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27)
427화빈민가의 아이들을 보다 보면 힘겨웠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비번일 때면, 음식과 옷가지들을 마련해 빈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 아, 왕궁의 기사님이시구나.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과 반짝이는 푸른 눈.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때 바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 빅토르 경, 또 오셨네요? 어머, 뭘 또 이렇게 많이……. 아이들이 좋아하겠네요. 감사해요.
빈민가 아이들을 위한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여인.
처음에는 그 나이를 보고 일반 사제인 줄 알았던 여인이 주교라는 것을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 지위가 뭐가 중요한가요. 전 사제고, 세상의 아픔을 치유해야 하는 사람인걸요.
그 말을 하는 그녀는 정말 빛나 보였다.
막대한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사람을 치료해 주는 고위 사제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후줄근한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그토록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도.
그만큼 존경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그 두근거림이 사랑이라 말해 줬다면, 우리 관계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 ……빅토르 경?
종교 재판을 위해 끌려가던 그녀의 앞에 섰을 때,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아봐 준 게 너무나도 기뻤다는 것을 말했다면, 과연 달라졌을까.
– 빅토르 경?
– 예, 접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어서 나가시지요.
신전에 갇힌 그녀를 구하러 갔을 때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던 얼굴.
– 피, 피가……! 안 돼!
– 제발…….
막스와의 대결 끝에 쓰러진 자신에게 신성력을 쏟아붓던 모습.
– 받아들이셔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단장님은 성녀가 자결하는 것을 보시게 될 테니까.
자신을 구속하려는 신검의 앞을 가로막던 용기.
–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경에게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너무 늦게 자각한 스스로의 마음.
– 빅토르 경. 경만 잠시 남아 주실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말, 정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혹시나 제가 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될 때…….
그리고 그때의 심상치 않은 약속까지.
그녀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추억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러니.
‘내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빅토르는 눈을 더욱 부릅떴다.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했었던 말.
하지만 사도를 보는 순간, 그는 그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일리아의 영혼을 느꼈다.
그랬기에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검을 꽂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눈앞의 괴물을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콰직.
빅토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검을 더욱 깊게 쑤셔 넣었다.
– 끄으으. 이, 이런……!?
“제가, 제가 왔습니다, 일리아 님.”
울먹이는 얼굴과는 별개로, 성녀의 심장에 박힌 회색의 오러는 더욱더 짙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몸에 빙의한 이상 사도 역시 그 생명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회색의 오러를 담은 검이 심장에 꽂히는 순간, 솟구치던 푸른빛은 빠르게 힘을 잃어 갔다.
포스건 서클이건, 클래스건 신성력이건, 이 세상의 이능은 모두 심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 경이 절 죽여 주세요.
– ……예!?
–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말입니다. 경이 제 앞에 서는 순간, 한 번은…… 어떻게든 한 번은 기회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꼭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때 이어졌던 말 또한,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 끄, 끄으으. 이, 이 어리석은 종년이!!!
기괴한 목소리로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는 사도의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영혼이 보였다.
그 영혼이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빅토르 역시 눈물을 흘렸다.
“제가…… 제가 이제야 왔습니다, 일리아 님.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흐윽.”
그녀가 왜 주군이나 다른 이가 아닌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모른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가장 가까운 초인이기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네놈들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지 아느냐, 감히!
어느새 표정이 굳어진 사도가 검의 주인을 올려다보며 그를 꾸짖듯 고함을 질렀지만.
‘이 괴물이 감히……!’
빅토르에게는 분노를 부채질하는 발악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 정확히는 그 눈동자 속 일리아의 영혼을 보며 욕설을 할 수는 없어 죽을 힘을 다해 참는데, 하먼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이 소란이 외부에 전해졌을 거야. 빨리 끝내야 하네, 빅토르.”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자신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심장을 찔러 무력화했다 해도 상대는 사도. 심장에서 칼을 빼내는 즉시 재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목을 쳐야 한다.
‘……그래, 해야 한다.’
빅토르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즉시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괴물의 눈동자 안에는 아직 그녀가, 일리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목을 치면 정말로 끝이다.
이 마지막 교감조차도…….
그 망설이는 마음을 읽었을까.
하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힘들다면 내가 하겠네.”
“아니, 아닙니다. 제가…….”
빅토르가 다시 각오를 다지며 입술을 깨무는 순간, 사도 역시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 흐으, 어쩔 수 없구나.
번쩍!
강렬한 푸른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일리아의 몸 위로 거대한 도마뱀 인간의 형상이 떠올랐다.
“윽!”
“흡!”
동시에 칼을 휘두르려던 빅토르와 하먼이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강렬한 영압에 주춤하는 순간.
– 건방진 놈들.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신벌이 너희를 찾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푸른빛이 솟구치며, 도마뱀 인간이 천장을 뚫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 빛 중 일부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하먼과 빅토르의 몸을 강타했다.
“합!”
하먼은 짧은 기합과 함께 신의 영압을 뿌리치고 그 빛을 잘라 냈지만, 빅토르는 그 순간 힘없이 쓰러지는 일리아의 몸을 받아 드느라 그 빛을 피하지 못했다.
번쩍.
“으윽!”
그런데 각오했던 강렬한 충격 대신, 검을 잡고 있던 왼손에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빅토르가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어 보니 손등에 문신처럼 푸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Haeresis.
“하?”
“헤이레시스, 이단이라……. 신이 직접 신의 적이라고 증명까지 해 준 것인가. 이런 거라면 나도 그냥 받을 걸 그랬군.”
하먼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푸른 글자에 담긴 신성력, 아니 저주의 힘은 그리 웃어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뭐, 이제 성법에 의한 치료는 못 받겠지만, 자네에게는 별문제 없지 않나?”
단순히 이단의 증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문신이 신성력을 반대로 작용하게 만든다는 것을 하먼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먼의 그런 너스레에도 어느새 빅토르의 시선은 자신의 품 안에 쓰러진 일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어쩐지 멍한 눈빛.
그에 작게 한숨을 내쉰 하먼이 빅토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을 뽑게. 이제 성하를 보내 드려야지.”
그로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빅토르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남아 있어…….”
“뭐?”
“……혼이 남아 있습니다.”
“뭐라고?”
“성녀님의, 일리아 님의 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푸슉.
다급히 뽑은 검 위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오러에 의해 파괴된 심장은 웬만한 고위 사제도 치료하기 힘든 중상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웬만하지 않은 최고위 사제가 있었다.
“하먼 경! 치료해 주세요! 제발!”
격앙된 어조.
그 안에 담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라, 하먼은 황급히 성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자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살릴 수는 있다. 다만, 육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문제였다.
이미 영혼이 잠식되었고, 그 영혼을 잠식한 주체는 승천해서 사라져 버렸다. 육체를 회복한다 해도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일리아 님의 혼이 남아 있다고요!! 제발!”
버럭 고함을 지르는 빅토르의 모습에 하먼은 한숨을 쉬며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그리고 그 순간.
“어?”
영혼의 힘을 다룰 줄 아는 하먼은 정말로 그녀의 혼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이걸 어떻게 자네가?”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먼저 느끼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그 영혼이 너무 작기 때문이었으니까.
‘본래 영혼의 일 할, 아니 일 푼. 이건 글렀어.’
신경이나 핏줄이 9할 이상 뜯겨 나간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까.
영혼의 부재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상처는 아니었다.
우우웅.
파지직.
지금 아물어 가는 심장의 상처가 후유증 없이 완치된다 해도 성녀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는 젊은 기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하먼은 이 젊은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하루 만에도 다시 심장이 멈출 거야. 그리고 계속 그런다 한들 깨어난다는 보장이…… 아니, 확실히 말하지. 못 깨어난다네.”
그러나 빅토르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 걱정을 일축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일리아 님의 영혼이 아직 남아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제가 버티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희망에 불타는 눈.
저 눈이 시간 속에서 서서히 절망으로 바뀔 것이라는 데, 하먼은 모든 것을 걸 자신도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착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 성하의 침소다!!
– 제기랄 성기사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바깥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하먼은 더 이상 빅토르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럼 성하의 시신, 아니 육신을 업게. 저 법관과 함께 신전에 두었다가는 다시 신에게 삼켜질 수도 있어.”
“예, 물론입니다.”
“……서두르세.”
하먼은 교황의 법관 센텐티아를 집어 들고는 빠르게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일리아의 육신을 업은 빅토르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날 아침, 창백한 안색으로 침소에서 깨어난 오스틴 전 교황으로 인해 신전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라진 교황, 사라진 성물들.
신검이 교단을 배신했다.
“말도 안 돼!”
“그 신검이?”
“단장님께서 왜?”
“어째서?”
어마어마한 충격이 성도 노비엔스와 세상을 강타했다.
동시에 그와 함께 사라진 4개의 성물에 관한 온갖 소문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묘한 소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잖아. 그분이 뭐 하러?”
“혹시, 그 예전의 교황님처럼……?”
“그렇지 않을까?”
검은 뱀의 마법사들이 신검을 세뇌해 성물들을 훔쳤다.
신검이 오랜 세월 쌓아 온 명성과 최근의 사건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그 소문은 마치 진실처럼 세상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