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하.”
필립은 애써 웃으며 성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당연히 천하의 신검이 원군으로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신성 오러를 잘도 숨길 수 있겠다.’
단순히 은빛 오러와는 또 다른, 신성 오러 특유의 존재감은 몰라보는 것이 이상할 정도. 성국이 대놓고 제국과 다시 전쟁을 벌이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물론 맥라인으로서는 성국과 제국이 서로 박 터지게 싸워 주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세상만사에 대가가 없는 일은 없는 법.
‘무엇을 요구하려고.’
상행을 반복할수록 거듭 되새기게 된 세상의 진리를 떠올린 필립은 성녀의 제안을 일단 거절했다.
신검 파견에 상응하는 대가가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니까.
그냥 간단히 ‘맥라인은 신전에서 검은 뱀을 쫓아내는 데 크게 일조한 우방이다.’ 정도의 선언으로 제국의 침략 명분을 없애 주면 충분할 일이 아닌가.
“호오? 거절인가요?”
“우방으로서, 성국에 지나친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속셈이냐.
필립은 예의를 갖춰 에둘러 물었다.
그러자 성녀가 아닌 신검이 먼저 반응했다.
“성하. 그리되면 본국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소신이나 부단장들의 신성 오러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고유의 특징…….”
“하먼 단장님. 이는 신탁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이니 개인적인 의견은 자제해 주세요.”
“예?”
“추후 따로 이야기하시죠. 저와 둘이서.”
그렇게 하먼의 입을 닫아 버린 성녀는 이내 다시 필립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요, 필립 상단주님? 우리가 굳이 그 부담을 지겠다 해도 거절인가요?”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겠단 말씀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성녀가 긍정했다.
“그래요. 맥라인에서도 그렇게 돕지 않았습니까? 성국은 우방을 돕는데 있어 조건을 따지지 않는답니다.”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필립은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저 가식적인 미소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이게 웬 떡이냐.
‘9대신의 자비가 이렇게 내려온 건가? 오 신이시여! 폐하, 소신이 대박을 쳤습니다! 만세!’
필립은 마음속으로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괴성을 질렀다. 그러다 금세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감사를 표하며 냉큼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찜찜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 ……그것을 물어봐 주십시오. 엉뚱한 대답을 한다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닐 거라고, 그때부터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라고 성녀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성녀님 곁에 머물며 물어보고 싶었습니다만, 상황상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필립 아저씨, 아니 형. 꼭 부탁드립니다.
좀처럼 살갑게 구는 일이 없던 녀석의 부탁.
붉고 푸른 눈동자에 비친 간절함을 떠올린 필립은 반사적으로 열리려던 입을 간신히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였지만, 그 말의 내용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적으로 간주하라?’
확인을 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러시죠, 상단주님?”
“아, 아닙니다. 너무나도 관대한 제안입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전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니 우선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상으로 돕겠다는 말인데도요?”
그 말에 하먼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상식적으로라면 혹여나 이 자리가 파한 뒤 성녀가 하먼에게 설득당할지도 모르니, 일단 확답을 해 두는 것이 좋겠지만.
‘……일이 꼬이면 다 네 잘못이다, 빅토르.’
한번 가슴속에 생겨난 찜찜함 때문에 필립은 전혀 융통성 없는 남자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신하의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흐음…….”
“왜 그러시는지요?”
일리아의 묘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필립은 애써 태연함을 연기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성녀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닙니다. 그럼 로건 왕과 통신을 한 이후에 답변을 주시지요.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로건 왕?
한번 찜찜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말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걸렸다.
‘로건 왕이라.’
성국의 장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원래 성녀는 맥라인 출신, 게다가 주군과도 각별한 사이이기에 폐하라고 호칭한다고 들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이내 정말 자리를 뜨려는 성녀를 보는 순간, 필립은 더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이 찜찜함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으니까.
“아. 그 전에 성국의 장인 교황 성하가 아니라, 성녀 일리아 님께 개인 대 개인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예?”
“갑자기 친구의 부탁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나라의 중대사를 말하기 전에 이 사소한 부탁을 먼저 말씀드린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지금 갑자기요?”
“아하하하. 빅토르 경의 부탁입니다. 성녀님께서도 총애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빅토르 경. 그래, 그렇지요. 그에게는 많은 신세를 졌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또 왜 탐탁지 않아 보일까.
“하지만 지금 제 처지가 처지인 만큼 과한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의심을 하다 보면 없던 귀신도 생기는 법이라, 필립은 무작정 한쪽으로 쏠리려는 자신의 마음에 경계선을 세우며 조심스레 빅토르의 말을 떠올렸다.
“성하의 명예에 누가 되는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맥라인에 남아 있는 성하의 처소를 고아원으로 개조해도 되는지, 그 여부에 관한 것입니다.”
“……예?”
“전쟁으로 고아가 많이 생기고 있으니, 그에 일조하는 의미로…….”
그에 묘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던 성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예의 그 가식적인 미소.
“아, 그렇군요. 역시 빅토르 경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그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필립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속내는 너무도 복잡했다.
‘그 헛소리가 정말이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성녀 일리아의 맥라인 주교 시절 처소는 이미 고아원으로 운영 중이었다.
그것도 8년 전, 그녀가 처음 맥라인에 부임했을 때부터.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실행해 온 일을 모른다고?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닐 거라고…….
– 적으로 간주하라고 말씀…….
빅토르의 헛소리가 점점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렇다면 성녀는 왜 신검을 파견하겠다는 파격적인 말을 꺼냈을까?
‘성녀가 정말 적이라면, 파견된 신검이 하게 될 일은…….’
그 순간 주군의 등 뒤에서 검을 겨눈 신검의 모습을 상상한 필립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필립 상단주? 혹시 더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아, 아닙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하.”
정말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한 필립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접견실을 나왔다.
그런 그의 속내는 10분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거절하지?’
하지만 그날 밤, 전장에서 어렵사리 통신이 연결된 로건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저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성녀가 모른다는 것 자체가 더 말이 안 됩니다.”
[그거야 그렇지. 빅토르 녀석,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직접 물어봐야겠군.]“예. 우선 빅토르 경에게 자세한 사유를 물어보심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어. 하지만 그 전에 성녀의 제안을 수락해.]“예?”
[받아들이라고. 신검을 칼로 쓸 수 있다면 웬만한 위험은 감수해야지.]“폐하!? 그러다가 정말 최악의 경우엔…….”
필립이 반발했지만 로건은 단호히 그 말을 끊었다.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이상하다는 성녀가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아.]“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신검이 작정하고 신분을 감춘 채 암살자로서 날 찾아올 수도 있어.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과 별 차이도 없겠지.]“신검은 전문 암살자가 아니라 성기사입니다. 병력으로 상대하시면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세상에 명성 높은 신검이 암살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신의 이름하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가 광신도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 온 사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필립의 걱정은 타당했지만, 로건은 넘치는 자신감으로 그의 반발을 막았다.
[푸하하하. 걱정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필립? 나를 그리 과보호할 것 없네. 몰랐다면 모를까,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상 신검이 나를 암습할 수는 없을 테니.]그 검혼을 꺾은 왕이다.
이유 있는 장담에 필립은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고 헛웃음만 지었다.
그런 표정이 티가 났을까.
피식 웃은 로건이 필립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짚어 주었다.
[무엇보다, 그 호의 넘치는 제안을 거절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나? 성녀가 정말 적이라면, 그곳에서 자네가 어찌 될지는 생각해 봤고?]“아……!?”
[쯧. 자기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군. 거참,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성녀에게는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게.]“아으. 아무리 그래도…….”
필립은 양심상 다시 반박해 보려 했지만, 로건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충성심만큼 자신의 안위도 생각하는 필립.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말을 하면서도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으나 정작 받아들이는 이는 활짝 웃고만 있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신검이라니, 이거 예상치도 못한 강력한 칼을 얻게 되었어.]* * *
– 신탁이 내려왔다.
교황의 기도실에서 하늘로 솟구친 푸른 빛은 중앙 신전 내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이미 타국의 일이 되어 버린, 먼 동쪽의 전쟁 소식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그 신탁을 전한다며 모든 사제를 소집한 교황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사제들 대부분이 의구심을 품었다.
–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검은 뱀을 소탕하고, 마도성자의 후예들을 말살하라!
신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살기가 넘치는 말.
하지만 그 말을 전한 것이 성녀이자 교황인 일리아 가본, 전전대 교황의 탄핵 사건 이후 교단의 적으로 명명되고, 결국엔 교황이 되어 제국과의 전쟁까지 치른 이였다.
난세에 피어난 신의 꽃. 신전에서 생각하는 일리아의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짧은 기간 내 그보다 더 큰 굴곡을 겪은 교황은 교단 역사에 없었고, 그 수난의 역사가 곧 사제들에게는 설득력이 되었다.
결국 곧바로 실질적인 조치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검은 뱀을 추적 척결하는 조직을 만들어라!”
“대륙 전역의 신전에 적극적인 수색을 명하고, 각국에 협조를 요청한다.”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은 신탁의 명을 가장 우선순위로 수행하라!”
수많은 명령이 대륙 전역의 신전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 날.
신검 하먼 킬러브루는 일리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면 정말로…….”
“로건 맥라인이야말로 지브릭 카셀의 화신으로 운명 지어진 자. 그자를 처치하는 것이 그대의 사명입니다.”
일리아, 아니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보는 하먼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명령도 명령이지만, 그 손에 들린 물건조차 범상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하, 대천 결계를 유지하는 성물 중 하나를 어찌…….”
하지만 그 떨림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일리아는 덤덤한 얼굴로 상서로운 빛을 발하는 목걸이를 그에게 건넸다.
“그만큼 그대의 사명이 중하다는 뜻입니다.”
“성하…….”
“어서 받으십시오. 하늘과 자유의 신, 아리아 님의 성물 리첸티아(Licentia)입니다. 하먼 단장, 필히 사명을 완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을 위하여.”
그 단호한 어조에 하먼은 목걸이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신을 위하여.”
리첸티아의 상서로운 광휘는 하먼의 신성력을 진동시키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랬기에.
“우선은 의심받지 않게 그를 돕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시겠지요?”
그 순간 이어진 지시가 이전보다는 덜 거북하게 느껴졌다.
“……예, 성하.”
그래. 신이 내린 사명이니까.
“성물과 함께하는 동안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아리아 님이 그대에게 ‘진정한 길’을 보여 주실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정한 길. 그 말을 할 때 일리아의 묘한 표정을 하먼은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