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25)
425화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하먼 경.”
하먼이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무릎을 꿇자, 일리아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절반 정도군요. 이거 좀 의외인데.”
“예?”
무슨 말인지 짐작하면서도, 하먼은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자 성녀가 바로 말을 돌렸다.
“아니, 아닙니다. 통신으로 보고받긴 했지만, 경의 입으로 다시 확실히 듣고 싶군요. 소문하고는 좀 달라서…….”
눈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하먼은 바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제 검이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소문은 중태라지만,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 거짓 보고에 성녀가 웃음을 보였다.
“흠. 수고했어요, 하먼 단장.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 텐데.”
“아닙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일에 어찌 망설임이 있겠습니까.”
수없이 생각했던 말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마도 평생에 걸쳐 쌓인 습관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성녀 역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덕분에 수고를 줄였군요.”
“예?”
“맥라인에 마수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알고 있겠지요?”
“아, 예. 저도 들었습니다만…….”
지척에서 사도의 격을 알아보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하먼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문을 표하는데, 성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로건 맥라인이 다루는 짐승이 신수가 아니라 마수라더군요. 만약 일이 틀어지면 그 이유로 성전을 선포하려 했는데, 다행히 미뤄도 되겠어요.”
“……미루……신다고요?”
취소가 아니라?
하먼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감정을 담아 반문했다.
그러자 성녀가 오히려 의아해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아직 아리아의 뜻이 단장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죄,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하여…….”
“이해합니다, 바빴을 테니까요. 하지만 돌아오셨으니 좀 더 기도에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에 충실하라.
그 말이 축객령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먼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좀 전에 들었던 말, 그 한없이 불길한 말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직 성녀, 아니 사도의 전투력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예. 물론입니다, 성하. 그런데 정말 성전을 해야 하는 것인지요?”
그 물음에 일리아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귀찮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답은 쉽게 나왔다.
“‘버림받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단장?”
“……아, 예. 들은 적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세대에 한두 명씩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이가 나타난다고…….”
“그런 규격 외들이야 가끔 나오는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지만, 지금 그 왕국의 경우는 달라요.”
불량품이라는 단어에 이번에는 하먼의 입꼬리가 잠시 떨렸다. 이미 불신이 가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신이 인간을 어찌 보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으니까.
그런 하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일리아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지금 맥라인에선 그럼 버림받은 자들이 대량 발생하고 있지요.”
“아!?”
“그리고 그 모든 게 로건 맥라인, 그 악마의 종자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예?”
“운명을 바꾸는 자라고도 하지요. 이번에는 그런 놈이 하필 지브릭 카셀의 후손이라 변수가 너무 커졌지만…….”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던 사도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충격적인 말을 뱉어 냈다.
“고대에도 가끔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당시에 강림한 사도가 성전을 일으켜 그 버림받은 자들의 씨를 말려 왔었지요. 운명을 올바르게 되돌리기 위해.”
“!!?”
부릅떠진 눈에 절로 벌어진 입을 어쩔 수가 없었다. 표정을 관리하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니까.
‘화, 확실히 사도가 나타났을 때 성전의 기록도 있긴 했지만…….’
그게 그런 뜻일 줄이야.
새삼 소름이 끼쳤다.
일리아는 그런 하먼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성전은 일어나야 합니다, 반드시.”
당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말입니까.
하먼은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진심의 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그렇게 조용히 수긍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은 기어코 한마디를 토해 내고 말았다.
“……무고한 신민들의 희생이 크지 않겠습니까?”
이런.
스스로 말을 해 놓고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비위를 맞춰야 할 때였는데.’
자신을 쏘아보는 일리아, 아니 사도의 시선을 느낀 하먼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책하는데, 잠깐의 침묵 뒤에 그녀가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아주 오래전, 검신이라는 광오한 이름으로 불리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도 운명을 바꾸는 자였죠.”
“예?”
“지브릭의 잔재를 처리하기 위해, 신들은 그를 지켜보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하먼으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큰 착각이었죠. 그자를 지우고 비틀린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그 후손들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당신은 아직 모릅니다.”
당신은 아직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이것들아.’
자신은 신민들의 희생을 말했건만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사도에게, 신들에게 사람들의 희생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다시금 그들에 대한 배신감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하먼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물론, 겉으로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 그를 보며 사도는 피식 웃었다.
“아직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만, 곧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시길.”
“예, 그러겠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기도하는 일은 평생 다시 없을 것이다.
하먼이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꺼내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녀가 또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아, 그리고 원행을 준비해 주십시오.”
“예?”
“지브릭의 화신을 처리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놈들이 남아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성물을 찾아 신께 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그 말에 하먼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필?
지금?
그 속셈이 뭔지도 예측이 되었지만, 하먼은 애써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 성물을 말입니까?”
눈가가 떨리고 입꼬리가 경직된 게 느껴졌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하먼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다행히도 성녀는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흠. 당황스럽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9대신의 성물이 여러 신전에 흩어져 있는 이유를 저 역시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힘이 필요할 때니까요.”
너희들한테 필요하겠지.
“대륙에 이름 높은 사제님들께서 성물을 사용하시어, 신의 뜻을 실현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렇게 사도를 늘이시겠다?
예상은 했지만, 하필 이때라니.
하먼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노비엔스에도 아직 성물이 두 개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천 결계를 유지하던 세 개의 성물, 그중 하나인 리첸티아(Licentia)는 자신에게 있었다. 나머지 두 개는…….
“단장님께서 맥라인으로 출발하시던 날 플람마(Flamma)는 오스틴 전 교황님께, 테라(Terra)는 자일 사제님께 전해 드렸습니다.”
“예!?”
“놀라시는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만, 단장님을 비롯한 그분들이 성물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시게 된다면 대천 결계보다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아…….”
불(Flamma)과 음식의 신, 아니마의 성물은 그 최고위 사제인 오스틴에게, 흙(Terra)과 죽음의 신, 아드가의 성물은 그 고위 사제인 자일에게 넘어갔다.
교황의 법관으로 유명한 저 센텐티아(Sententia)는 본디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의 성물이고, 자신 역시 하늘과 자유의 신 아리아의 최고위 사제였다.
그간 어렴풋이 짐작했던 사도 강림의 최소 조건을 이제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깨달음이 작금의 상황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설마 벌써 사도가 셋이 된 건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하먼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다른 성물들도 그 주인을 찾아 주시려는 겁니까?”
“그것이 필요한 때이니까요. 대악마 지브릭 카셀의 후예들을 이번에야말로 멸절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신들의 의지입니다.”
그 단호하기까지 한 말에 하먼은 더 이상 부언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원행을 준비해 주십시오. 오스틴 전 교황님과 자일 사제님도 함께하실 겁니다.”
“……예, 성하.”
생각보다 더 서둘러야겠다.
하먼은 그리 생각하며 서둘러 접견실을 돌아 나왔고, 방문 밖에서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치명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읽지를 못했다.’
뜻밖의 얘기에 정신이 팔리기는 했어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성녀가 가진 영혼의 격을 읽지 못했다.
그것이 신의 화신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화신의 격조차도 자신보다 높기 때문일까.
‘후자라면…….’
최악이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황의 원행, 수많은 성기사와 사제들이 호위하고 무수한 행렬이 뒤를 따르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사도를 처리해야 한다.’
하먼은 입술을 짓씹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생각지도 못하게 확인해 봐야 할 이가 둘이나 더 생겼으니까.
* * *
“다행히 오스틴 님과 자일 사제는 아직 잠식당하지 않았네. 내일 밤, 내가 성물을 잠깐 살피고 싶다는 핑계로 그분들께 두 성물을 받아 내겠네. 자네도 나와 함께 가서 바로 거사를 실행하세. 그 후 성물들과 함께 노비엔스에서 사라지면, 우리의 임무가 모두 끝나네.”
하먼의 말을 들은 빅토르는 작은 한숨과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일의 진행이 생각보다 더 빨라지게 생겼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었다.
“성물을 그리 쉽게 내줄까요?”
“리첸티아와 비교해서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할 참이네. 자일 사제는 몰라도 오스틴 님이라면 분명 내주실 걸세. 싫다고 하면 압박을 해서라도 받아 내야겠지.”
지금의 하먼이 성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저 성전기사단장 정도가 아니다. 그 말은 충분히 실행 가능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에블린과 카산드라는 괜찮을까요? 불과 이틀 만에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원래 계획은 일주일이었다.
물론 이틀이나 일주일이나 촉박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체감상의 차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에블린과 카산드라는 잘 정착한 것 같네. 둘 다 빠릿빠릿하고 붙임성이 좋으니까. 내일 성녀에게 소개하고 정식으로 시비가 되면, 다음 날 소개령을 내리는 데에 문제가 없을 걸세.”
“그래도 너무 급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어쩔 수 없네. 공식적으로 원행 준비에 대한 명령이 내려온 마당에, 더 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흘뿐이니까.”
하먼이 말한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은 빅토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성녀의 전투력은 짐작이 가십니까?”
“그게…… 문제일세.”
하먼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지는 것을 보며, 빅토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신의 화신이라서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일 확률이 높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근거 없이 너무 희망차기만 한 말.
하지만 빅토르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먼의 말을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 빅토르 경, 당신이 찾아오면 그때는 제가…….
더없이 존경하고 은애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 말을 믿기 때문에.
‘성녀님, 제가 곧 구해 드리겠습니다.’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몇 번째인지 모를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틀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