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02)
402화
“세상을 굽어보시는 나의 주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맑은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공간을 울렸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무릎을 꿇고 있는 은발 여인의 머리 위 법관에 성스러운 푸른 빛이 쏟아졌다.
기도실의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푸른빛은, 아마도 근처에 있는 이들 모두가 보았을 만큼 눈부셨다.
– 아아!
– 신이시여!
– 교황 성하!
당장도 기도실 밖에서 탄성을 지르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나둘 울리기 시작한 기도 소리가 어느새 기도실의 주변을 가득 메웠을 때.
그 이적을 만들어 낸 여인, 일리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음, 드디어…… 온전히 담았다.”
고개를 좌우로 꺾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마치 생경한 장소를 살피는 듯했다.
이내 차분히 일어선 일리아는 기도실 한편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흐음. 이게 얼마 만이던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정말 미친 사람 같았고, 심지어 거울에 비친 푸른 눈동자는 세로로 길쭉하게 갈라져 있었다.
“아, 인간은 이런 눈이 아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둥글게 변하는 동공.
일리아는 그런 거울 속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치 스스로와 대화하듯 중얼거렸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나의 종아.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볼일을 마친 후, 너 역시 나와 함께 천국에 거하게 될 터이니.”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은발의 여인이 울부짖는 듯한 모습.
하지만 일리아는 더 이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일리아가 기도실의 문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노사제가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하, 회복을 경하드리옵니다.”
“오냐.”
“……예?”
노사제는 일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랫사람에게, 특히나 나이 많은 이에게는 좀처럼 반말을 하지 않던 일리아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일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이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젊은 사제가 이제 성국의 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것도 성녀 출신의 교황.
‘성하께서 그동안 배려를 해 주신 거지. 내 주제에 무슨 존대를.’
그렇게 놀란 마음을 추스른 그는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듯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아, 다른 게 아니라 좀 전에 기도실 위로 솟구친 성스러운 빛에 대해 여쭙고 싶었습니다. 영혼이 떨리는 성스러운 파동에 주변의 사제들이 다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미처 다가오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사제들이 제법 있었다.
단순히 교단의 최고위층을 대하는 예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과도한 인사.
하지만 일리아는, 아니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의 화신이자 사도(使徒)는 그 과한 예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놀라운 말을 꺼내 들었다.
“신탁이 있었다.”
“예!?”
신탁이라니.
노사제는 물론,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히 귀 기울이고 있던 모든 이의 눈이 커졌다.
전대, 아니 전전대 교황이 사기꾼이라고 밝혀지기 전에는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을 제외하면 거의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신탁이었다.
“신의 종들을 모아라. 내가 받은 계시를 설명하겠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성녀이자 교황의 어투가 조금 이상한 것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서, 서둘러!”
“신탁이라니…….”
교황의 지시에 사제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일리아의 출관 소식을 듣고 접견을 청하러 가던 필립과 하먼도 그 소식을 들었다.
“신탁이요?”
필립이야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지만, 하먼의 반응은 달랐다.
“그렇습니다. 진짜 신탁! 세상을 굽어보시는 9대신의 뜻이 오롯하게 지상에 전달된 것입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선 같이 움직이고 있던 필립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먼저 뛰어가고 싶은 감정이 진하게 엿보였다.
여간해서는 그냥 보내 주고 싶었지만, 필립 역시 해야 할 일이 있던 터라 신검을 쉽게 놓아줄 수는 없었다.
“아, 좋은 일이군요. 그런데 혹시 그것 때문에 제가 성녀님을 못 뵙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그럴 리가요. 바로 뵈러 가시지요. 정말 신탁이 내려온 것이라면 이제부터 성국은 아주 바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우방인 맥라인의 부탁부터 들어야겠지요.”
개인이 아닌 맥라인 왕국의 부탁이라고 치부하는 신검이었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기에 필립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우리 왕국이 우방……이었나?’
다만 속으로 작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중앙 신전에 들어선 두 사람에게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 맥라인이 제국과의 교전에 승리했다.
– 검혼을 패사시킨 맥라인의 태양.
– 제국의 일방전인 완패.
그 소식을 전해 온 성기사를 돌려보낸 뒤, 하먼은 놀란 눈으로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 검혼을 죽였다니, 실로 놀라운 무위군요. 그런데 맥라인의 군주는 꽤나 어리다고 들었는데요?”
그것이 필립은 뿌듯하기만 했다.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콧대가 올라가는 느낌.
“아마 올겨울이 지나면 28세가 되실 겁니다. 뭐, 우리 폐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시죠.”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필립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28세, 아니 지금은 27살. 허……. 정말로 믿기 힘든 말이군요.”
담소를 나누며 필립이 로건 맥라인의 업적을 열심히 떠들 때만 해도 대충 장단이나 맞춰 주던 하먼이지만, 지금은 정말 놀란 듯 그 표정이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우리 폐하를 알게 되시면 놀랄 일이 점점 많아질 겁니다. 하도 깜짝깜짝 놀랐던 터라 이제 웬만한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니까요.”
필립은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말하며 웃었다.
“이거, 대륙 동부에 새로운 강자가 떠올랐군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상단주께서 하실 부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예? 제가 무슨 부탁을 드릴 건지 말씀을 드렸던가요?”
“성국에서 맥라인을 도와 달라, 그 말씀을 하시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 도움이야 이미 전장에 사제들을 파견……. 아, 죄송합니다.”
말하는 도중 하먼의 안색이 일변하는 것을 보며 필립이 황급히 말을 삼켰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하먼은 다소 굳은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언제고 밝혀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해도, 그 시작이 저희 성국이나 맥라인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신전의 정치 중립 불문율의 파괴.
그로 인해 발생할 복잡한 문제를 전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제국이 또다시 성국을 침범할 여지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필립 역시 비밀 유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고지식하다 알려진 이 신검이라면……, 반대했겠지.’
그렇기에 필립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미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성국의 처지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까요.”
그래. 당장은 말이다.
“……그럼?”
“말씀드렸듯 폐하의 부탁이 아닙니다. 빅토르 경의 사적인 부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안 믿으셨군요. 저 꽤 섭섭합니다, 단장님.”
그 말에 오히려 하먼이 순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필립이 먼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농담입니다. 빅토르 경과 성녀님의 친분은 단장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자세한 건 성녀님, 아니 교황 성하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정말 사소한 부탁이라면 말을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필립의 말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지만, 또한 완전한 진실도 아닌 것이다.
이 강철 같은 하먼 단장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한,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었다.
‘맥라인’의 국가 상단주가 성국의 교황을 접견하기 위한 목적이 사적인 부탁을 전하기 위함이라?
거기다 그것을 또 교황이 받아들인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번 접견이 맥라인과 성국의 공식적인 연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자료는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신탁과 제국의 패퇴.
연달아 전해진 믿지 못할 소식에 평소 고요하던 중앙 신전의 사제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그것이 맥라인의 승전 때문인지, 신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그 바쁨이 접견을 미루는 이유가 되진 않았다.
아마도 우리의 신분 때문이겠지.
“맥라인 상단의 필립이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기사처럼 한쪽 무릎까지 꿇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성국의 지배자를 위한 자리라기에는 다소 초라한 상석. 대전의 중심에서 고작 한 계단 높이 위에 있는 교황석은 권력을 멀리하고 소탈해야 한다는 신전의 방향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눈부신 외모는 그 초라한 상석마저 훌륭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과연 대단한 미모군.’
미모만이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종교 재판에 회부된 죄인에서 추기경이 되고, 또 성국을 구한 성녀로서 결국 교황까지 된,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놀라운 여인, 일리아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필립의 말을 받았다.
“맥라인 상단?”
“로건 왕의 직속 수하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하.”
곁에 서 있던 하먼이 말을 보태자 일리아가 눈을 빛냈다.
다분히 관심이 있어 보이는 표정.
‘당연히 그렇겠지.’
지금 성국과 맥라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폐하께서 신전의 도움에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직 전장인 데다가, 또 시기가 맞지 않아 직접 통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없는 말도 필립의 입에서 나오자 진실처럼 들렸다.
그 내용 역시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나무랄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도움? 아, 그랬지. 그 아이가 쓸데없이…… 흠.”
“예?”
“……?”
듣는 이들이 동시에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일리아가 작은 한숨을 내쉰 후에 싱긋 미소를 보였다.
“긴 기도 때문에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군요. 제 컨디션도 그렇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하먼은 납득한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필립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방금 성녀의 태도에서,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노련한 상인’의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기분 좋은 미소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얼굴 가죽이 움직이는 것일 뿐인 연기.
‘뭐, 성국의 고위층쯤 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조금 찝찝했지만, 일단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예. 그리 말씀하시니 폐하의 말씀을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필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최대한 명료하고 깔끔하게 군주의 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로건 폐하께서는 이번 제국의 공격을 맥라인이 막아 낼 경우, 아, 이미 소식은 전해졌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을 때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전쟁을 키우는 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는 무의미한 전쟁으로 죽어 갈 많은 인명을 위해서, 또 그간 도움을 주고받은 맥라인과 성국의 관계를 생각하여 성국에서 중재에 나서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호오?”
성녀가 눈을 빛내며 옆을 바라보자, 그 눈빛을 받은 하먼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신전은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며 사실상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은밀한 도움이면 몰라도, 공식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습니다.”
접견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필립의 말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말.
그야말로 하먼 킬러브루라는 사내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그에 필립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더했다.
“제국이 본국에 씌운 누명이 있으니까요. 명분만 치워 주시면 됩니다.”
“아, 검은 뱀…….”
하먼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성녀를 바라보자, 성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 가식적인 미소에 필립이 새삼 찜찜함을 느낄 때.
“하먼 단장 말대로 공식적인 도움은 좀 그렇습니다. 대신 예전의 맥라인이 했던 것처럼 도와드리면 어떨까요?”
“……예?”
“이를테면 여기 있는 하먼 단장님 같은 분이 변장을 하고 전쟁에 합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성하!?”
성녀의 말에 하먼이 경악하여 소리를 지르고, 필립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