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37)
437화
“……그저 양지에 마탑을 세우고 떳떳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로건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마도사를 수장으로 둔 카셀 마탑이 고작 양지로 나오는 게 목표였다면, 뭐 하러 제국과 성국을 자극했을까. 황실과의 구원(舊怨)이 있다 한들 어떻게든 풀고 마탑을 세우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을진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으신가 보군요.”
로건은 아직도 기억했다. 전생의 바로스 황제가 만든 참상을.
그리고 지브릭 카셀의 기억을 본 이후, 그것이 대량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카셀 마탑의 마법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보아 아마 전생에 바로스 황제의 뒤에는 카셀 마탑이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 목적은 높은 확률로 지브릭 카셀의 현세 혹은 그가 했던 짓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최악이지만 지금은 다른 목적일 수도 있으니.’
그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져 본 질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 없는 답변이 돌아올 줄이야.
하지만 노인, 카셀 마탑주의 표정은 태연했다.
“대륙의 2강에게 수배되어 떠도는 처지에 그보다 어려운 목표가 있겠습니까?”
“흠, 애초에 그럴 만한 일들을 벌이지 않았으면 수배될 일도 없었을 텐데요.”
“흘흘, 그것은 폐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음?
“제국의 황실도, 성국도 태생부터 본 마탑을 적대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저희가 그저 가만히 있었다 한들 저희를 공격했을 거란 말이지요.”
고대의 대마도사 타론 아레스의 후예인 제국 황실과 지브릭 카셀, 그리고 9대신의 비사.
그 내막을 모르는 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로건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입니까?”
“……고대에서도 비사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이 이야기를 들려 드리면 동맹을 맺으시겠습니까?”
탑주의 느물거리는 말투가 거슬렸다.
연기를 하겠답시고 이미 아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그럴 리가.
“……마도성자 지브릭 카셀이 강림한 9대신의 사도들에게 공격을 받아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서적’에서 보았습니다만,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요. 그럼 황실은 지배당한 쪽의 일파인가요?”
아는 진실의 일부만을 뱉어 내고 의뭉스럽게 끝내 버린 말.
그 말에 탑주의 눈이 다시금 번뜩였다.
“흘흘, 정말로 그런 책이 존재하는가 보군요. 하지만 알고 계신 사실 하나를 정정해 드리겠습니다, 폐하.”
그 말과 함께 탑주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거짓된 신의 사도들은 당시 ‘그분’께 패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사도를 강림시킬 수 없을 만큼 신성이 크게 훼손되었지요. 다만, 그러고도 신탁을 내려 ‘그분’을 따르는 저희의 추살을 명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분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하는 탑주의 어조에선 일종의 광기까지 느껴졌다.
거짓된 신. 그들. 그분.
그가, 카셀 마탑이 9대신과 지브릭 카셀을 어찌 생각하는지가 그 말에서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대상만 다르지 흡사…….
‘……신앙.’
의외의 곳에서 카셀 마탑주의 빈틈을 발견한 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흠, 저도 9대신들의 정체를 ‘서적’에서 보았습니다만, 솔직히 믿기 어렵더군요. 그들이 이종족의 신인 출신이라고…….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한들, 그들이 어째서 이미 죽은 자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슬쩍 던져 본 미끼.
그게 먹혀들었는지 한순간 탑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로건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솟구치던 자신의 마력을 회수했다.
“흘흘, 제가 쓸데없는 말이 많았군요. 하지만 하나만 다시 말씀드리지요, 폐하.”
다시 찾은 미소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분은 ‘불멸’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 역시 진실이지요. 그 서적에 적힌 말을 제대로 새겨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있지도 않은 서적에 대한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제외하고는 직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로건으로선, 그 찰나의 변화만으로도 이미 많은 힌트를 얻은 뒤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대의 검신이 걱정했던 대로, 카셀 마탑은 그 시조를 부활시키겠다는 목적을 여태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이자가 지금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역시나 자신이 그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 망할 선조의 영혼처럼 자신을 그 부활의 제물로 쓰려고?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상대에게 칼침을 놓고 싶어지는 터라, 로건은 절로 경직되려는 안면 근육을 제어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제겐 너무 뜬금없게 들리는 이야기군요. 우리의 대화가 많이 엇나간 것 같습니다, 탑주.”
“흠……. 뭐, 믿음이 가지 않으신다면 그 쓸모없는 서적부터 넘겨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흘흘.”
로건이 애써 대화의 흐름을 바꾸려 했지만, 서적에 대한 탑주의 집착이 생각보다 더 심했는지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괜히 없는 말을 만들어 낼 걸까.
자신이 임기응변에는 그리 재능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며, 로건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왜 그렇게 책자를 원하시지요? 아무리 시조의 유물이라고는 해도, 그 안에 적힌 게 이미 알고 계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신들의 수작으로 인해 많은 전승이 끊어졌습니다. 진정한 인류의 구원자인 그분의 위업은 지워지고 거짓된 신들만이 득세하니, 그분을 따르는 저희로서도 지켜 낸 기록이 적을 수밖에 없었지요.”
탑주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9대신의 정체와 그분의 존엄에 대한 기록 외에는 남겨진 게 거의 없습니다. 회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가 붉게 물들 때까지 인류를 위해 싸우신 분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적단 겁니다!”
‘어라?’
회색 눈에 검은 머리……?
탑주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토해 내는 열변 속에서 묘한 사실을 깨달은 로건이 순간 눈을 빛냈다.
지브릭 카셀의 기억 속에서 그는 대개 붉은 눈에 붉은 머리, 딱 자신의 조상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전투를 벌일 때는 어두운 회색 마력으로 전신을 감싼 채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데…….
‘거꾸로 알고 있어? 아니, 아예 기록이 변형된 건가?’
그 생각은 이내 한 가지 추측으로 이어졌다.
‘나와 지브릭의 관계를 모르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아마 염원의 힘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다. 카셀 마탑이 가진 정보가 예상외로 얼마 안 될 수도 있을 듯했다.
뜻밖의 상황에 내심 쾌재를 부르던 로건의 얼굴에 문득 의아함이 어렸다.
‘아니, 그렇다고 치면.’
도대체 왜……?
“왜 제게 접근하신 겁니까?”
앗.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어 놓고는 움찔했다.
“왜……라니요? 저를 초청하신 것은 폐하이십니다만?”
“아, 죄송하지만 카셀 마탑과의 악연은 제가 그 유물들을 손에 넣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만?”
“아……. 그야 그렇지요, 흘흘.”
환상적인 임기응변이었다.
로건이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는데.
“……맥라인에서 예언의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탑주가 또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 들었다.
“예언이요?”
“예. 그분이 남기신 예언입니다. 신들이 떠난 시대가 올 것이라는.”
신들이 떠난 시대?
“이제 거짓된 신들은 점차 그 힘을 잃어 갈 것입니다. 근래 맥라인에서 태어나고 있는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바로 그 증거지요.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폐하와 같은…… 영웅의 등장이라고 그분은 예언하셨습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
로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탑주를 노려보았지만, 알게 모르게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탑주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시간 회귀자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닐 텐데?’
이제는 로건도 서서히 감을 잡아 가고 있었다. 오러나 마나보다 본질적 우위에 있는 영혼의 힘, 그리고 그 영혼의 힘과 비슷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힘에 대해서.
검신의 유록,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신들의 뜻, 그리고 빅토르의 낙인을 통해 신들이 사용하는 힘의 근원을 염원의 힘과 비교해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신들은 염원의 힘과 ‘비슷한’ 힘을 사용한다.
그렇다. 비슷한 힘이다.
‘절대적인 영혼의 격으로 본인의 ‘의지’를 현실에 각인시키는 힘이야.’
신들의 힘은 정확히 얼마일지도 모를 만큼 많은, 수백, 수천만의 영혼이 모인 염원의 힘과 비슷하면서도 분명 달랐다.
‘내가 비틀어 버린 역사 때문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신들의 의념 역시 비틀린 거야.’
그래서 자신이 역사를 바꾼 결과로 태어난 아이들이 그 의념, 즉 신성력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것일 터였다. 신들이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도 납득이 갔다.
하지만 시간 회귀는 염원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지브릭 카셀의 영혼은 그 염원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비록 그것이 놈의 일부일 뿐이라고는 해도.
그런 놈이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생긴 변화를 ‘신들이 떠난 시대’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예언했다?
‘그게 말이 되나?’
과연 지브릭 카셀은, 아니 카셀 마탑은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모르는가?
새삼 솟구친 의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그 원흉이 눈앞에서 다시 웃음을 보였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신들이 떠난 시대를 주도할 폐하의 주변을 지켜보며, 예언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려는 것뿐이니까요.”
기다리기는.
‘적극적으로 앞당기려는 것이겠지.’
그 음흉한 목소리를 들으니 적어도 한 가지는 확인할 만한 방법이 생각났다.
“동맹을 맺으려거든 서로의 실력 정도는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근 서방의 국경이 뚫린 것이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서방 10국의 한심한 군세로는…….”
스르릉.
여유 있게 흘러나오던 카셀 마탑주의 목소리는 로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드는 순간 뚝 끊겼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폐하?”
미묘하게 번뜩이는 갈색 눈을 보며 로건은 싱긋 웃었다.
“실력을 확인해 보자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력보다도 탑주 개인의 무력이 궁금하군요. 다른 대마도사인 황제에게 호되게 덴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
“……거사를 위해 호승심 정도는 참으실 줄 아는 분이라 생각했는데요.”
“거사를 위한 과정으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잡기 위한 덫은 아니고요?”
“물론이지요.”
굳은 표정의 탑주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 로건은 곧바로 가시화된 영력을 끌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연무장에서 소란이 있을 것이나 한동안 신경 쓰지 마라!!]부상을 회복하는 며칠 사이 한층 완숙해진 영파가 내성 안 모든 아군에게 전해졌다.
눈앞의 대마도사에게도.
“……놀랍군요. 오러마스터는 영력을 이렇게도 사용하나요? 흘흘.”
대마도사는 다른가?
‘뭐, 그것도 지금 알아보면 되겠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건은 이내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탑주에게 검을 겨누었다.
“어찌,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흘흘. 잠깐 어울려 드리지요.”
그 대화를 끝으로 검은 기운과 황금빛 기운이 치열하게 얽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