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36)
436화
“모두 정신 안 차려? 전쟁이 끝난 것 같나!?”
호르헤의 고함이 연무장을 울리자, 땀에 절어 흐느적거리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다잡았다.
“누가 걸어다녀!!”
중갑을 입고 정신없이 검술과 체력 훈련을 소화하는 기사들.
전쟁이 끝난 직후의 강도 높은 훈련에 불만이 있을 법도 하건만, 투덜거리는 이 하나를 찾기 어려웠다.
‘다 느끼고 있는 거야.’
호르헤는 그런 모습을 보며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공식적으로 내려온 왕명은 군단의 개편과 그에 따른 적응 훈련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배치는 여전히 전시 기준이었고, 전쟁 물자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들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은 얼마 안 가 제국이 다시 쳐들어올 가능성을 점쳤다.
다만 소수, 호르헤를 비롯한 최고 지휘부는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자경단의 귀환 명령이 떨어진 직후부터였다.
‘단순히 방어만 할 거면 자경단을 해산시키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어떤 가능성이 노련한 지휘관인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제 생각이 옳다면, 왕국 전체에 다시금 거대한 풍랑이 닥칠 것이기에.
‘사실이라면…… 나는, 이 나라는 과연 할 수 있을까.’
호르헤가 알 수 없는 기대, 혹은 불안감으로 떨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를 때였다.
“역시, 좋은 장비들을 쓰는구먼.”
들어 본 적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얼마 남지 않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백발 백염의 촌부가 있었다.
“……누구?”
기사들의 연무장에 웬 노인이?
당황한 호르헤가 묻자 노인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들어오면 안 되나?”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멍한 눈빛을 하고서는, 저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니.
벌컥 짜증이 난 호르헤는 이를 부드득 갈곤 연무장 바깥쪽을 향해 버럭 외쳤다.
“경비병! 대체 뭐 하는 거야!?”
“어이쿠, 깜짝이야!”
쩌렁쩌렁 울려 퍼진 호통에 노인이 화들짝 놀라고, 곧 사색이 된 경비병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추, 충!”
호르헤는 노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경비병들의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빡! 빠박!
“억!”
“악!”
뒤이어 정강이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는 경비병들에게 매서운 질책이 떨어졌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엄한 놈들 출입을 막으라고 내보내 놨더니 오히려 들여보내? 근무 중에 잠이라도 처잔 건가!?”
“크읍……!”
“그, 그것이…… 어흐흐.”
“대답들 안 해?! 이 노인네가 연무장에 들어오도록 뭘 한 거냐고 묻잖나!”
‘아씨, 눈 부릅뜨고 있었는데.’
‘연무장에 개구멍이 있나.’
경비병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파서보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노인은 빼도 박도 못할 근무 태만의 증거였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호르헤는 냅다 외치는 그들을 죽일 듯 노려보곤, 짧게 턱짓하며 신경질적으로 명했다.
“당장 데려가.”
죽상을 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던 경비병들이 그제야 후다닥 노인에게 다가가 양팔을 붙들고 거칠게 잡아끌었다.
“어이쿠, 이놈들아. 살살 혀, 살살.”
“아니,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와요, 나와.”
“반항하지 마요, 노인장. 더 다쳐요.”
이내 노인과 경비병들이 사라지고, 연무장은 다시금 기사들의 기합 소리로 가득 찼다.
호르헤는 혀를 차며 한낮의 소란을 잊어버렸다.
비슷한 소란이 물자 창고 앞에서도, 식량 창고 앞에서도 일어났다.
그리고 그 관계자들 역시 호르헤처럼 노인의 무단 방문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여기며 뇌리에서 지웠다.
그 누구도 딱히 이상하다 생각지 않은 것이,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 * * 늦은 밤.
연무장에서 수련을 끝낸 뒤, 눈을 감고 명상하던 로건의 눈이 돌연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재밌는 것이 많은 곳이더군요, 흘흘.”
서서히 돌아서자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모를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낡은 리넨 옷에는 때가 잔뜩 끼어 누리끼리해 보였고, 히죽 웃는 미소 사이로 보이는 싯누런 이빨은 몇 개 남지도 않은 채였다.
그야말로 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늘내일하는 노인.
그러나 정말로 그런 노인이라면 이렇게 아무 흔적도 없이 자신이 있는 연무장에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라.
로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어조로 노인에게 물었다.
“카셀 마탑주이시오?”
“흘흘. 그렇습니다, 폐하.”
잔잔히 웃은 노인에게서 예를 갖춘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로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 카셀 마탑주를 살폈다.
“뵙고 싶다 전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오셨군요. 바쁘신 분일 줄 알았습니다만.”
“삼백 년? 아니 이백 년 만에 오러마스터의 경지를 체현한 초인이 초청을 해 주셨는데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슬슬 직접 만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카셀 마탑주의 웃음은 굉장히 순수해 보였다.
카셀 마탑이 저질러 온, 그리고 미래에 저지를 짓들을 모른다면 저 순박한 모습을 그대로 믿어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흠,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물론입니다. 아, 그 전에 폐하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다길래 놀라긴 했습니다, 하하. 이걸 이심전심이라고 하던가요?”
마탑주의 웃음에 로건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서로 공통의 적을 둔 사이 아닙니까?”
보고 만만하면 목을 따려고……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지요. 아무래도 의논이 필요한 시기이기는 했습니다.”
마탑주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로건의 말에 호응했다. 로건은 다시금 웃으며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가 서로 앙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적을 앞에 두고서 갈등을 빚을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시비는 이쪽이 먼저 걸었고, 피를 본 것도 결국 우리니까요.”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마탑주는 로건이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뒤로 잡아끄는 것처럼.
“……경계를 과하게 하시는군요.”
“아무래도 이 정도 거리는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흘흘. 좌우지간 놀랐습니다. 아직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과찬이십니다.”
로건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마탑주는 웃으면서도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현재 그들 사이의 거리는 약 20m. 굳이 초인이 아니더라도 기사라면 한달음에 넘어설 수 있는 거리다.
여기서 더 좁혀지면 로건의 우세, 더 벌어지면 마탑주의 우세였다.
물론 마탑주가 경계할 만큼 그 차이는 미미했지만, 아직은 로건이 닿지 못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저만한 마법사가 거리를 벌리는 것이야 여반장일 테니까.
‘7서클 초입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거의 마스터…… 흠, 당장은 어렵겠어.’
스승을 구하는 과정과 빅토르의 낙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나름대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 자부했건만, 역시나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그때의 황제와 비등한 수준이다.’
빛 가르기를 온전히, 준비 과정 없이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이길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적의 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만큼,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을 마친 로건은 짐짓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적의 적은 친구지요. 혹시 제국을 상대할 복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마탑주?”
로건 딴에는 완벽히 속내를 감췄다고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마탑주의 대답은 보란 듯이 그의 허를 찔렀다.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방도야 찾기 나름이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성검 바니타스(Vanitas), 어디에다 두셨습니까?”
“아……. 하하, 하.”
로건의 눈알이 옆으로 또르르 굴렀다.
그로서도 솔직히 잊고 있었던 일을 들먹인 탓에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마수의 숲에 남겨 두신 장난질에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그걸 보면 폐하께서도 그 검이 저희 시조의 유물이라는 것은 알고 계신 듯한데……. 동맹의 증표로 넘겨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이 상황에 ‘내가 부쉈어.’ 혹은 ‘학파는 몰라도 핏줄로는 내 시조이기도 하거든? 그냥 모른 척하자구.’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말한들 믿지도 않을 터였다.
염원의 힘이 지워 버린 지브릭 카셀의 영혼. 그것이 굳건했다면 바니타스는 절대 부술 수 없는, 말 그대로 성검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눈앞의 노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성검이 절대 부서지지 않았을 거라고.
그 말은…….
‘염원의 힘에 대해 모른다?’
로건의 눈이 일순 번뜩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브릭 카셀의 영혼조차 염원의 힘에 밀려 소멸했는데, 그에게 못 미치는 후인들이 그 힘을 어찌 알까.
로건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머리에 새기며 슬쩍 웃었다.
“동맹의 증표라…….”
“바니타스가 엄청난 아티팩트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저희 학파의 마법사들뿐이지요. 더구나 폐하께서는 이제 아티팩트에 연연할 만한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없는 걸 내줄 수는 없었다.
로건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대꾸했다.
“……처음부터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마도 성자 지브릭 카셀의 유물이 고작 계약 시점에 넘길 만한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탑주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과연, 이래저래 세상에 시조님에 대한 정보가 풀린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본명까지……. 허허,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폐하?”
글쎄. 그 시조가 쌩 또라이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말을 간신히 잡아 누르며, 로건이 입을 열었다.
“그…… 검을 찾을 때 서적을 구했지요.”
“서적!?”
아무렇게나 내던진 말이었는데, 마탑주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격렬했다.
“이, 이럴 수가……! 무슨 서적입니까? 설마 시조님의……?!”
“뭐, 성물의 주인이라는 소개와 함께 마법 같은 것이 적혀 있긴 한데, 제가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습니까.”
“흐으음……. 허허, 약속드리겠습니다, 폐하. 성검과 서적 둘 다, 아니 둘 중 하나라도 지금 넘겨주신다면, 폐하를 도와 제국을 멸망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허어, 이게 웬 횡재냐.’
적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하나, 지금 노인의 태도는 그야말로 한 점의 가식 없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
가짜 미끼를 허겁지겁 물고 펄떡이는 월척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제국의 멸망이라니요. 제가 그런 무서운 것을 원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기사들이 모두 착용할 정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저서클 아티팩트와 기존에 나타나지 않은 폭발 아티팩트, 그리고 무기. 모두가 한순간에 준비할 만한 물건들은 아니지요.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증량할 만한 물건은 더더욱 아니고요. 비용이 상당할 터인데.”
아, 다 보고 오셨다?
“하하, 자세히도 살펴보셨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둘 중 하나만 넘겨주십시오. 그럼 카셀 마탑의 모든 힘을 다해 제국 공략을 돕겠습니다. 둘 다 폐하께서는 필요 없는 물건 아닙니까?”
“하하, 기왕 드리는 거 짝은 맞춰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 다 드리지요.”
“감사……!”
“단, 제국 공략이 끝난 후에.”
“……농담이 심하시군요, 폐하.”
처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순식간에 안색을 바꾼 노인의 전신에서 음울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로건은 고작 기세에 눌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우우웅.
“카셀 마탑은 성국에게도 쫓기고 있지 않습니까? 전폭적인 협력은 이쪽에서도 오히려 거절해야 할 판입니다. 아니면 카셀 마탑이 제국이나 성국을 단독으로 상대할 만큼 큰 힘이 있던가요?”
검붉은빛의 음울한 기세를 여유롭게 밀어 내는 황금빛에 노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엇보다 뭔지도 모를 꿍꿍이를 가지고 암약하는 대마도사와 그를 중심으로 한 무력 집단의 진짜 목적도 아직 모릅니다. 아는 거라곤 그들의 이름뿐. 혹시 이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이어진 말에 노인의 몸에서 뿜어지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신 로건을 바라보는 눈초리만큼은 더욱 싸늘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굳게 닫혔던 노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