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34)
434화
“……이곳 카일 성에 모인 병력도, 각 요새에 주둔한 병력도 여전히 물리지 않고 있어요. 이미 황제군은 대륙 중부를 넘어 서방으로 향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왕국 연합군의 퇴각도 막고 있지. 전장 정리라는 핑계로 벌써 한 달째.”
카일의 내성 한구석.
어두침침한 방 안에 있는 금발의 중년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손끝에서 날아간 작은 불꽃이 방 안 곳곳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였다.
“속셈이야 이 불처럼 뻔하지. 제국도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연스레 구사된 화염 마법으로 방 안이 환해지자, 흑발의 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자고 한 건 아버지 아니셨던가요?”
“그렇다고 이렇게 우울하게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탑주의 명령도 떨어졌으니 슬슬 움직여야지.”
“……아버지.”
“음?”
“탑주가 말한 그날이 오면, 정말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웃고 있던 중년 사내, 제라드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제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느냐?”
“그냥요……. 왕부도 잃어버린 지금 우리의 모습을 엄마가 좋아할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씁쓸한 기색이 역력한 딸의 모습에 제라드의 안색 역시 굳어졌다.
“물론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권세 아래에서, 그전보다 더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약속된 일 아니었느냐?”
“…….”
루이사가 침묵하자 그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탑주가 보여 준 여러 기적을 너 역시 보지 않았느냐. 탑의 마법을 익힌 네가 어째서 나보다 믿음이 없어!”
“……예. 그랬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기만 할까요.
그녀는 심중에 맴도는 말을 차마 뱉어 내지 못했다.
‘탑주도 결국은 인간이야.’
맥라인의 승리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절대적인 줄만 알았던 탑주의 예상이 하나둘 깨어지는 모습에, 견고하던 자신의 믿음에도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때가 곧 온다. 우리는 잘하고 있어. 그러니 움직이자. 일단 명령대로 로건 왕의 신뢰를 얻어야지.”
“……어떻게요? 로건 왕은 절 믿지 않아 제 참전도 거부했는걸요.”
“그거에 네 마법 때문이고, 이 아비와 제이는 지난 전쟁 때 충분히 활약하지 않았느냐. 신뢰를 쌓을 기반은 충분하지.”
제라드가 뒤에 시립한 제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는데, 루이사는 여전히 딴지를 걸었다.
“그렇다고 한들 로건 왕이 우리를 믿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러나 그 비관적인 말에도 제라드는 그저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진심을 보이면 된다. 그가 오러마스터가 돼서 일이 오히려 더 쉬워졌어.”
“예?”
“대마도사나 오러마스터의 전설 중에는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얘기가 있지. 그리고 탑주는 그것이 진실이라 말해 주었다. 그러니 우리의 진심을 고스란히 보여 주기만 하면 될 일이야.”
루이사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정체가 금세 들통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하, 우리가요?”
그랬다가는 바로 목이 잘리지 않을까.
그녀의 반문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었지만, 제라드의 미소는 점점 진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상대방에게 좋은 진심만 말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이 애비는 20년을 그리해 왔다. 그것도 황제 앞에서”
그 말에는 루이사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놈이 대마도사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쓴웃음을 짓는 제라드.
그는 지난 전쟁에서 보았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손끝이 떨려 왔다.
신(新) 대륙제일검인 로건 맥라인을 자기 멋대로 농락하던 그 무력.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위험한 외줄타기를 수십 년간 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즉위 전에는 3서클 수준에 불과했는데…….”
“……20년이 지났어요, 아버지.”
“‘고작’ 20년의 세월로 대마도사가 되었다는 게 더 놀라운 일 아니겠느냐.”
그 말에 루이사는 침묵으로 답했다. 탑의 비전으로 젊은 나이에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대마도사의 벽이 얼마나 높고 두터운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말대로 ‘고작’ 20년의 세월을 투자해 대마도사가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마법사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만하시죠. 황실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 해도, 저희가 지금 어쩔 방법은 없으니.”
“그래. 내 말은 로건 왕 앞에서 그에게 이득이 되는 진심만 내보인다면, 신뢰를 얻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뜻이다. 사실 우리와 그 사이의 문제라고 해 봤자, 왕국 연합에서의 갈등뿐 아니더냐.”
루이사는 모두가 당신처럼 마인드 컨트롤에 능한 건 아니라는 말 대신 다른 핑계를 댔다.
“제 일도 있고요.”
“그거야 죽은 사람도 없지 않느냐. 사실 왕국 연합에서의 일도 그렇지. 결국 피를 본 것은 탑뿐이다. 맥라인이 아니라.”
“……그렇기야 하지요.”
“같은 적을 둔 상황이다. 과거에 서로 싸웠던 일들만 묻어 둔다면, 한편이 되지 못하리란 법도 없지.”
결국 루이사는 아버지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내게 맡겨 두거라.”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인 제라드는 바로 그날 로건을 찾아갔다.
* * *
“제국을 치자?”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제국을 침몰시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려해 보시지요, 폐하.”
“……갑자기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라드 님?”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제라드는 그 속의 당황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초인 중의 초인이라 한들 역시 연륜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빙긋 웃었다.
“어찌, 제가 폐하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입니까?”
“……꽤 불쾌하게 들리는 말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인상을 쓰는 왕의 표정 또한 연기라는 게 제라드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굳이 오러마스터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아레스 제국의 왕족으로서 그 황실의 복마전에 인생을 저당 잡혔던 중년인은, 이제 약간의 표정 변화만으로도 사람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능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제가 폐하의 대계를 도와드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국에 복수하는 것은 제 일생의 숙원이기도 하니까요.”
“……일전의 일부터, 제라드 님은 절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요. 도무지 그 동기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자신의 내심을 보고 싶어 하는 듯한 붉은 눈.
제라드는 그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의 진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실 만도 하지요. 제국 수뇌부의 비사이니만큼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이서스, 지금의 황제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 무렵의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말은 결국 그의 역린(逆鱗), 아내의 일로 이어졌고, 그는 오랜 시간 간직하고 있던 황실에 대한 분노를 타국의 왕 앞에서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렇게 역겹게 이어 온 인생입니다. 그랬기에 카셀 마탑주의 손을 잡았지요. 그리고 지금 이 시기가, 제게는 그 꿈을 이뤄 줄 절호의 기회로 보입니다, 폐하.”
애써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쌓이고 고이다 못해 가슴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옛일을 꺼내 드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황실에 대한 분노가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올랐다.
그 ‘진심 어린’ 호소에 왕의 솔직한 반문이 이어졌다.
“……으음,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군요. 사연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 제라드 님이 정벌을 운운할 정도로 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제라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제국 정벌론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보는 붉은 눈에는 대화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신뢰의 빛이 어려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한 이야기를 전부 믿는다는 뜻이었다. 오러마스터에 관한 탑의 전승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 같기도 했다.
‘아직 미미하긴 하겠지만.’
새어 나가면 위험할 이야기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물론 미력한 제가 군대의 선두에 서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서 다른 쪽으로 도움을 드릴 만한 게 없을까 고민을 좀 해 봤습니다. 그러자 제 딸이 단서를 주더군요.”
“호오? 루이사 공주가요?”
“이젠 그 아이도 공주가…… 크흠, 그냥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왕국 연합군 역시 동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만 설득에 어려움을 겪으실 듯한데, 그 과정을 저희가 대폭 줄여 드리겠습니다.”
“흠?”
“연합군의 수뇌부들 일부를 세뇌하여 폐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라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계획을 말했고, 로건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제라드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잠시간 얼어붙었다.
그러다 이내 애써 다시 말을 이었다.
“……하하하. 아, 당연히 폐하께서도 복안이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꽤 걸리지 않겠습니까? 탑의 힘을 빌리면 그 시간을 대폭 줄여 드릴 수 있습니다. 외부에 티가 날 일도 없게 해 드리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조금은 빨라진 말은 다급해진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건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애초에 빌미를 잡힐 일은 안 만드는 것이 좋지요. 그리고 왕국 연합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은 이쪽에도 충분합니다. 다만 그렇게 제국에 복수를 원하신다면, 저도 제라드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라드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물러서는 것도 곤란했다.
“……말씀하십시오.”
“카셀 마탑주를 만나 보고 싶은데, 연락할 수 있겠습니까?”
……젠장.
자신만만하던 제라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 * *
–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로건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간 제라드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사실 지금으로선 도와주겠다는 이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성국에서 카셀 마탑을 쫓고 있다고는 하나, 쉽게 잡힐 놈들이 아니다. 그리고 제국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즉, 놈들의 도움을 얻겠다면 지금이 적기야.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티가 나지 않게 돕는다 해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괜히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도 있고.’
로것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포스를 움직였다.
우우웅.
심장을 울리는 포스코어에선 얼마 전과는 달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빅토르의 낙인을 보며 얻은 깨달음이 포스코어의 회복 속도를 확연히 증진시킨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오러마스터 다음의 경지도 그 방향은 잡을 수 있었으니, 상위의 경지에 오를수록 진전이 느려진다는 상식은 이미 완전히 깨부숴진 지 오래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황제나 카셀 마탑주를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그렇기에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공통의 적이 있을 때.
카셀 마탑주가 자신이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직접 만나서 견적을 내 볼 필요가.
그리고 그 견적이 생각보다 가볍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따도 되고.’
로건은 점점 짙어지는 황금빛 오러를 손안에서 굴리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카셀 마탑이야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자신과 협력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자신은 절대 놈들을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적일 뿐.
전생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또 검신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선조 지브릭 카셀이 자신의 영혼을 강탈하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왕국 연합의 전쟁에서 놈들이 트리아에 저질렀던 만행도 기억하고 있다.
황제와 제국이 미래를 위해 물리쳐야 할 적이라면, 카셀 마탑은 눈앞에 보이는 족족 밟아 죽여도 무방한 해충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시간이 문제일 뿐.
그리고 지금은…….
‘과연 호응해 줄까?’
소문만 무성한 진실을 삼킨 뱀, 또 다른 대마도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자는 얼마나 강할까.
그 호기심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른 채, 로건은 잠시간 눈을 감았다.
놈들이 어찌 나올지는 몰라도, 일단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제국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지금쯤 황제군이 서부에 도착했을까.’
가볍게 숨을 한번 들이쉰 로건이 집무실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데미안 경을 들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