대지의 마탑은 경쟁력이 조금 떨어졌다.
전쟁이 아닌 평상시에 대지의 마법이 효용을 보이는 것은 대부분 농지 개발이나 농사일, 혹은 대규모 토목 공사에 관련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찮은’ 일에 비싼 스크롤을 쓰려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그냥 영지민을 동원하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대지의 마탑은 항상 예산 부족에 쪼들리고 있었다.
결코 세간의 소문처럼 그가 탑주가 된 뒤 마탑이 부실해진 것이 아니었다.
탑주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마탑의 예산을 조금 가져다 쓰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탑 전체의 경쟁력에 지장을 준다는 소문 따위 헛소리에 불과했다.
물론 이번 달 예산이 간당간당한 것은 자신이 좀 과하게 당겨 쓴 탓이지만, 그만큼 희망을 발견했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잘되어야 마탑이 잘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흐음. 탑주께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차군요. 향이 아주 좋습니다.”
“하하.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그런데 붕괴 스크롤을 150장이나 사시겠다고요?”
레디오스는 말을 뱉어 놓고 순간 아차 싶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훅 들어온 칭찬에 귀족답지 않게 바로 본론을 말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구매자를 상대로 조급함을 내보이기까지 했으니, 명백한 실수였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 고마운 호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늦게나마 간을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큰 거래라 설레는군요. 그런데 사실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곤란한 점이라고 하시면?”
“아시겠지만 4서클 스크롤은 최소 5서클 마법사가 제작을 주도해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급 인력은 저희 마탑에도 많지 않지요.”
레디오스가 슬쩍 밑밥을 던지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데.
“……그래서요?”
상대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생각했던 호구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은 더 간을 봐야지.’
꿀꺽.
레디오스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스크롤이란 게 제작 단가가 비싸서 미리 만들어 놓지도 못하는 물건이라…….”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만큼 못 판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150장이면 다소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허허. 크흠.”
레디오스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매월 150장씩 사려고 했는데. 그냥 150장도 힘들다면야. 저는 왕실 마탑으로 가 보겠…….”
“자, 잠깐! 손님!”
“예?”
“매, 매월이요?”
레디오스는 자신이 헛소리를 들었나 싶었다.
“예. 월에 150장씩, 육 개월간 총 900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환청도,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으아아…….”
무의식적으로 손이 번쩍 들리고, 환호성이 나올 뻔했지만.
“……아아암.”
“지금 뭐 하시는…….”
“죄송합니다. 제가 피곤해서 기지개를 좀…….”
세월이 가져다준 혼신의 연기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는 자신이 표정까지 완벽하게 관리했다 믿었다.
“뭐, 당장 150장도 늦어진다면 6개월 동안 매월 같은 물량은 아예 무리일 텐데요. 차 잘 마셨습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일어서는 재신(財神)의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 발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울린 순간, 레디오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조건 해야지요!”
“예?”
“제가 말씀드린 건, 그러니까…… 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예, 예. 그렇고말고요.”
“가능하시다는 말입니까?”
“무조건 가능해야죠, 하하하. 한 달에 150장. 한 달에 150만. 여섯 달이면 900만. 허허. 그러시군요. 멋진 금액입니다.”
레디오스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표정을 가리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아뜨뜨!”
부르르 떨린 손이 최소한의 체면조차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괜찮으십니까, 마법사님?”
“쿨럭. 예. 예! 괜찮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은 체면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거래만 성사되면 자신의 과한 실험비로 인한 장로들의 비난 따위는 한 방에 잠재울 수 있었다.
레디오스는 그 바람을 담아 쏜살같이 방문을 뛰쳐나갔다.
* * *
“한 달에 4서클 스크롤을 150장이나요? 다른 장로들을 제작에 동원해야 할 겁니다. 그자들이 순순히 따를까요?”
“그래도 해야 해! 한 달도 아니야. 무려 여섯 달 치! 900만 골드라고! 삼분지 일만 있어도 중단된 연구를 재개할 수 있어!”
“장로들을 설득하려면 적어도 그 이득은 함께 나누셔야 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아니면 최대한 아랫놈들을 쥐어짜면 돼! 20년 만에 찾은 초인이 될 수 있는 단서야!”
“하지만 다른 일거리가…….”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다른 의뢰 모두 취소해! 위약금 물어! 우리 지금 큰 거래 없잖아!”
“크흠.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잘하면 그 녀석들을…….”
“예? 아…….”
마지막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로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그래서 마탑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포스로 강화된 청력 덕에 본의 아니게 하게 된 도청으로 그들의 사정은 잘 알게 되었으니까.
끼이익.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레디오스와 조금 삭막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 함께 방 안에 들어왔다.
“아하하. 공자, 이쪽은 우리 마탑의 장로 로메룬이오. 스크롤 제작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고 있지요.”
“로메룬입니다.”
마탑주 레디오스보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로메룬 쪽이 오히려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4서클?’
다만, 눈에 보이는 로메룬의 경지가 약간 의아했다.
“장로……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위 마법사가 희귀한 그란디아 왕국이라도 그렇지, 로메룬은 경지도 나이도 장로라고 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대지의 마탑이 부실하다는 소문이 돈 것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이 야비한 인상의 마탑주가 부임한 이래 쭈욱 나오고 있는 말이니,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야 물건만 사면 되니까.’
다행히 놈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탑주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혹시 스크롤 말고 마법사를 직접 고용하는 방식은 어떠십니까?”
“예?”
이번에는 로건이라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과 자부심 과다로 대부분 상종 못 할 인간으로 분류되는 마법사.
심지어 전장도 아닌 공사현장이라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비웃음을 받을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직접 계약을 맺고 고용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여긴 좀 다른가? 그럴 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해야지!’
일회용 스크롤이 왜 이렇게 비싸던가.
그 제작단가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고고하신 마법사들 대부분이 직접 나서서 궂은일을 하려 하지 않고 연구실에 처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4서클 마법사를 고용할 수 있다면, 4서클 스크롤 150장이 아니라 300장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훨씬 싸게.
“지방의 공사 현장까지 와 주실 4서클 마법사가 있을까요?”
상기된 음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기에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 하하. 이거 조금 오해를 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예?”
“4서클 마법사는 저도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기가 곤란합니다. 탑의 귀중한 인재들이라.”
“허…….”
로건은 실망했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어디를 가건 고위 마법사로 분류되는 4서클 마법사는 탑의 중요한 전력일 테니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일을 시키다가 이적이라도 하면 탑만 손해였다.
“그럼 왜 제게 그런 말씀을……?”
“그거야 귀한 손님께 더 좋은 제안을 드릴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로건은 이제 마탑주가 마법사라기보다 상인에 가까워 보였다.
“스크롤의 수를 줄이고 그 대신에 2~3서클의 제자들을 파견해 드리면 어떨까요?”
더 좋은 제안이라기에 일단 들어나 보려던 로건은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결국 하급 마법사를 몇 명 보내서 구색을 갖추고 돈은 다 받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죄송하지만…….”
“열 명!”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미리 거절하려는데, 탑주의 말이 더 빨랐다.
“……예?”
“2서클 마법사 아홉 명과 3서클 마법사 한 명. 오랜 기간 각종 공사 현장에서 호흡을 맞춰 온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파견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는 로건도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4서클 마법사 한 명을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전장이 아닌, 장기간의 공사에 동원하기엔 더욱 그랬다.
더구나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 중에 공사에 특화된 마법사들이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소리다.
“흐으음. 마법사분들을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다면 저도 좋지요. 제가 여기에 온 것도 공사 기간을 앞당기고 싶어서니까요.”
로건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오자 레디오스가 바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럼 스크롤 120장에 그 친구들을 공사 기간 내내 파견하는 것으로 어떻겠습니까?”
“120장이요?”
4서클 마법 스크롤 30장 대신 마법사 열 명인 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뭐, 괜찮겠군요.”
로건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 지켜보던 마탑주와 장로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서로가 얻을 것을 얻은 완벽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렇게 큰 금액에 장기 거래면 할인을 좀 해 주실 수 있겠지요? 얼마까지 가능할까요?”
하지만 이어진 로건의 말에 다시금 레디오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마탑주는 자신이 가진 패를 너무 일찍 풀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로건은 속으로 웃으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신들을 찾아온 목적이 지반 공사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은 저들도 짐작했을 것이다.
다중 속성의 마법을 다루는 클래스 마법, 위자드 학파의 왕실 마탑이 있다고 해도 지반 공사에는 대지의 마탑에 못 미쳤다.
해당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마법’이라는 이능이 들어간 고급 물품에 할인이라는 싸구려 느낌의 단어가 붙는 것을 마법사들은 병적으로 싫어했다.
자신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는 제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이 제안이 먹힐 거라 확신했다.
이자들이 밖에서 했던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허허. 급한 일이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 급한 건 아닙니다. 그냥 공사를 빨리 끝내고 싶을 뿐입니다. 돈은 충분하니까요.”
“아하하. 배포가 참 크시군요. 하긴 영지민만 동원해도 될 일이니.”
이것이 이 시기, 그란디아 왕국 귀족들 대부분의 상식이었으니까.
영지 개발에 비싼 돈을 들이는 것은 오직 급할 때만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영지민을 갈아 넣어서 ‘싸게’ 처리하면 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퍼져 있는 것이 지금의 귀족 사회였다.
‘그러니 제국에 쉽게 멸망 당했지.’
– 제국의 모든 법령의 목적은 위민(爲民). 즉, 백성을 위함이요. 백성을 위하는 것은 곧 나라를 위함이다.
–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나라를 강성하게 하는 근본이다.
훗날 제국 황제에 의해 공포되는 아레스 제국 법령. 그 가장 앞자리에 자리하는 말이었다.
전생의 로건 역시 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었으니까.
귀족의 소유물인 영지민에게 잘해 주어 영지 내 평판이 올라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것은 제국 전쟁을 경험하는 순간 단번에 사라졌다.
기사단이나 마법사단 등, 군대의 주력이 무너지면 그란디아 왕국의 병사들은 다들 도망치기 바빴다.
반대로 제국의 병사들은 주력이 패배하더라도 어떻게든 적의 발길을 묶으려고 달려들었다.
그 마음가짐의 차이는 언제나 직접적인 전력의 차이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군주가 백성을 대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걸 모든 것이 끝난 뒤에나 깨달았다.
아마 상당수의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백성이 잘살아야 나라가 강해진다.’
그 단순한 진리를 왕국이 망한 뒤에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저들의 눈높이에 맞춰 주어야 했다.
“가격이 제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냥 오래 걸리더라도 영지민을 동원해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실제로 로건은 정당한 보수 없는 영지민 노동은 시킬 생각이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다른 이가 알 리는 없었다.
“허허. 그렇군요. 당연한 말씀이지만, 마탑에서 할인이라. 허허허.”
그저 황당한 목소리와 허탈한 웃음소리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그 모습에, 로건은 약간의 자극을 더해 주기로 했다.
“싫으십니까? 그럼 저는 왕실 마탑…….”
“아. 아닙니다! 잠시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거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기세였다.
초조한 듯 입술을 핥는 혓바닥이 그 인상을 한층 더 야비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에 로건의 마음속 응원(?)까지 더해졌다.
‘초인의 길로 가는 단서를 잡았다며? 포기 못 하잖아?’
최상급기사가 오러유저로 가는 길목.
5서클 마법사가 6서클 마도사로 가는 길목.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좌절을 선사한다는 그 경계는 ‘마의 벽’이라 불리며 초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나누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벽을 가장 넘고 싶은 이들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이들이 아니라, 그 벽 너머를 슬쩍슬쩍 보기 시작하는 수준에 도달한 이들일 터였다.
“허허. 스크롤은 규정가인데……. 크흠. 이거 어쩔 수 없군요.”
결국, 마탑주는 욕망에 굴복해 자존심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