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06)
406화
“직접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성 전체에 환한 횃불이 켜진 것이 무색하게 짙은 어둠이 내린 내성의 관저.
고요한 밤 분위기처럼 차분한 음성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두 사람 중 하나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맥라인의 국왕을 앞에 두고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그저 고개만 숙이는 이.
하지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인의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럽기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졌어야 할 일이니까요.”
로건은 중년인의 말에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빈말 같진 않은데.’
중년 사내, 동익왕은 세상의 정점에 있다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려온 이답지 않게 정말로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들고 온 짐조차 없이, 동행인이라고는 지금 등 뒤에 서 있는 기사 하나뿐이면서도 말이다.
자연히 사연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벌어졌어야 할 일이라? 그 뜻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어지러운 시기에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봐야 할 때이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동익왕은 그리 말하며 옅게 웃었다. 제국의 사방왕이 적국에 망명하여 직접 전장에 참가하게까지 만든 깊은 분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론 표정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로건도 알고 있었다.
‘그 지위에 카셀 마탑에 협력하는 것만 해도.’
다만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할 것은 있었다.
“동익왕께서…….”
“제라드.”
“음?”
“이제 제라드로 충분합니다, 폐하. 아,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폐하라 부르니 왠지 기분이 좋군요.”
사방왕의 자리에 한 점의 미련도 없는 듯한 어조에 로건이 재차 눈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제라드 님.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이 황실의 발표대로 정말 맥라인 때문입니까? 아니면 검은 뱀과 관련된 문제도 포함된 겁니까?”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전하기는 뭐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뒤에 기사는 몰라도 제라드 님은 전쟁에서 빠져 주셔야겠습니다. 이전과는 상황이 좀 바뀌었으니까요.”
루이사가 말한 대로, 제라드의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서클은 완연한 화염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카셀 마탑의 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법적 능력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지금의 국제 정세는 루이사와 대화했을 때보다 훨씬 극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라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여전히 여론을 신경 쓰시는 겁니까?”
“이 상황이니까 더욱더 신경 써야죠. 서쪽에서 제대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말에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분이시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축출된 이유는 탑과는 관련이 없을 테니까요. 굳이 높은 확률을 꼽자면, 정말 맥라인을 도왔기 때문일 겁니다.”
없을 테니까요? 때문일 겁니다?
생색 같은 말보다는 그 묘한 어조에 로건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제라드 님도 완벽한 확신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만?”
“아, 제 말이 오해를 일으켰나 보군요.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만약 탑에 관련된 문제였다면, 제가 여기서 이렇게 폐하를 뵙고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검은 뱀에 대한 황실의 집착은 과도할 정도니까요.”
그 말에도 로건이 납득하지 못한 듯하자 제라드는 작은 한숨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아는 이가 많이 없는 사실입니다만, 제국 황실은 과거의 한때 검은 뱀과 한 배를 탄 적이 있습니다.”
“예?”
로건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카셀 마탑과 아레스 제국의 태생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더욱 놀라운 말.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제라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믿지 못하시겠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히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허…….”
“작금의 특수감찰부, 귀신의 기술과 아티팩트도 당시의 유물이라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아레스 왕국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그들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그 당시 카셀 마탑에서 황태자를 세뇌하는 사건만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도 함께일 수 있었다고 마탑주가 그러더군요.”
“하? 세뇌요? 황태자를!?”
“예. 그때부터 그들이 제국의 공적이 된 것이지요.”
“으음…….”
그때부터는 아니겠지.
제라드가 아는 것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검신의 친우였던 대마도사 타론 아레스의 후예들은 아마 태생부터 그들과 적대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그들이 한순간이나마 검은 뱀과 손을 잡은 적 있다는 것이 더 황당할 뿐이었다.
어떻게 그들과 손을 잡았던 걸까.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야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황당한 로건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라드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아무튼 그 사건을 계기로 황족들은 날 때부터 정신 지배에 저항하는 마법적 시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실에서는 검은 뱀의 문양을 보기만 하면 관련자의 사돈의 팔촌까지 모조리 뿌리 뽑으려고 하지요. 그런데 만약 제가 연관이 있다고 봤다면…….”
말끝을 흐렸지만 생략된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제라드 님이 여기까지 오시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왕부를 탈출하는 과정에서만 기사 100여 명과 마법사 20여 명을 참살했다 하던가.
왕부를 벗어나 맥라인까지 오는 길에도 여러 차례 격전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익왕이 5서클의 화염 마법사라는 것도 그때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워졌겠지요. 황실의 초인들이 나섰을 수도 있으니, 제이가 있다 해도 왕부를 벗어나기도 전에 죽었을 겁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카셀 마탑과 협력한 것이냐.
로건으로선 새삼 그 배짱과 속사정이 궁금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니 저 역시 전장에 참여하겠습니다. 황제, 카이서스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섬뜩한 미소를 보이는 제라드의 모습은 도무지 거짓 같지 않았다.
‘아니, 진실이지.’
로건의 붉은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 오러마스터의 권능에 대한 감을 확실히 잡은 이래 점점 뚜렷해지는 감각은, 제라드의 분노한 영혼과 그에 동조하는 마나의 파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까지 읽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제라드는 다시금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저는 황제의 목을 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 있는 제이 역시 저와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 말에 동익왕의 뒤에 서 있던 수려한 외모의 금발 기사가 당연하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왕부의 숨겨진 칼, 오러유저 제이 펄슨의 영혼과 포스의 파장 역시 마찬가지.
이것 또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제라드 님도, 제이 경도 투지에 비해 실력이 좀 아쉽군요.”
로건은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만해라, 제이. 검혼을 꺾은 대륙 최강자의 판단이다. 자존심을 앞세우지 마라.”
제라드의 말에 앞으로 나서려던 제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눈썹과 이글거리는 눈빛은 금세라도 검을 꺼내 실력을 보여 주고 싶다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건의 눈이 번뜩였다.
‘호오?’
지금 겉으로 보이는 분노한 모습과 영혼의 파장이 미묘하게 달랐다.
분노라는 질척한 감정에 비해 파동은 다소 잔잔했다. 분노보다는 투지, 열망, 동경 같은 느낌에 가깝달까.
피식.
하긴, 오랜 세월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이의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즉각적이긴 했다.
연기를 한다라…….
‘내 실력을 보고 싶은 건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굳이 상대해 줄 필요는 없었다. 감쪽같이 기세를 갈무리하는 것이 경지에 비해 놀라운 수준이었지만 자신과의 격차가 너무 컸다.
다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카드라면, 적어도 수준차는 확실히 보여 줘야겠지.’
전장에서 지시를 무시하고 함부로 나대지 못하도록.
로건은 그런 마음에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제이 펄슨 경이라 했나?”
“예, 폐하. 뵙게 되어 영광…… 큼, 영광입니다.”
다가가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순간, 연기를 하던 중이란 것도 잊었는지 반색하는 모습.
그것을 자각하고 스스로도 당황하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순수한데?’
물론 예상보다 더 어릴 수도 있다.
아무리 오러유저라고는 해도 저렇게 젊어 보인다는 것은 실제 나이도 저 외모와 비슷하거나, 더 어린 나이에 오러를 깨달았다는 뜻.
즉, 엄청난 천재라는 말이었다.
보이는 경지와 추정되는 재능을 대조해 보면 실제 나이도 그리 차이 나진 않을 것이다.
‘최대로 쳐도 서른 초반이겠지.’
그 젊은 나이에 초인이 되어서 이름도, 실력도 숨기고 살았다면 자신을 보고 호승심이 들끓는 것까지는 오히려 이해한다.
그런데 그저 이름을 불러 주었다고 감격한 표정이라니, 기세를 눌러 줄까 하던 마음이 오히려 팍 식어 버렸다.
“……그래, 제이 경.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럴 거면 아까 분노한 연기는 왜 한 걸까?
조금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때.
작게 한숨을 내쉰 제라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이. 대륙제일검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이 기회다. 차라리 솔직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제이가 당황하고, 로건조차 순간 제라드의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폐하, 잠시만 제이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없을 재능을 가진 친구입니다. 그 앞길을 막아 버린 못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군요.”
불과 얼마 전까지 제국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가 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전하! 왜 그렇게까지……!?”
당황하여 그를 말리는 제이보다 로건이 더욱 당황했다. 제라드의 과한 예의도 예의지만,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엄청난 표현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륙제일검?’
예전의 검혼에게 붙었던 거창한 칭호…….
“아……!”
그런 검혼이 자신의 손에 죽었다.
즉, 대륙제일검은 이제 자신이다.
“허…….”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실에 한숨 같은 헛웃음을 짓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 제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염치 불고하고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검혼을 꺾은 검을 잠깐이나마 견식할 수 있다면 무궁한 영광일 것입니다.”
아으으.
닭살이 돋을 정도로 과한 아부 같은 말.
순간적으로 손이 죄 오그라들 뻔했다. 거기다 그 말을 하는 이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이내 착잡함이 묻어나는 제라드의 표정과 상기된 제이의 얼굴, 그리고 전장의 변수에 대한 통제를 원했던 애초에 의도가 맞물리며 로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날.
로건은 수년 전 검혼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한 수를 그대로 재현해 제이에게 보여 주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그가 보여 준 것은 정말로 오러마스터에 권능에 한없이 가까운 ‘진짜’ 소울블레이드라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동경을 표하는 천재기사, 하지만 어쩌면 훗날 적이 될지도 모르는 기사에게 새로운 지향점이, 혹은 거대한 장벽이 될 수도 있는 수를 영혼에 새겨 준 것이다.
그 결과.
동왕부의 숨은 칼날, 제이 펄슨은 그날부터 꼬박 하루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위였습니다. 로건 왕 역시 제 또래일 텐데.”
제이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감탄으로 제라드의 표정을 복잡하게 바꿔 놓았다.
그렇게 전(前) 동익왕과 그 호위가 신(新) 대륙제일검의 무위에 경악하고 탄복할 무렵.
황제군이 맥라인의 국경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카일 성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