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31)
431화
“아세리안의 잡배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군량 수송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출전이 조금 늦어질 듯합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한순간 막사 안을 가득 메우는 진득한 살기에 보고하던 갈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흘깃 상석으로 향하는 시선.
황금빛 갑옷을 입은 황제는 여전히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단순히 왼팔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압박감을 뿜어내도, 그 안에 위엄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모든 것이 비워진 자리에 들어찬 것은 분노뿐이었다.
“서부 군단이 잘 막아 내고 있으니, 며칠 정도의 시간은 문제가…….”
쾅!
“그 며칠의 시간도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움직임이기에 뒷골목 잡배들의 배후를 캐야 한다.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벌겋게 충혈된 황제의 눈은 반론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루. 하루를 주겠다. 더 이상 서방의 잡것들이 제국의 영토를 침탈할 시간을 주지 마라!”
“……예, 폐하”
“꼴도 보기 싫다. 전부 나가라.”
그렇게 갈렌을 비롯한 호위들을 전부 내보낸 황제는 아무도 없는 막사의 중앙에서 안색을 굳힌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치명적인 패퇴 이후, 뭐 하나 그의 뜻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다. 좀 전의 짜증 역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꼴사납군…….”
엉뚱한 곳에 화를 분출하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패배의 충격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황자로 태어나 살아오면서 마음먹어 이루지 못했던 일이 있었던가.
황태자가 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기는 했지만 결국 쟁취해 냈다.
게다가 20년 전, 부황으로부터 제위와 함께 이어받은 전승의 힘은 사실상 지상에 강림한 신이 된 것 같은 자신감을 선사했다. 자신도 즉위 30년 후에는 그 힘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정도로.
그래서 필생의 과업을 준비했다.
역사에 카이서스 반 아레스의 이름을 뚜렷이 새기기 위해.
대륙 정벌.
즉위 이후부터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것을 준비해 왔다. 평화 정책을 내세운 것도 그저 대업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 계획이 실패하리라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발목이 잡히다니?
꼴사납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분노가 진정되지 않았다.
“로건 맥라인…….”
까드득.
특히나 그놈. 불과 5년 전에는 오러도 다루지 못했던 놈이 이제는 오러마스터가 되어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장세였다. 세간에 퍼진 신이 내린 영웅이라는 헛소문에 자신도 순간 ‘정말일까?’라는 생각을 떠올렸을 정도로.
그러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자각하고는 더욱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나약해졌구나, 카이서스…….”
자괴감에 마른세수를 하려던 그는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오른손뿐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했다.
“흐…….”
아릿한 환상통과 함께 휑한 느낌이 전해지는 왼쪽 어깻죽지.
이내 검은 눈 속에 다시금 불길이 타올랐다.
이런 수모를 겪었는데 어찌 분노를 잊을까.
“신이 내린 영웅? 흐흐, 그렇다면 신을 거역해서라도 놈을 죽여야지.”
황제의 눈이 무언가 결심한 듯 번득일 때.
“폐하! 급보입니다!”
막사의 안으로 뛰어 들어온 기사의 보고에 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 * *
“모조리 죽여 버려!”
“누가 할 소릴!”
쾅!
챙! 챙!
콰아아아앙!
제국 서남부의 대도시 루겐하임은 평소 주요 교역 대상이던 가이아 왕국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주전장은 서쪽 성벽이었지만, 남문과 북문에도 쏟아지는 공세는 제국군의 혼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촤아악!
“아아악!”
“막아라! 남쪽으로 더 못 돌아가게 해!”
서부 5군단장 발톤 크라센은 서쪽 성벽의 중앙에 서서 연신 고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오러유저 중급에 다다른 초인이자 용장.
그의 분전이 있었기에 루겐하임은 10만 명이 넘어서는 가이아 왕국군을 어렵게나마 막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제국군과 왕국군이 가진 장비의 질적 차이와 훈련 수준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내가 있는 한 루겐하임은 함락되지 않는다! 모두 덤벼라!”
우렁찬 고함과 함께 솟구치는 붉은 오러.
커다란 워해머를 든 초인의 모습은 서부 5군단에겐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 남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상한 오러유저가! 군단장님!”
“뭣!?”
발톤의 눈이 성벽 아래로 돌아갔다.
내내 견제하고 있던 가이아 왕국 유일의 초인, 클레이 멀론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애병인 도끼를 든 채, 자신을 피해 성벽에 오를 기회를 노리는 모습.
경지의 차이가 있는 만큼 몇 번의 격전 내내 패퇴시키기는 했다.
다만 그럼에도 죽이긴커녕 치명상도 입히지 못한 까다로운 놈이었다. 도끼의 달인이라는 별명처럼, 놈이 환상적인 무기술을 자랑한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남문에 있다는 오러유저 놈은 누구란 말인가?
‘가이아에 초인이 둘이라고?’
– 아아악!
– 괴, 괴물.
남문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들이 이제는 자신의 귀에도 들렸다.
‘내가 이곳을 비우면 클레이 놈을 막을 자가…….’
하지만 그대로 있으면 남문부터 무너질 게 뻔하다.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에릭! 피터슨! 로이어! 목숨을 걸고 엑스 마스터를 막아라! 내가 남문으로 간다!”
“예!”
“맡겨 두십시오!”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발톤의 말에 흩어져 있던 세 명의 기사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 그들을, 발톤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숙련된 최상급기사, 자격을 갖춘 제국 군단의 만인장쯤 되면 오러의 일격에 흩어지지 않는 비전을 배운다.
물론 그런다 한들 오러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셋이라면 최소한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몇 번이고 견식했던 클레이 멀론의 공격이라면.
‘죽지 마라.’
까드득.
사기를 꺾을지도 모를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톤은 가장 가까이 있던 에릭의 어깨를 툭 쳐 주고는 성벽을 달려 남문으로 향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남문에 나타난 적 오러유저를 최대한 빨리 죽이는 것뿐이었다.
“전부 썩 비켜라!”
콰아아앙!
다다다다.
남문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성벽 위로 올라와 아군 기사들을 학살하는 가이아의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보아 온 가이아 왕국군과는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그분, 아, 지금은 아닌가? 크큭. 가이아 왕국을 위하여!”
“흐하하하하! 그래, 가이아를 위하여!”
“전부 뒈져라! 크하하하!”
스각.
촤아악.
“아아아악!”
갑옷의 가슴 부분에 새겨진 거북이 모양의 문양은 그대로였지만, 하나같이 신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병사들을 학살하는 놈들.
거기에 발톤이 살면서 본 적이 없는 회색이나 검은색의 포스를 쏟아 내는 놈들이 얼핏 보이는 것만 백 수십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포스 색이 회색이건 검은색이건, 놈들이 초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놈들이 보인 참상에 분노가 끓어올랐을 뿐.
“이 개새끼들이!!”
꽈아아아앙!
“억!”
그의 워해머가 휘둘러지는 순간, 놈들 중 일부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군단장님이다!”
“발톤 군단장님이 오셨다!”
“놈들을 몰아내자!”
그것을 기점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제국군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적들 역시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것이 당연한 수순.
발톤이 겪어 온 지난 전쟁은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그가 곧 도망갈 놈들을 무시하고 적의 오러유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린 그 잠깐의 순간.
“초인이다!”
“최고의 제물!”
“그분이 굽어보신다!”
“우와아아!”
투구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눈동자에 검붉은 빛을 번뜩인 왕국 기사들이 오히려 몸을 내던지듯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이 미친놈들이!?’
전쟁이 장기화되면 멀쩡하던 놈도 미쳐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 병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지, 고행을 통해 포스를 각성한 기사들이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왕국 기사들의 발악 같은 돌진은 그야말로 발톤의 허를 찔렀다.
물론.
쾅!
의외의 일격은 오러가 가미된 그의 갑옷을 뚫지 못했고.
“으아아압!”
기기기긱.
십수 명이 짓누르는 돌진의 무게도 ‘압축된 육체’를 통해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에게는 종잇장처럼 가벼울 뿐이었다.
결국.
꽈아아아아앙!
“끄아악!”
곧바로 휘둘러진 그의 몸만 한 워해머가 놈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래. 보이는 족족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 주마!”
콰아아앙!
방심하다 일격을 허용할 뻔한 발톤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성벽 위를 내달리기 시작하자, 곧 사바엥서 적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각.
발톤의 발목 부근을 스친 아주 작은 소음이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피를 보았을 만한, 갑옷의 오러까지 긁어내 버린 공격.
“씁. 얕았나…….”
“이런 빌어먹을 놈이!?”
발톤의 시선이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난쟁이에게 향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가죽 갑옷에 투구조차 쓰지 않은 이등신의 난쟁이. 심지어 거의 몸통만 한 머리, 둥그런 얼굴은 거의 반 정도가 커다란 보라색 점으로 덮여 있어 나이조차 짐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히죽히죽 웃는 그 기괴한 얼굴 아래, 날카로운 단검에서 번들거리는 검붉은 빛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붉은 오러!?’
접근하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 어르신은 반 조니다. 덩치, 네놈을 그분 곁으로 보내 줄 이름이니 똑똑히 기억해 둬.”
갑자기 튀어나온 난쟁이의 말에, 발톤은 육중한 워해머의 일격으로 응수했다.
꽈아아아앙!
“골통을 부숴 주마, 난쟁이 놈아!”
반 조니 대신 부서져 흩날리는 성벽의 파편들.
그 파편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뱀이 발톤의 뺨을 스쳤다.
스각.
얕은 상처.
원래 전투에서 워해머를 다루려면 생채기 정도야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발톤이 그 상처를 무시하고 다시 워해머를 휘두르려는데.
우우웅.
상처를 통해 몸 안에 퍼져 가는 기운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더러운 기분을 유발하며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발톤이 멈칫하는 순간, 히죽 웃는 반 조니의 대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끝이다.”
단검에서 솟구친 검붉은 오러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그때.
“이놈!!”
분노와 함께 솟구친 발톤의 오러가 그 오염된 기운을 분쇄함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튀어나왔다.
뻐어어억!
붉은 오러가 휘감긴 주먹에 튕겨 나간 반 조니.
“컥!”
하지만 그 검붉은 오러 또한 이미 갑옷을 뚫고 발톤의 가슴을 가격한 뒤였다.
간신히 성벽을 디디고 선 반 조니가 피를 뱉어 내며 히죽 웃었다.
“네 놈은 이제…….”
꽈아아아앙!
그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워해머가 날아들며 성벽의 일부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우르르르릉.
“어, 어림없다!!!”
기합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발톤이 가슴에서 솟구치는 피를 지혈하며 반 조니를 향해 돌진했다.
“과연 제국의 군단장이라……. 쉽지 않다 이거지?”
흥 하고 비웃음을 지은 반 조니는 워해머의 공세를 피해 멀찌감치 훌쩍 물러났다.
더는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적의 심장을 파고든 자신의 오러가 놈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기다리면 될 테니까.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보시지!”
반 조니는 히죽히죽 웃어 대며 그대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 단검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검은 뱀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검붉은 오러가 쏟아지며, 순식간에 주변 수십 미터의 제국군들을 휩쓸었다.
스각.
스가각.
“아아악!”
“우압!”
화들짝 놀란 제국군들이 비명을 지르길 잠시.
그들은 곧 반 조니의 공격이 오러라는 파괴의 권능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얕은 상처만을 남긴 것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바로 심장을 부여잡으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억!?”
“어으으으.”
“꺼으윽.”
순식간에 쓰러지는 아군 병력을 본 발톤의 안색이 굳어졌다.
“뭐, 안 쫓아와도 난 상관없고.”
히죽.
재앙을 뿌리는 난쟁이가 그렇게 날뛰기 시작한 그 날.
루겐하임이 무너지며 제국의 국경이 뚫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