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24)
424화
“언니, 성녀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소문에는 진짜 여신님 같다던데.”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생김새의 소녀, 에블린의 말에 카산드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아야야! 언니!”
“으이구, 너는 어째 기사가 되어서도 태도가 변하질 않니? 쓸데없는 데엔 관심 꺼. 우리는 빅토르 경의 명령만 따르면 되니까.”
“아니,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건데……. 씨잉.”
카산드라의 타박에 에블린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태도에선 불과 얼마 전까지 피 터지게 싸웠던 나라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긴장감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맨날 나만…….”
그것을 보며 카산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남부 요새에서 네 손에 죽은 제국 기사만 수십 명은 될 텐데.
“제발 긴장 좀 하자, 에블린.”
“치이……. 그래도 제가 이래서 이번 작전에 가장 알맞다고 들었거든요!”
“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 카산드라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 말괄량이 같은 애가 불과 3년 만에 포스를 각성해 관련자 모두를 놀라게 만든 천재라는 것을 누가 믿을까.
겉으로 보면 그냥 작고 귀여운 소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자치고는 큰 키에 단련된 티가 역력한 자신도 이 작전에 발탁되었다. 그 소녀가 가장 잘 따르는 선배이자, 유일하게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물론, 둘 다 10대 후반과 20대 중반으로 나이가 적합하다는 것도 주효했지만.
“그런데 맥락은 알겠지만, 교황 성하의 시녀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울까요?”
“그분이 말씀하신 거니 되겠지.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각오하고 있지?”
“……네.”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에블린도 장난기를 보이지 않았다.
성녀이자 교황의 전담 시녀가 된 바로 당일에 성녀의 거처에서 시녀와 시종들을 전부 내보내야 한다.
말로 안 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그것도 성녀 모르게.
성기사들은 그날 그분의 지시로 다른 곳에서 근무하기로 했다지만 살이 떨릴 만한 일이었다.
“언니, 우리 그러다 신벌 받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신들께서 우리 폐하를 아끼시는데. 폐하의 명령이라잖아.”
“소문에 그 폐하께서…….”
“큰일 날 소리! 엉뚱한 말 하지 마. 그분은 신이 내린 영웅이니까.”
에블린이 최근 이곳 제국에까지 자자한 소문을 언급하려 하자 카산드라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그, 그렇겠죠?”
“그럼. 너와 나도 그분 덕에 인생이 바뀐 거야. 잊지 마. 이것도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해야 할 일이야.”
“네!”
에블린이 다시금 결연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카산드라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섰다.
“이만 자자. 내일부터는 다시 강행군이야.”
“……네, 언니도 잘 자요.”
그 대답을 들으며 카산드라도 자리에 누웠지만, 그녀는 오히려 불안한 마음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정말 소문뿐이겠지.’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가 떠올랐다.
맥라인의 여군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여군 사령관이자 현 왕비인 에일렌과 만난 순간이.
그리고 그때 나온 말들이.
– 혹시 예전에 로건 공자와 알던 사이인가요?
– 예?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귀족분을…….
그 대답은 분명 진실이었지만,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었다. 사실, 지나치듯 로건 맥라인 공자를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으니까.
왜인지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
당시에는 자신이 귀족 공자를 처음 봐서 반한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연인인 디그롬 경을 만나 진짜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하지만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 이후로도 여전히 그런 기시감이 느껴졌다. 먼발치에서 이제는 국왕이 된 그를 볼 때마다 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때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었다.
꿈속에서, 지금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자신과 국왕 폐하가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주먹을 마주쳤다.
– 캐시, 죽지 마라.
– 너도.
흉터 가득한 육체와 그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서 투박한 말로 서로를 위로하던 날들. 그 투쟁하던 날들이…….
‘음? 마음의 상처? 투쟁하던? 뭘?’
문득 떠오른 이상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던 카산드라는 이내 피식 웃으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불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해내야 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은인의 명령을 완수해 낼 것이다.
반드시.
* * * 두두두두.
들판을 질주하는 말들 뒤로, 마차가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마 그 안에 탄 처자들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단순히 멀미하는 수준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이런 질주가 3일 째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난폭한 질주의 와중에도 마부석에는 웬 청년이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뜬 청년은 이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계획대로 되겠습니까?”
들판을 진동하는 말발굽과 마차의 소음을 뚫고 옆에 앉은 중년 사내에게 또렷하게 전달되는 음성.
세밀한 포스 운용을 습관처럼 쓸 수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기예였지만, 목소리를 들은 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지.”
말 그대로 그들 같은 초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성전기사단장은 교단의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연히 내부 인사에도.”
“그걸 이제 와서 묻나?”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 확인하는 겁니다.”
“……관여는 할 수 없지만, 부탁은 할 수 있지. 그리고 지금 노비엔스에 내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네.”
“당신이 잠식당하지 않았다는 걸 저쪽에서 알고 있다면 어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네.”
“신들을 너무 무능하게 보는 것 같은데요.”
“아니지. 그 드높은 자존심을 믿는 거야. 놈들은 ‘절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실패를 말하지 않아.”
“성녀님, 아니 사도가 저 두 사람의 낌새를 눈치챈다면요? 알고 있겠지만, 연기를 기대할 수 없는 출신입니다.”
“그럴 리 없네. 그들은 인간 하나하나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아. 자네 주군 정도라면 모를까.”
반쯤 ‘신’의 영혼을 받아들인 이의 말이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그대로 마부석에 기대듯 머리를 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폭주하고 있는 마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
잘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저 자는 척일 뿐이다.
애써 마법으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면 뭐 하나.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을 저리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으면서.
지금 상대의 모습은 그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중요한 일을 앞둔 지금 시점에선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서 중년 사내, 하먼은 또 말을 걸었다.
“정말 벨 수 있겠나?”
“……해야죠.”
“명심하게. 그분은, 아니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성녀님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에 튀어나온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다. 지금은 고양이 손, 아니 초인의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였으니까.
“명심하게 그것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 땅에 적어도 수십만의 피가 흐르게 될 것임을. 그리고 그 대다수는 자네 왕국의 사람들일 거라는 걸.”
“……잔소리는 그쯤 하시고 말이나 보시죠.”
“읏!”
히이이이잉!
잠깐 신경을 다른 데 쏟은 사이 폭주하던 말들이 얽힐 뻔했다.
황급히 꺼내든 채찍에 어린 은빛 오러가 말들의 진로를 다시 바꾸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부딪쳐 쓰러질 것 같던 말들의 속도가 더욱 올라갔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빅토르는 오러로 말들을 이끄는 하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은발의 여인, 귓가에 들리는 것은 그런 그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꺼낸 말뿐이었다.
– 정말 그렇게 되면…… 경이 절 죽여 주세요.
팔짱을 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질끈 깨문 부르튼 입술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벨 수 있겠냐고?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빅토르는 감은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으니까.
* * * 뚜벅뚜벅.
“돌아오셨습니까, 단장님.”
“원행을 가셨다던데,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신전을 걸어가는 내내, 하먼은 부하들과 시종들의 인사를 끊임없이 받았다.
중앙 신전의 경비가 실로 삼엄하다는 게 새삼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또한, 지키는 자에서 침입자가 되어 보니 주변을 보는 눈이 이렇게나 달라진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을 다 치워야 한다.’
성기사들은 자신의 명령이면 된다. 시종과 시녀들은 내전부장에게 부탁해 심어 놓은 맥라인의 여기사들이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텅 빈 교황의 처소에서 사도를 처리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교황을 시해한 성전기사단장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의미 없는 수십, 수백만의 희생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 개인적인 욕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현혹한 것들. 자신의 영혼을 잠식하려 한 신에게 거하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을 속아 온 대가로 엿을 먹이는 것뿐이니, 신들도 억울하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억울함과 분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우웅.
여전히 목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마물 리첸티아가 또다시 혐오스러운 울림을 발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라 해도, 이미 당사자가 영혼의 힘으로 막아 버린 이상 더 이상 잠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자신은 위대한 경지를 코앞에 두고도 그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로건 왕이 보여 준 그 찬란하던 모습에 벽을 넘을 준비까지 완전히 마쳤음에도.
‘그 대가로 당신들의 일을 망쳐야겠소이다, 아리아.’
하먼은 평생을 섬겨 온 신을 떠올리며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위에 개인적인 복수심이 꽤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긍정했다.
청렴, 결백, 정의, 자비, 그리고 ‘용서’.
그가 추구해 온 인생관의 많은 부분이 아리아의 경전에서 기인한 것이니만큼, 이제 와서 그 가르침을 따르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로건 왕에게 그리 강력히 주장한 것도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복수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아무래도 좋다. 여기까지 왔으니.’
사도를 처리하고 기꺼이 이단자가 되겠다.
그러니 지금의 알현은 무척 중요했다.
지금까진 ‘감히’라는 생각에 가늠할 생각도 못 했지만, 성녀의, 아니 사도의 전투력을 어느 정도는 판단해 놓아야 임무를 무사히 마칠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억울하면 자신의 실패를 아문다에게 알려 보시지, 아리아.’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영혼을 절반 가까이 잠식당한 대가로 아리아의 성격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되었다. 하늘과 자유의 신, 아리아는 절대 그 동료에게 자신의 실패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는 사도를 잃고 신성에 극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것이 아리아가 아니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아문다 역시 사도로 하여금 자신에게 리첸티아를 건넨 책임이 있으니.
‘모두 한통속이다.’
하먼은 활활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숨긴 채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성하께서 알현을 허가하셨습니다.”
하먼은 오랜만에, 그리고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아문다의 화신을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