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44)
444화 [루이사 공주. 동쪽 성벽의 스크롤을 처리해 주시오. 위치는…….]
카셀 마탑의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마도사라면 스크롤에 대한 감지 및 제거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제라드 부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보낸 메시지였건만, 이내 로건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위치에 그들이 없었던 것이다.
‘찜찜하긴 하지만…….’
정신을 집중해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리 없겠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엄한 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 봤자, 고작 세 사람. 로건으로선 그 셋이 당장 적으로 돌아선다 해도 단숨에 베어 버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이제 오러마스터가 가진 힘의 극의(極意), ‘전장 지배’에 대한 테스트도 완전히 끝났다.
대군을 손발처럼 움직이고, 약간이지만 컨디션과 사기까지 뜻에 따라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본신의 힘은 조금도 낭비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충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에 호응하는 영혼들의 반응만으로도 스스로의 영혼이 더없이 고양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오러마스터가 전쟁의 신이라는 전설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직접 한다.’
로건은 전쟁 직전 확인했던 놈들의 스크롤 배치를 다시 떠올렸다. 서문까지 돌아가는 병력은 없었고, 북문은 루터와 위켄에게, 남문은 왕국 연합에 맡겼으니 남은 것은 동문 성벽뿐이다.
다만, 성벽 구석구석에 설치한 5서클 스크롤이 고작 붕괴 마법일 리는 없으니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더하여 아까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이질적인 마나도 거슬렸지만.
‘일단은 스크롤부터 처리하자.’
의지가 이는 순간, 몸이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태라면 특성 없이도 카셀 마탑주를 참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황금빛 빛줄기가 성벽을 향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움직인다!”
“로건 맥라인이다!”
“적의 왕이다!”
그런 그를 주시하던 이들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쏴! 쏘라고!”
“모조리 쏟아부어!”
파바바박.
대군을 향해 쏟아지던 쿼렐의 일부가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타다다다당.
그러나 웬만한 기사에게도 절대적인 사신의 손길이었어야 할 공격은 황금빛 보호막에 맥없이 튕겨 나왔고,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은 황금빛 바람은 금세 동쪽 성벽 위에 올라섰다.
동시에 찬란한 황금빛이 성벽의 일각, 수십 미터의 공간을 휘감았다.
“아, 안 돼!”
“아악!”
“끄아아악!”
순간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빛의 폭발 속에서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제국군들.
스가가각.
쩌어어억.
그들의 목숨과 함께 성벽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던 ‘마나를 품은 종이’들이 일순간에 찢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파바바박.
“스크롤이!”
“놈들이 눈치챘다!”
멀리서 마법사들 몇몇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로건 역시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이런 엿 같은…….’
그저 멀리서 볼 때는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손을 쓰고 보니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5서클의 스크롤, 그것들이 성벽 주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영혼과 피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딴 짓은 카셀 마탑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전생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분노가 다시금 가슴속에서 고개를 쳐들었지만, 단순히 분풀이를 할 시간은 없었다.
영혼과 피를 빨아들인다. 즉, 이 스크롤들은 어떤 마법의 트리거가 아니라 제물의 용도라는 뜻이다.
하나하나의 마법이 아닌, 그 모든 게 그저 하나의 마법을 위한 제물.
사망자가 생기기 전, 전투의 초기에는 당연히 느낄 수 없었던 마력의 흐름이 어느 한군데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챈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이!!”
일부를 없애 버렸는데도 그 기분 나쁜 힘의 흐름은 오히려 강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른 로건의 몸이 동쪽 성벽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제국군이 아니었다.
“으아압!”
“죽어라!”
무모하게 덤벼드는 적 기사들도.
“형님!?”
“폐하?”
빅토르와 로니안의 격전지도.
스승과 갈렌의 싸움도, 빅토리아의 골렘과 마도사들의 싸움도.
아내와 강철의 마도사의 대결까지도 그저 눈으로만 확인하며 지나쳤다. 어차피 ‘전장 지배’로 격을 파악한 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상대만 맞붙여 놓은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대신 그런 그의 주변에서, 뱀처럼 휘어지는 휩블레이드가 반경 50m를 유영하며 그의 감각이 가리키는 곳에 자리한 스크롤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스크롤도 모조리 없애 버리기 위해 번개처럼 움직이던 로건의 눈앞에, 갑자기 ‘푸른 불꽃을 휘감은 오른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러운 충돌로부터 터져 나온 굉음.
“으아악!”
“다들 피해!”
그 주변에 존재하던 모든 이들이 한순간 바닥에 나뒹굴게 된 충격파 속에서 로건은 이를 갈았다. 흙먼지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황금빛 갑옷이 눈을 자극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끝까지 쉽게 넘어가지를 않는구나, 로건 맥라인.”
표정이 굳어진 사내의 말에 로건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황제…….”
그 나직한 말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사방에서 호응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아!”
“황제 폐하시다!”
“폐하께서 직접 오셨다!”
초인들의 열세로부터 시작된 전세의 비대칭.
그 흐름을 느끼고 있던 제국 기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밀리던 제국군의 사기가 한순간 치솟는 게 눈에 보이는 순간, 로건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진정 미친 건가!?”
그로선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황제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서부 군단장을 제외한 모든 초인을 루스펠하임에 보내 놓은 상태에서 그 자신까지 온다?
그럼 서쪽 전장은?
카셀 마탑주가 참전한 서부는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네놈 덕분에 제국의 공적과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지. 영광으로 알아라, 로건 맥라인.”
제국의 공적.
느물거리며 웃는 카셀 마탑주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로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약의 무게 운운하던 자가 이런 뒤통수를……?
“하!? 계약? 미친 소리! 그 말을 믿는 것인가? 놈은…….”
“그래. 전쟁에 참여하기로 너와 약속했다더군. 딱 ‘참여’까지만 말이야.”
“설마……?”
“설마? 대마도사의 언약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던 건가? 그렇다면 나로서는 참 다행이군.”
로건의 반문은 서늘한 웃음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괜히 더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쿵.
황제가 발을 내딛는 순간, 푸른 마력이 그 발끝에서부터 퍼져 나가며 휘황찬란한 푸른색 빛줄기로 치솟아 동쪽 성벽을 밝혔다.
“우왓!”
“저게 뭐야!?”
“저건 대체……?”
서로 칼질을 하던 이들이 한순간 싸움을 멈추고 멍하니 빛줄기를 바라보는 광경은 분명 이상했다. 심상치 않은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그들의 영혼을 잡아끈 것이다.
그리고 로건의 감각에는 황제의 그 마력이, 스크롤이 ‘수집’한 이질적인 힘을 제어하여 성 내부로 보내고 있다는 것까지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잠시 후.
콰아아아아앙!
루스펠하임의 안쪽, 동쪽 성벽 가까이에 자리한 저택 하나가 터져 나감과 동시에 50여 명에 가까운 검은 기사들이 걸어 나왔다.
– 황제.
– 폐하.
– 만세!!
우우우우웅.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음성과 함께 일순간 솟구치는 검붉은 기운들.
그것을 보는 순간 로건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무리 일회용 초인이라 한들 저 숫자라면…….
‘전황이 바뀐다.’
이를 으드득 간 로건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뱉어 냈다.
“……절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이따위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 줄이야.”
그 말에 황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늦게 눈치챘다면 백 명을 채웠을 텐데. 실로 안타깝군.”
스크롤을 통해 흘러가던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이라.
하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 전개에 좀처럼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카셀 마탑과 같은 술수를 쓰면서 그들을 공적으로 몬 건가? 양심 따위는 진작에 팔아먹은 모양이군.”
더 이상 황제에게 존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날 선 비난을 뱉어 냈지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게 아쉽다.”
“……뭐?”
황제의 말에 로건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 그들은 우리와 한배를 탄 적이 있었지. 그들의 과한 욕심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미 대륙이 통일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말인가.”
그 직설적인 비난에도 황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대악마를 막아 인류를 구한 것이 내 선조다. 내게는 인류를 처분할 권한이 있지.”
광기조차 보이지 않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오만에 로건은 순간 상황을 잊고 실소를 흘릴 뻔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자기가 처분할 수 있는 물건쯤으로 생각하는 놈이라니.
“세상을 구한 건 타론 아레스가 아니라 검신이겠지. 그리고 그전에는 지브릭 카셀이었을 테고.”
황당한 마음에 불쑥 뱉은 말.
그런데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뭐라?”
흠칫하는 표정과 함께 황제가 움직이던 마력의 흐름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성벽 위로 뛰어오를 것 같던 검은 기사들의 움직임 또한 같이 멈췄다.
‘어, 이건?’
전에 봤을 땐 황제의 존재와 상관없이 움직였는데?
무언가 약점이 있는 듯했다.
‘급조한 이들과 준비된 이들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로건의 혓바닥은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조상이 세상을 구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설마 모르고 있었나?”
“웃기지 마라! 네 놈이 뭘 안다고……!?”
아무래도 타론 아레스에 관련된 일화는 황제의 역린인 것 같았다.
조상이 세상을 구했으니 세상은 내 거, 인류도 내 거.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라면, 아니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 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더 건드려야지.
황제도 느끼고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와 황제는 거의 호각이다. 서로 피 터지게 싸워 봤자 승부는 쉽게 나지 않을 것이다.
특성 ‘업’을 쓴다면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지만, 지금 그 수를 써야 할 곳이 이미 두 군데다. 후유증도 생각해야 하니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타론 아레스가 검신일맥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던가?”
그 말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 황제의 안색이 흙빛으로 굳어졌다.
“타론 아레스는 검신의 조력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막고자 했던 것도 대악마 따위가 아니라 지브릭 카셀이었고.”
“……뭐!?”
“자신들의 조상이 막고자 했다는 대악마의 이름도 모르나? 아니, 그래서 카셀 마탑과 협력한 건가? 그 대악마의 후예와?”
“……개소리 마라!!”
우우우웅.
발작하듯 터져 나온 푸른 마력은 오히려 심증을 굳힐 뿐이었다.
‘정말 모른다.’
더하여, 저 과한 반응을 보니 그 자신도 무언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본래의 역사가 전승의 과정에서 지워졌든, 아니면 황실이 인위적으로 지웠든.
황제가 가진 자부심의 원천이 왜곡된 역사라면, 그것을 흔드는 순간 그 평정은 무너질 것이다.
“아레스가 인류의 구원자다! 우리가 인류의 주인이야! 감히 어떤 놈이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그토록 현명하게, 위대하게 보였던 지도자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로건은 그런 황제의 반응을 주시하며 감각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애썼다.
황제와 검은 기사들 사이에 이어진 마력의 흐름. 그 가닥이 슬슬 잡힐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네놈의 왕국부터 깡그리 지워 주마!”
황제의 광기 어린 눈빛과 함께 성벽을 이룬 돌들이 로건의 발목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바람이 휘몰아치며 전신을 구속했다.
동시에 결코 꺼지지 않을 푸른 불꽃이 그의 전면을 뒤덮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황제부터!’
죽인다.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심장에서 조화롭게 공전하던 9개의 포스 사이에서 하나의 코어가 더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증가되는 기력과 고양되는 영혼.
전신에 충만한 힘은 한없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순간에 격이 오른 영혼은 한참이나 고심했던 난제를 순식간에 풀어냈다.
“끝이다.”
로건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그를 속박하던 모든 마법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황금빛 검이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