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1)
41화
“뭐라고?”
대지의 마탑 장로, 클레이튼의 살벌한 눈빛에 명령을 전달하러 온 하급 마법사의 목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릭 님 이하 제자분들 열 명 모두 차출이라고…… 히익! 저, 저는 그냥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장로님!”
살벌한 인상 탓에 탑에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도 웃을 수 있는 이들은 제자들뿐이라, 평소에 가능한 한 웃으려고 애쓰는 클레이튼은 하급 마법사의 반응을 보며 치솟는 살기를 간신히 다스렸다.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지. 탑주, 이 양반이 끝까지…….”
명령을 전달하는 이 녀석이 무슨 죄일까. 나쁜 건 탑주일 텐데.
클레이튼은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디로? 얼마나?”
그는 탑주가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길 바라며 물었다.
“맥라인 영지라고, 서남부 끝의 시골이랍니다. 공사 기간은 반년…….”
“뭐라?”
나직한 어조와는 달리 급격히 치솟아 오른 마나와 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클레이튼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심중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세에, 안색이 파랗게 질린 하급 마법사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끄으윽. 자, 장로님!”
“흐으음. 이거 미안하게 되었구나.”
클레이튼은 또다시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하급 마법사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그리고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다시 살벌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그래.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니 명령이 정말 거짓 없는 사실이더냐?”
“예, 예! 물론입니다.”
“후우우. 그렇단 말이지.”
클레이튼의 깊은 들숨과 함께 다시 살기가 솟구쳤고, 죄 없는 하급 마법사의 안색만 시시각각 변해 갔다.
“알았으니 자넨 가 보게.”
“가, 감사합니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을 뛰쳐나가는 마법사의 뒷모습에 살벌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물론 그 시선에 담긴 분노는 그 마법사가 아닌 명령을 내린 장본인을 향한 것이었다.
‘맥라인? 들어 본 적도 없는 영지에다가, 무려 반년이라고? 하아.’
그동안은 연속되기는 했지만 그나마 그랑의 근교로 보내는 짧은 기간의 출장이었다.
요즘 그 기간이 조금씩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건 아예 외부로 계속 돌릴 모양새가 아닌가.
모두가 20대의 젊은 나이, 한창 발전해야 할 시기의 제자들이 수련도 못 하고 일만 하게 생겼다.
“레디오스 마탑주. 정말 해보자는 거지?”
모든 것의 시작은 그가 1년 전 5서클에 올라 장로가 되고 난 후부터였다.
불과 50의 나이에 5서클. 나이는 장로(長老)로 보기 어려웠지만, 규정상 장로가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으니까.
전대에서 탑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경쟁자의 제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클레이튼도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몰라도 내 제자들을 건드려? 이렇게까지?”
적당히 참으려 했지만, 이젠 도가 지나쳤다.
마탑을 떠나는 출장 업무를 죄다 제자들에게 떠맡기는 통에 자신의 제자들은 수련이나 연구는커녕, 쉴 시간도 얻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오늘 아침에 돌아왔는데 바로 업무를, 그것도 저런 장거리 출장 업무를 맡기다니.
“이참에 확실히 정리해야겠어.”
대지의 마탑 최연소 장로, 클레이튼이 분노한 기색으로 방을 박차고 나섰다.
* * *
“이분들…… 입니까?”
로건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마탑주를 바라보니 탑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공자를 반년간 도와 드릴 겁니다. 그릭, 자네가 대표 아닌가? 인사하게. 로건 맥라인 공자님이시네. 반년간 자네의 고용주가 될 분이지.”
“후우우. 3서클 마법사 그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 명의 마법사를 대표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서른이나 될까 싶은 젊은 마법사의 입에서 긴 한숨과 함께 간단한 인사가 나왔다.
다른 모든 것보다 그의 눈 아래 짙게 드리워진 그늘과 파리한 안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뒤에 자리한 이들도 다 비슷한 몰골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극도로 피로에 절어 있는 모습.
“로건 맥라인입니다.”
일단은 통성명을 나누고 젊은 마법사들을 잠시 내보낸 뒤, 로건은 찡그린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친구들인데요, 탑주님? 정말 저 사람들 맞습니까?”
“저래 보여도 우리 탑에서 가장 공사 경험이 많은 젊은 인재들입니다. 맡은 역할은 제대로 해낼 것입니다.”
“흐음…….”
“지금은 좀 피곤한 모양이지만 저 친구들이 우리 마탑의 스페셜리스트들입니다. 공사에 특화된. 하하.”
공사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
마법사가 아닌 로건도 그 말을 듣고 좋아할 마법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마탑의 제자들을 깎아내리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조금 전 본 젊은 마법사들의 우울한 표정을 떠올린 로건의 조금은 황당한 시선이 마탑주를 향했지만, 마탑주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확실히 능력은 있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만.”
도리어 그 마법사들을 칭찬하는 말에 탑주의 인상이 조금 굳어졌다.
“하하. 그렇지요. 능력 있는 친구들이지요. 능력 있는…….”
영혼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탑주의 칭찬을 들으며, 로건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거래 자체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 월 120만 골드. 붕괴 스크롤 120장과 열 명의 마법사 지원.
세 시간의 실랑이 끝에 그 금액을 말할 때 레디오스의 얼굴은 거의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상 마법사 지원 비용을 몽땅 깎아 버린 격이었다.
로건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거래였으나, 소개받은 피곤한 마법사들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뛰어나 보여서 오히려 약간 찜찜했다.
로건의 감각이 읽어 낸 이 마법사들의 수준은 무려…….
‘거의 3서클 마스터급의 젊은 마법사와 2서클 익스퍼트, 마스터급 아홉 명이라니.’
게다가 전부 이십 대, 어느 마탑에 가든 촉망받는 인재가 될 만한 재원들이었다.
이런 이들을 헐값에 밖으로 돌린다고? 그것도 반감을 사 가면서?
당연히 자꾸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자, 여기 계약서에 명시했습니다.”
쾅.
그 망설임이 느껴졌을까, 마탑주가 자신의 인장까지 찍어 서둘러 계약서를 내밀었다.
잉크조차 마르지 않은 계약서에는 어느새 합의한 조건과 더불어 마탑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마치 이래도 안 할 거냐고 묻는 듯한 웃음과 함께.
그 모습이 더욱 수상해 보여 로건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조건이 좋지?’
로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기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린 문밖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주! 저와 얘기 좀 하십시다.”
목소리보다 더욱 차가운 인상의 각진 얼굴, 부리부리한 눈과 거칠게 난 무성한 수염.
거기에 오른쪽 이마에서 왼쪽 입술 위까지 그어진 흉터는 마법사라기보다는 백전을 거친 용병, 아니 살인마의 얼굴 같았다.
더구나 로브에 가려진 거대한 체격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찬 근육으로 꽉 채워져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로브가 아닌 갑옷을 입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클레이튼?”
레디오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당황이 묻어 나오고, 장년인이 열어젖힌 방문 뒤로 그를 말리는 젊은 마법사들이 보였다.
“스승님!”
“스승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마탑주의 넓은 방 안이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지는데, 로건은 새로 등장한 마법사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5서클!’
로건의 감각에 그의 심장에 자리한 황토색에 가까운 다섯 개의 서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탑주의 뒤에 있던 로메룬이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움츠러드는 것이 연쇄 살인마 같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탑주는 그저 가볍게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클레이튼 장로. 손님이 있는 곳이네. 이야기는 일이 끝난 다음에 하지.”
“그 일이 제 제자들 이야기 아닙니까. 저는 지금 해야겠습니다.”
“……클레이튼 장로. 정말 손님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싶은가?”
“부끄러운 꼴은 탑주님께서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탑의 미래인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밖으로 돌리면서…….”
“그만!”
폐부를 찌르는 듯한 클레이튼의 냉철한 일침에 레디오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한차례 로건을 바라본 그는 다시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모두가 마탑의 이익을 위한 일이야. 자네 제자들만큼 일 잘하는 애들이 또 있나?”
“그러니까 제 말은 왜 내 제자들 ‘만’! 힘든 일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도 오늘은 방금 돌아왔는데 말이죠.”
비수 같은 눈빛이 날아들었지만 레디오스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허! 마탑을 위해서라니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 모르나?! 다 이들을 위한 거야!”
“장로인 내게는 직접 명령할 권한이 없어서 내 제자들을 괴롭히는 것 아니구요? 제가 계속 두고 볼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싸움이 길게 이어질 때, 로건은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내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로건은 왜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서가 이리 쉽게 쓰였는지 한 번에 이해했다.
마탑 내부의 갈등이 로건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탑주의 명령을 듣기 싫으면 제자들과 함께 당장 나가도 상관은 없네만.”
“하, 뭐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클레이튼의 분노와 함께 마나가 눈에 보이게 솟구치고, 그에 응답하듯 마탑주의 마나 역시 폭발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같은 황토색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마나가 부딪치며 방 안 전체를 진동시켰다.
‘오우!’
이번 생에 처음 보는 고위마법사 간의 대결은 흥미로울 것 같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저들의 사정을 알게 되자 찜찜한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로건은 빠르게 품 안에서 신분패를 꺼내 계약서의 밑에 찍었다.
쾅!
“자, 이로써 계약은 성립됐습니다. 거기 서 계신 열 분은 저를 따라오시지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던 분위기를 단번에 깨트린 태연한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로건에게로 꽂혔다.
“아! 두 분은……. 뭐, 알아서들 하시구요. 마탑주 바뀌어도 계약은 유효한 거 맞죠?”
하지만 계약서를 흔드는 로건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대치하던 두 마법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커흠. 손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군요. 좋습니다. 스크롤은 완성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탑주. 제 말 안 끝났습니다!”
“클레이튼 장로! 지금 대지의 마탑 공인 계약에 억지를 쓰겠다는 거요? 본인의 신분을 자각하시오!”
갑자기 끼어든 로메룬의 말에 클레이튼이 불길이라도 쏟아 낼 것 같은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클레이튼은 여전히 분한 듯 얼굴이 파르르 떨렸지만, 어쩔 수 없이 시선을 거두며 한발 물러섰다.
그런 그를 보며 탑주와 로메룬이 웃음을 짓는데, 클레이튼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좋소! 그렇다면 나도 제자들을 따라가겠소이다.”
“클레이튼!”
“마탑의 체면을 무시하고 장로가 공사장을 따라다니겠다는 말인가!”
“마탑의 체면보다 내 제자들이 먼저지요! 어떤 무도한 작자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는 내 새끼들, 내가 따라가서 일 빨리 끝내고 쉬게 만들겠습니다.”
“정말 제멋대로군. 그게 자네 마음대로…….”
“나는 마탑의 장로로서 탑의 명운이 걸린 일이 아닌 바에야 거취의 자유가 있소이다. 잊으셨소이까?”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뭐 원하시는 대로 하시게. 5서클 마법사가 공사라니.”
차가운 시선이 오간 마탑주와 장로의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저기…… 두 분? 저는 5서클 마법사를 고용할 생각이 없는데요?”
로건의 말에 다시 마법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공사에 굳이 5서클 마법사가 왜 필요해. 돈 낭비야.’
5서클 이상의 마법사 인건비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묵시적으로 기본 100만에서 시작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는데, 로건은 그런 끔찍한 돈 낭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절대 안 돼!’
로건이 무슨 말이라도 단칼에 끊어 낼 준비를 하며 마음을 굳건히 다잡을 때였다.
“나는 그냥 내 제자들의 일을 도우려는 거요. 따로 돈을 받을 생각은 없소이다. 그저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도록 협조할 생각이오.”
천상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황홀한 한마디에 로건은 즉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장로님. 모실 마차는 어떤 형태가 좋으실까요?”
그 급격한 태도 변화에 클레이튼의 살벌한 얼굴마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평범한 것이면 충분하오, 공자.”
“최대한 편안히 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누가 고용주고 누가 고용인인지.
모두가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로건은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싸! 최고급 인력을 공짜로!’
5서클 마법사라면 사실상 원 목적이었던 붕괴 스크롤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이어진 클레이튼의 말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시오. 제자들이 몸은 추스르고 출발을 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도 정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마탑과의 계약은 대박을 터트렸고, 로건의 웃음은 가실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