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29)
429화
“곧 ‘귀빈’이 도착하신답니다.”
루이스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귀빈’의 진짜 정체를 알았다면 부하도 저리 담담하게 보고할 수는 없었겠지만, 굳이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분이 지금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기밀이어야 했으니까.
‘얼마 만에 뵙게 되는 것이더라.’
루이스는 국왕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처음 남작가의 공자 신분인 국왕을 보았을 때부터 그는 가끔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 그란디아를 위하여!
– 위하여!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중년의 자신이 살기에 찬 고함을 지르는 모습.
때로는 금룡 문양을 새긴 기사나 병사들을 학살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쫓기는 꿈의 일부분에는 자신처럼 나이 먹은 국왕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이야기가 이어지는 듯한 꿈을 종종 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국왕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부탁하네. 그란디아의 해방을 위해.
– 맡겨 주십시오.
자신이 무언가를 맡기자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대장, 정말 괜찮을까요?
– 로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니 믿어 보자.
기이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지만, 그 현장감과 감정은 도저히 꿈이라고 여기지 못할 정도로 생생했다.
꿈속에서 그토록 실감 나는 감정을 느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마음이 복잡해서겠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주군의 부상이 심각하다.
온전히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상한 꿈을 꿀 만큼 마음이 심란해질 만도 했다.
루이스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히이이잉!
“정지!”
“신분을 밝히시오!”
남쪽에서부터 질주해 온 두 필의 말을 본 병사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그때.
“물러서라. 귀한 손님이시다. 내가 직접 맞이하겠다.”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맥라인 2군단의 부장이자, 실질적인 작전 지휘자인 루이스 하이온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이내 더욱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그 루이스 하이온이 낯선 두 사람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귀빈들을 뵙습니다.”
심지어 상대는 그 과한 예의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오랜만입니다, 루이스 공.”
“예. 조금 낯선 모습이긴 합니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이어지는 이야기까지, 병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들은 루이스와 손님들이 요새 내부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스승님은 어떠시오?”
요새의 내부로 들어선 뒤,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중년 사내가 불쑥 물었다.
“보고드린 그대로입니다. 차도가…… 없으십니다.”
“으음, 역시 그런가.”
역시?
“……짐작 가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직은……. 직접 뵈어야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그 말만으로도 루이스의 안색은 한결 밝아졌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분도 충분히 회생 가능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생각이 너무 티가 났는지 상대방, 로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봐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과한 기대는…….”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부디, 부디 각하를 살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당장 주변에 들려서는 안 되는 호칭까지 쓴 루이스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마음의 무게를 아는지라, 로건은 차마 그를 탓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할 것이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리고 그 대답만으로도 루이스는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는 듯했다.
“예, 믿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이셨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돌아서는 루이스의 모습은 확실히 좀 전보다는 기운차 보였다.
“음?”
로건이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루이스 경과 무슨 약속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전생에야 많았지만, 현생에선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딱히 접점이 없었는데?
의아해하는 그를 보며, 비슷하게 변신한 에일렌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왜 그래요, 갑자기?”
변용된 남자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로건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 버렸다.
“아니, 아니에요. 갑시다.”
난 이 상황에 왜 그런 사소한 말 한마디를 신경 쓰는가.
‘스승님이 혹시나 못 일어나실까 봐 현실 도피를 하는 것인가. 못났구나, 로건.’
로건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헛생각을 날려 버리고는 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지키는 방문 앞에 도착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루터 공.”
무릎을 꿇어도 자신보다 큰 거인을 보며 로건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우웅.
이내 가벼운 진동이 일어나면서 갈색 머리 중년 사내의 모습이 환상처럼 사라지고, 로건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반쯤 센 머리는 여전했지만, 혈색은 좀 돌아온 느낌. 똑같이 본모습을 드러낸 에일렌이 완전히 정상으로 보이는 것과 비교하면, 처음 로건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본 거인의 눈이 살짝 흔들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스승님보다는 낫겠지요. 문을 열어 주시죠, 루터 공.”
“……예, 알겠습니다.”
그그그긍.
루터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애초에 전투만을 생각해 지은 요새이기에 문 하나하나도 육중하기 그지없었다.
문이 열리자,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창문과 그 옆에 놓인 작은 침대가 보였다.
활을 들고 창밖을 경계하던 부르델이 로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생하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형식적으로 답한 로건의 시선은 금세 침대에 누운 노인에게로 옮겨졌다.
무척이나 야윈 모습. 자신이 선왕과 대립하던 당시에 심각하게 노화가 되었던 얼굴이 경지가 오른 지금 더욱더 늙어 보였다.
칠순이 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던 동안이 그 나이에 근접해 가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심지어 그 주인은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이었다. 언제나 빚을 진 기분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쓰러지신 이후 차도가 없습니다. 미음과 물은 간신히 삼키시는데…….”
“그렇겠지.”
“……예?”
“하아…….”
보자마자 상세를 아는 듯한 그 말에 부르델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로건은 대답해 줄 정신이 없었다.
‘설마 했는데…….’
입술을 질끈 깨무는 그의 옆에서, 따라 들어온 루터 역시 말을 보탰다.
“사제들 말로는 육체적 치료는 이미 끝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시는 거라고 합니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영혼을 다치신 겁니다.”
“예?!”
루터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지만, 로건은 그저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스승님의 상태를 들었을 때부터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몸을 움직일 만한 상태가 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 아닌가.
‘극심한 중상을 입고서도 세 명의 초인을 압도했다는 보고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벽 너머를 보신 거야.’
문제라면, 그것이 결코 스승에게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스승은 영혼의 힘, 그 편린을 본 상태에서 억지로 그 힘을 끌어다 썼기에 그런 용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망가진 육체를 붙잡고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려면 충격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 지금 스승의 상태는 육체의 상처가 아닌 영혼이 소모된 타격으로 인한 실신이었다.
‘빌어먹을…….’
욕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스승을 살펴보던 로건은 이내 찡그리던 인상을 조금 펼 수 있었다. 다행히 클레이튼처럼 영혼이 엄청나게 손상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손상률 1할. 이 정도면…….’
물론 한번 망가진 영혼은 복구할 수 없다. 지브릭 카셀이 그의 유물에 자신의 혼을 쪼개서 담아 놓은 것이 사실이라면, 신인의 경지에 오른 뒤에는 영혼을 조절할 방도가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아는 상식으로는 그것이 정설이었다.
또한 1할이라고는 해도, 신경계의 1할이 사라진다면 보통 사람은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영혼의 1할은 그보다 더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승이 여태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로.
하지만 달리 말하면 고작 1할이다.
그 상실감을 채워 줄 자극이 있다면, 그리고 이미 당사자가 그 힘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다시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로건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힘을 집중했다.
우우웅.
“로건!”
일순간 그의 전신에 솟구치는 황금빛 포스에 에일렌이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붙잡았다. 로건의 포스코어에 일어난 균열은 여전히 치유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검공의 상처가 아무리 중하다고 한들, 그녀에게는 남편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로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내의 손을 밀어 냈다.
“아, 괜찮아요. 포스를 소모하려는 게 아니니까.”
“예?”
“스승님의 영혼을 자극하려는 것뿐이에요. 음, 간단히 설명하자면 실신한 사람을 심장에 자극을 줘서 깨우는 것과 비슷하달까?”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소리였지만, 에일렌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로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말이에요.’
스승님을 다시 일으킬 수만 있다면 조금 더 무리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아내가 알았다면 큰일 날 생각을 하며, 로건은 다시 정신을 온전히 영혼에 집중했다.
앞서 말한 대로 포스는 필요 없었다. 극심한 충격으로 혼절한 영혼에 자극을 줘서 다시 깨우려는 것뿐이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래 봤자 금세 다시 실신하고 말겠지만, 스승님이 정말 영혼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 스승님!
우우우웅.
주변에는 들리지 않은 영혼의 파동이 퍼져 나가며 기절한 검공의 영혼을 자극했다.
– 스승님, 일어나십시오!
처음에는 조금의 반응도 없던 그의 영혼의 이내 조금씩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 스승님!
하지만 그 진동하는 느낌만 계속될 뿐, 그 이상의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가.’
로건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스승님을 포기해야 하나?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는데.’
항상 희생만 강요했었는데.
– 맥라인이라면 서남부의 영지가 아닌가. 그곳의 아들이 여기까지 웬일이지?
첫 만남의 순간부터.
– 나는 네가 이 나라의 기둥이 되었으면 한다.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받을 때를 지나.
– 네가 왕이 되려는 것은 아니고?
선왕과 대립하던 시기까지.
자신은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문과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 신(臣), 펠릭스 에스페란자. 새로운 왕국의 군주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새로운 왕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오명을 뒤집어써 가며 자신의 뒤를 받쳐 주었다.
그 결과가 이거라고? 정말, 이게 끝이라고?
“안 돼…… 안 됩니다. 이렇게는 못 보내 드립니다!”
다급한 로건의 외침에 방 안의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하지만 로건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보상을 받으셔야 합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평화로운 나라에서 천수를 누리다 가셔야 합니다.
칭송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잠드셔야 합니다.
‘이렇게는 아닙니다.’
절대!
로건은 최후의 최후까지 망설이던 선을 스스로 지워 버렸다.
그리고.
우우우웅.
‘끄으으으으으.’
스스로의 영혼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영혼의 1할이 손상되었다?
그럼 내 영혼으로라도 채워 드리리라.
절대 이성적이지 않은, 한없이 감정적인 흐름을 따라 로건의 영력이 검공에게 흘러들었다. 한번 손상되면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근원, 그 힘을 남에게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황홀한 황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의 눈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