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13)
413화- 우와아아아아!
지평선을 새까맣게 메우며 밀려오는 제국군의 모습은 하먼에게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어차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곳도 아닌 바에야, 여차하면 노비엔스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며칠간 쭉 그래 온 것처럼 ‘목표’와의 만남을 되새기고 있었다.
검혼을 죽였다는 젊은 천재의 소문은 결코 과장되지 않은 것 같았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결과만으로는 호각. 하지만 9대신의 성물 중 하나인 리첸티아의 힘이 더해진다면 자신이 승리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상대의 태도가 좀 신경이 쓰였다.
‘생각보다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었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이 전쟁에 파견을 온 것은 신전의 무리수였다.
그 역시 신탁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거부했을 일.
그러나 맥라인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했어야 할 일인데, 왜 그리 덤덤한 표정이었을까.
‘아니, 오히려 약간 경계하는 것도 같았는데…….’
똑같이 검혼을 패배시켰던 기사로서의 경쟁심에서 기인한 태도라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찜찜했다.
게다가…….
– 지브릭 카셀. 고대에 마도성자라는 이름으로 신의 종을 자처하여 인류를 지배한 자. 그리고 결국 신께 반기를 들어 토벌된 대악마의 이름입니다.
– 그리고 그 지브릭 카셀의 후손이자, 그 영혼을 이어받을 존재로 점지된 것이 로건 맥라인입니다. 그러니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교황 성하께 내려온 신탁에 따르면, 로건 맥라인은 전대 교황을 세뇌했던 그 무도한 마법사들과 같은 부류의 적이었다.
신탁은 신들께서 내린 지상의 명령이자 진리인바.
‘분명 흔적이 보여야 할 터인데.’
하지만 정작 직접 만나 본 로건 맥라인은 맥라인의 태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태양 같은 포스를 품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고 뜨겁게 타오르는, 한 점의 불결함조차 허용하지 않을 듯한 포스의 정수.
아무리 봐도 대악마의 후손이나, 마기에 잠식될 예비 악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그 대악마라는 존재가 그만한 포스를 가진 자도 악마로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답답한 마음에 든 생각이었다.
그런데…….
– 그 생각이 옳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긍정하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 순간 하먼은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주변의 기사와 병사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들려온 신의 목소리였으니까.
“오오, 나의 주이시여.”
하늘과 자유의 신, 아리아의 성물 리첸티아(Licentia).
목에 건 성물을 쥔 하먼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성물을 하사받은 이래, 신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제 아홉 번째. 하지만 이토록 또렷이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신의 종으로서 영혼을 울리는 성스러운 파장을 직접 겪었는데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목소리를 다시 놓치기 전에 하먼은 진심을 담은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종이 간절히 청하나이다. 진리를 내려 주시옵소서.”
양 무릎을 꿇은 채 왼손을 곧추세우고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는 성호.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은은한 신성력이 그의 주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지브릭은 설령 신인(神人)의 영혼이라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
– 그러니 나의 종이여, 나의 검이여. 그때가 오기 전에 놈의 화신을 베어라.
그 목소리는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퍼지며 그의 영혼에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하먼은 그제야 신이 자신을 지상으로의 통로로 삼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아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이 신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느낌.
신의 종을 자처하는 사제들에게는 법열(法悅)에 준하는 쾌감.
……이어야 했을 텐데.
“으음.”
어째서인지 하먼은 자기도 모르게 불쾌한 신음을 흘렸다.
사제이기 전에 오러마스터의 경지, 영혼을 다루는 지고한 경지에 반쯤 다다랐기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혼이 물들어 가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신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 감히!!!
신의 분노한 목소리가 영혼의 저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 오랜 세월 세뇌되다시피 각인된 신앙심이 다시금 하먼의 거부감을 잠재우고, 그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죄송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금 경전을 읊조리자, 영혼 저편에서 분노하던 신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 인간은 어리석고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 신의 자비로 너를 용서하노라.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 임무를 명심하라!
우우웅.
준엄한 호통과 함께 성스러운 파장이 폭발하듯 자신의 영혼을 물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영혼의 저편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사라져 가며 신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흡사 큰 힘을 쓴 마법사나 기사가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또 무슨 불경한 생각을.’
하지만 하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어지는 신의 파장, 그 여파를 자신도 모르게 끊어 버렸다.
영혼이 절반 이상 잠식되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일어난 방어 기제였고, 영혼의 힘을 일부나마 다룰 수 있게 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허……!?”
그것이 ‘자신’을 지켜 냈음을.
신이 자신의 영혼을 삼키기 직전에 간신히 자아를 유지하게 되었음을.
절반 넘게 ‘먹혔’다면, 그 후에는 아무리 발악해도 어쩔 수 없이 서서히 잠식당해 갔을 것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께서…… 어찌?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
하먼 킬러브루라는 한 인간이 평생을 몸 바쳐 온 세상과 사상, 단체에 대한 믿음이 근간부터 흔들렸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밀어닥쳤다.
전면에서 밀려오고 있는 제국군의 고함과, 그 군대를 향해 폭격을 퍼붓는 전장의 굉음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먼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그저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그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붉은 눈이 살짝 일그러질 정도로.
* * *
– 제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더 이상 제가 아닐 테니, 그때는 저를 적으로 간주하세요.
일리아가 빅토르에게 전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말부터가 너무 추상적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성녀가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놀리기 위한 말장난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립으로부터 실제로 성녀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은 후에는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 저는 신검의 칼날이 폐하의 등 뒤를 향할까 두렵습니다.
적이 된다는 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필립의 걱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신검은 그저 맥라인의 원군일 뿐이었다. 그것도 성국과 제국 간 2차 분란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원군.
실제로 현 상황은 ‘맥라인 출신의 교황이자 성녀가 비밀리에 성국 최강의 검을 지원해 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일 뿐이지.’
그 중요도에 비하면 성녀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증언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성녀께서는 저에게…… 흡, 죄송합니다, 폐하. 그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믿어 주십시오.
성녀의 ‘마지막’ 부탁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그저 믿어 달라고만 하던 빅토르의 서글픈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그 얘길 진지하게 고려하자면 지금 참전한 신검도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하면, 억지로나마 끼워 맞춰지는 조각이 하나 더 생겼다.
–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검은 뱀을 소탕하고, 마도성자의 후예들을 말살하라!
신탁이 내려왔다며 새삼스레 카셀 마탑의 토벌을 명령한 성녀.
신전에서는 그 신탁을 빌미로 총력을 동원하여 검은 뱀을 쫓기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 했다.
솔직히 지금의 맥라인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카셀 마탑이 서방에서 벌인 수작을 생각해 보면 신들이 관여할 만도 했다.
그로 인해 전쟁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테니까.
‘그 상황에서 만약 내가, 맥라인의 핏줄이 지브릭 카셀의 후예라는 것을 성녀가 안다면? 아니, 그 신탁이라는 것이 신들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 했으니 신들이 알렸다면?’
가정에 가정을 더하는 무리한 추론이었다.
애초에 지브릭의 피를 이었을 뿐, 카셀 마탑의 존재조차 몰랐던 맥라인 가문이다. 자신도 가짜 성검 바니타스를 통해 마도성자의 혼을 접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일이었다.
‘……9대신도 그걸 모르고 있을까?’
지브릭의 영혼을 통해 9대신이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신은 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조금 바꾸면, ‘신들이 지브릭 카셀의 핏줄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멸절하기로 작정했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갑자기.
과한 추론에 당위성도 생각하지 않은 무리수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일리아가 맥라인을 적대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리아가 과거를 끊어 내겠다는 제스처일 수도 있지. 내게 보내는 마지막 신호일지도 모르고.’
문득 검신유록에서 보았던 ‘사도’의 존재가 생각났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성국의 전설 속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고 신의 뜻을 퍼트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다 간 성인들뿐. 제국에 핍박받던 시절에 강림한 사도조차 전쟁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조차도 무려 4백 년이 넘은 이야기였다.
– 염원의 힘도, 운명의 힘도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기만 할 터이니, 신들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 것이다.
결정적으로, 검신유록에 남아 있던 말이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멈춰 세웠다.
피식.
‘나도 참 상상력이 풍부하군.’
로건은 이 상상이 실제일 가능성은 지극히 작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번이고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은 ‘맥라인 출신의 교황이자 성녀가 비밀리에 성국 최강의 검을 지원해 준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건은 하먼에게 어찌 보면 상당한 무리한 작전을 요구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작전’의 시작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만약 그가 적이라면 처음부터 알 수 있을 터였다.
다행히 하먼은 흔쾌히 수락했다.
한결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찜찜함에 그를 주시하던 차였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성벽 한구석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 본 적 없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백색 기운의 정체가 신성력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 신성력의 폭발을 하먼이 ‘작전’을 시작하는 신호로 받아들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하먼은 그 이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다시금 쿼렐의 비가 새까맣게 쏟아지고, 리베라티오가 폭음을 일으키고.
그 공격이 바람의 장벽에 막혀 8할 이상이 엇나가기 시작했을 때.
심지어 제국 기사들이 다시 성벽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그때까지도 하먼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쪽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