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2)
42화다음 날 정오, 그랑의 서문 앞.
“오셨습니까, 로건 님.”
“아. 어제보다는 덜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제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
“그게 왜 네가 죄송할 일이냐. 망할 탑주의 문제지.”
쓴웃음을 짓는 그릭의 뒤에서 그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클레이튼이 불쑥 나타나 말을 가로챘다.
“공자, 쓸데없는 인사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갑시다. 공자도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않소.”
“스승님! 크흐흠. 로건 님, 죄송합니다. 스승님께서 원래 말을 좀 직설적으로 하시는 분이라.”
“왜! 또 뭐? 내가 틀린 말 했느냐?”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아우.”
그릭이 손짓하자 가만히 있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클레이튼의 로브를 잡아 뒤로 끌었다.
클레이튼의 송충이 같은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고,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끄응. 알았다, 이 녀석들아. 놔! 놓으라고. 아무 말 안 할 테니.”
투덜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릭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스승님께서 예의를 따지지 않는 편이라……. 표현은 좀 거칠어도 마음은 따뜻하신 분입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음…….”
마법사는 희귀한 만큼 기사보다 더 자부심이 강한 것이 일반적이라, 평민이라 한들 자신을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하여 시골 귀족쯤은 우습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어제 마탑에서 본 접수원 녀석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그릭을 비롯한 이들에게선 그런 오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해서 웬만한 걸 다 내려놓은 듯한 느낌.
그들의 고용주인 로건의 입장에서는 그저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짜로 따라와 준 최고급 인력, 클레이튼의 말투 정도가 뭐가 문제일까.
“괜찮습니다. 저야 마탑의 장로님을 모시는 것 자체가 영광이죠.”
로건은 환한 미소로 그릭의 근심을 날려 주었다.
로건이 클레이튼과 그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마차는 세 대였다.
모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여유 있게 앉아 갈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사두마차들이니 넉넉하게 나눠서 움직여도 될 것이다.
거기다 무려 5천 골드를 투자해 그랑의 운수 길드에서 경력 있는 마부들을 고용하고, 야영에 필요한 식자재와 천막까지 준비했다.
로건이 마법사들에 대해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부분이었고, 도착할 때까지 먹고 자는 일 외에는 계속 달리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세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고급 세팅 속에서도 불퉁한 표정의 클레이튼은 ‘편한 환경이니 수련을 해라’라는 면목으로 연신 제자들을 닦달했다.
로건의 입장에서는 괜한 억지나 강요로 보였지만, 그 제자들은 연신 웃는 얼굴로 클레이튼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살인마 대장에게 살기 위해 아부 떠는 부하들 같은데.’
보이는 모양새는 딱 그랬지만 제자들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에는 대부분 진심이 느껴졌다.
잠시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로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게 뭐냐. 난 내 일에나 집중해야지.’
화르륵.
모닥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잡념을 떨쳐 낸 로건은 다시 마음속으로 검공의 모습을 되새겼다.
정확히는 그가 검술을 펼치던 모습을.
검술서를 집필할 때도 조금씩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명확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고즈넉한 별밤에 야영을 준비하는 이 시간만큼 집중이 잘될 때가 없었으니까.
‘여기서 이렇게…….’
그날 검공이 보여 준 것은 중압검만이 아니었다.
그저 잡고만 있을 뿐일 로건의 검에서 일순 황금빛이 치솟아 오르며 유형의 검날을 형성했다.
외부의 기세와 포스가 융합된 황금빛 칼날은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빛나던 황금빛은 더는 없었다.
“포스가 유형화된 칼날인가…….”
이 모습을 검공이 보았다면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포스가 집중, 압축되어 새로운 권능으로 거듭나는 것이 오러.
검공이 보여 준 수법은 그 오러의 약화 단계에 불과했지만, 본디 로건의 수준에서는 흉내도 불가능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법이 진화한 포스의 힘을 빌려, 아직은 부족한 로건의 손에서 피어났다.
치직. 파지직.
물론 아직은 금세 형태가 무너져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성공했다…….”
주변을 생각해서 소리 내 기쁨을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기뻤다.
최상급기사나 구현할 수 있다는 포스블레이드를 일시적으로나마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우웅.
‘증폭, 집중, 분산.’
다시금 칼에서 뿜어진 기세가 모닥불의 불꽃을 희롱하며 둥글게 뭉치고, 길게 뽑아내는 등 다양한 변화를 강요했다.
중압감의 기본이 되는 기세의 압박.
이것은 검공의 말대로 확실히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신검의 비전과는 달리 기력의 소모도 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중압검.
그 비전에 집중해 온 며칠은 복잡한 미래에 관한 생각도 잠시 접어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취도 빨랐고, 당장이라도 써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도 아니고…….’
손안에 무기가 생겼으니 휘둘러 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감정이었다.
회귀해서 젊어진 육체만큼 정신도 어려진 것 같은 느낌을 요즘 들어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정신 같은 것은 초인급 이상의 강자들이나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전생의 한을 씻어 내고 있는 현생의 삶이 만족스러운 만큼, 노년의 용병이자 독립군이었던 로건은 사라지고 맥라인 가문의 장자 로건 맥라인이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만 잊지 않으면 돼. 제국 전쟁. 그리고 내전.’
밤인데도 불구하고 그리 춥지 않은 기온이 슬슬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했지만 로건의 마음은 서늘해지고 있었다.
‘이제 1년 반 남았다.’
왕의 죽음. 그리고 내전의 시작.
그때까지 철저히 준비해서 기회를 잡아야 했다.
‘한순간에 날아올라야 한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못할 때. 그러자면…….’
깊어 가는 어둠만큼 고민이 더 깊어져만 갔다.
“커흠. 대단한 성취요, 공자.”
그때, 로건의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클레이튼 님?”
“우연히 멋진 광경을 보았소이다.”
“아, 아닙니다. 별것 아닌 재주일 뿐이지요.”
“내 포스유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방금 공자가 보여 준 재주가 그 나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이다.”
“……과찬이십니다.”
클레이튼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아직 완전히 아군이랄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위 상황도 신경 쓰지 않고 밑천을 보였다는 생각에 로건이 속으로 자책했다.
“흠흠. 어제 일로 내가 마음이 편치 못해서 태도가 좀 모났소이다. 거칠게 살아와서 예법을 잘 모르니, 잘난 공자께서 좀 이해해 주시오.”
사과인지 시비인지 모를 말을 툭 던진 클레이튼이 그대로 모닥불 옆에 주저앉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저 녀석들은 괜히 스승 잘못 만나서 생고생만 한 녀석들이오. 같이 있을 때만이라도 최대한 가르쳐 주고 싶소이다.”
“이미 그러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왜 저한테 그런 말을?”
“영지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해도, 내 제자들을 교대로 쉬게 만들고 싶소이다. 그 시간에 조금씩이라도 수련할 수 있게. 그만큼 내가 더 일할 테니, 이해해 주실 수 있겠소?”
무뚝뚝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로건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고개를 끄덕이는데.
‘음?’
문득 클레이튼의 주변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우웅.
미약하게 기감을 건드리는 느낌에 심장의 코어가 진동하면서, 이내 희미한 마나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클레이튼에게서 비롯된 황토색 마나가 땅을 타고 흘러 들어가, 제자들이 잠든 천막 부근만을 유려하게 감싸고 있었다.
‘마법…… 이렇게 은밀하게?’
어떤 마법인지는 몰라도 그 은밀함에 한번 놀라고, 그 마나 안에 담긴 따뜻한 느낌에 또 한 번 놀랐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클레이튼의 마나가 각 천막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제야 클레이튼의 이마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작은 땀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침보다 더욱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도.
단순히 더위를 많이 탄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로건은 감탄이 나와 굳이 하지 않으려던 말까지 입 밖으로 꺼냈다.
“제자 분들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허허. 명색이 스승이니 기본만 하는 거지요.”
“에이. 제자분들을 위해 마탑주님하고 싸우기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
“커험. 그것보다도 애초에 탑주의 행실이…….”
지금도 제자들의 천막에 쏟아지는 따뜻한 느낌의 마나와는 전혀 다른 딱딱한 핑계였다.
하지만 그 모습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로건은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지루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각다각.
“대, 대공자님!”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너도 얼른 수그려!”
영지에 도착하자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영지민들의 반응이 로건을 반겨 주었다.
전쟁 직후의 환호성은 없었지만, 일단 그를 보는 순간 공포에 질리거나 멀리서부터 도망가는 영지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로건은 확연하게 나아진 평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들 중 상태가 좋아 보이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 배고파.”
“조금만 참아. 엄마가 밭일 나가서 감자 챙겨올게.”
“아빠는?”
“아빠는……. 흐읍. 아빠 백 밤 자면 온다고 했지? 아들, 몇 밤 잤어?”
“몰라. 아빠 미워. 나 배고픈데…….”
초췌해 보이는 모자의 모습과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어린아이의 투정에 로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직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한 곳에 궁핍함이 겹쳐진 상황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순간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어두운 표정의 아낙네와 어리둥절한 아이의 모습은 로건의 가슴에 묵직한 짐을 남겼다.
‘역시나…….’
로건은 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척박한 맥라인 영지의 사정을 고려해 다른 영지보다 세율을 낮췄다지만, 그래도 3할의 세율은 가뜩이나 힘겨운 맥라인 영지민들의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식량이 부족할 시기라는 것이 새삼스레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수단을 가져왔지만 아직은 넘어야 할 벽이 많았다.
‘과연 아버지가 허락하실까?’
자신이 생각한 해결책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그는 전생에 그것이 만들어 낸 결과를 몇 번이나 보아 왔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였다.
‘영지민을 동원해 공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고민하며 내성에 들어서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설득이 필요한 또 한 명의 사람을 마주쳤다.
“잘~ 놀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저는 참 힘들게 지냈는데.”
아직도 코에 솜뭉치를 쑤셔 넣고 있는 릭이 퀭한 얼굴과 함께 마치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인사했다.
“아…… 하하. 릭 이 녀석. 그래, 내가 왔다. 뒤에 이분들은…….”
“몸에서 구린내가 가시질 않아요. 마주치는 하녀들마다 코를 잡고 도망갑니다. 공자님, 저 이제 장가 못 갈 것 같아요.”
불타오르는 눈을 한 릭은 로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자기 할 말만 쏟아 냈다.
그 독백 같은 중얼거림에 어려 있는 날카로운 진심에 로건이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네?! 언제까지 제가 그 카록……. 읍?!”
로건이 번개같이 릭의 입을 막고 귓가에 속삭였다.
“주당 50골드 추가. 콜?”
도리도리.
부릅.
“100골드 추가. 더는 없다.”
그제야 거칠게 반항하던 릭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안심하며 놈의 입에서 손을 치우는데.
“카악, 퉤.”
심히 불량해 보이는 태도와 여전히 원망 가득한 눈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릭. 일단 손님들을 모셔라. 나는 아버지를 뵙고 올 테니. 그 후에 어디에 지내실지 결정될 거야.”
“네에, 네에. 저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합죠. 누구는 실컷 놀다 오고. 누구는 똥내 나는 곳에서…….”
“적당히 해라. 더는 안 봐준다.”
“크흐흠. 손님분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급변하는 녀석의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나오며,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이상한 방향에서 가슴에 와닿았다.
로건은 바로 직전까지 하던 고민이 왜인지 하찮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언제 논리로 설득했냐. 안 되면 억지로 해야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클레이튼 님.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아버지를 뵙고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도 같이 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큰돈이 들어간 일을 하는데…….”
“아니, 아직 여러분은 제 손님일 뿐입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리둥절한 마법사 일행을 남겨 둔 채, 로건은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성의 안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