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48)
448화 ‘이제 7번째 성물.’
대륙 서부의 끝.
산 위에서 토레 왕국 북서부 끝에 자리한 신전을 내려다보는 하먼의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대륙의 난리는 봄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지만, 바다를 인접한 이곳의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기만 했다.
그리고 하먼의 마음은, 그 싸늘한 기온보다 더욱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일단 탐색부터.’
그의 몸이 산 아래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성물 센텐티아와 자신의 목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리첸티아, 중앙 신전에서 수집한 테라와 플람마.
그리고 이후 두 달 동안 최소의 동선으로 움직여 두 개의 성물을 더 수집한 것은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때는 동료였던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을 뿐.
다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성국의 새 지휘부가 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이제 그, 혹은 다른 누군가가 봉인된 성물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야.’
팟.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반응한 성력이 그의 주변에 투명한 결계를 쳤다.
우우웅.
동시에 목에 걸린 성물 리첸티아가 반응하며 결계를 원래의 수준에서 몇 배는 증폭시켜 그의 기척을 완전하게 차단해 주었다.
최근에 깨달은 이 저주받은 물건의 유일한 활용 방법.
그것은 바로 인식 저해와 신성 결계 강화였다.
‘하늘과 자유의 신의 성물이…….’
새삼 신들의 이중적인 작태가 떠올라 신물이 나올 정도였다. 신을 배신한 지금, 아니, 신이 자신을 배신한 지금도 성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반응한다는 것에도 쓴웃음이 나왔다.
아마 지금이라면 전설의 대도(大盜), 베일 쉐도우 이상의 은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오러마스터나 대마도사가 아닌 이상 감지 못 해.’
하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속도를 한층 높였다.
‘평생 이렇게 능력을 활용할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어쩔 수 없다.
평생을 바쳐 왔던 신앙이 거짓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각오한 길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은 신의 위협에 노출되는 일이 없길 바랐기에.
나아가, 그 자신도 한때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만큼 절대 말로써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행동으로 나선 것뿐이다.
‘이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저 이곳과 다른 두 곳의 성물을 모두 회수할 때까지.
‘교단의 형제자매들을 상하지 않게 하고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
기도할 곳을 잃은 과거의 성직자는 텅 빈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들어주는 이 없는 바람을 되뇌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반드시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듯, 땅끝의 신전이라 불리는 토레 신전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저건…….’
얼핏 보이는 신전의 입구를 지키는 성기사부터 주변을 순찰하는 병사들까지. 토레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신전 병력의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을 끌어모은 듯했다.
결계를 다시 한번 점검한 하먼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직 날도 추운데 이게 뭔 고생이야.”
“그러게.”
“이유가 뭐래?”
“나도 몰라. 그냥 엄중히 경계하라고만 하던데.”
“가이아랑 린든의 형제들은 왜 온 건데?”
“낸들 아냐? 대주교님이 말을 안 해 주시는데. 저들도 모르는 눈치야.”
신전 주위를 순찰하는 무리.
그 가장 앞에 선 성기사들의 대화가 이 상황을 단숨에 이해시켜 주었다.
이미 성물을 도난당한 린든과 가이아의 신전 병력까지 토레에 집중시킨 듯했다. 다만 성물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아서 성기사들이 저런 말을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하먼의 안색이 대번에 흐려졌다.
‘이거 힘들겠는데…….’
성물을 훔쳐 내는 게 힘들다는 뜻이 아니었다.
전보다 꽤 격하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상급 오러유저의 무력에, 신성력과 리첸티아로 발휘한 초월적인 은신 능력까지 있다.
다만 신전의 사제나 병력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힘들겠다는 뜻이었다. 잠입은 둘째 치더라도 성물의 봉인을 깨려면 힘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때부터는 은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어찌한다…….’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신들의 영혼 강탈.
신앙심이 투철한 사제일수록 쉽게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악랄한 수법.
그것을 막기 위해 교단의 형제들을 해친다는 게 본말전도는 아닌지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은 잠깐이었다.
‘……물러설 수는 없어.’
습관적으로 떠올린 대의가 지금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란 것을 자각한 것이다.
삶을 낭비한 것도 모자라 영혼을 저당 잡힌 상황.
그것을 신들이 강림할 수 있는 통로를 없애는 것으로 복수하겠다는 애초의 다짐이 심중의 갈등을 없앴다.
자비와 용서.
신전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두 가지는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서 머물 자리가 없었다.
적어도 신들을 상대로는.
‘희생은 최소화하되, 불가피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다.’
턱이 아릿할 정도로 이를 간 하먼이 주먹을 쥐는 순간.
그의 몸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신전의 담장을 넘어섰다.
리첸티아를 통한 성력 결계의 은신.
거기에 오러유저 특유의 초인적인 움직임은 신전을 지키는 수많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하지만 거침없이 질주하던 하먼의 몸은 중앙 신전의 대예배실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끼이이이익.
막 예배실의 커다란 문을 열고 나오는 성기사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경계를 강화하라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신전에 가져갈 만한 게 뭐가 있다고.”
“왜 없어. 헌금함이나 주교님들 사저에 쌓인 금품 같은…….”
“아……. 그건 그렇지. 근데 우린 왜 여기를 지키고 있는 거냐고.”
“내 말이…….”
“헌금함은 이미 옮겼고, 주교님들 사저 쪽이나 순찰할까?”
“대주교님이…….”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성기사들을 보며 하먼은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흡.
하먼의 몸이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도약해 성기사들이 나오는 문틈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지나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끼이이익.
탁.
그나마 착지할 때의 실수로 인한 작은 소음조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버린바.
‘휴.’
하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예배실 안을 둘러보았다.
우우웅.
이내 그의 목에 달라붙은 리첸티아가 반응을 보였다.
‘저쪽이군.’
경험상 성물은 자신의 다른 형제가 있는 방향을 향해 반응을 보였다. 하먼은 그 반응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런, 누가 있다.’
예배실 구석, 1인 기도실로 보이는 문 앞에서 하먼은 그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야 할까?’
사제는 신성력의 특성상 소비한 성력을 기도로 회복한다. 지금 자신처럼 성물을 몸에 달고 있는 게 아닌 바에야 불가피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안에 있는 자가 고위 신관이라면, 최악의 경우 삼 일 밤낮을 기도만 할 수도 있다.
봉인을 마주하기 전부터 은신을 깨야 할 상황.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아냐.’
하먼의 선택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신속했다.
쾅!
“……?!”
기도실의 문이 갑작스레 부서지자 고개를 돌리는 노사제.
그 놀란 얼굴을 보는 순간 하먼은 다시 한번 갈등했지만, 그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뻐어억.
“허으…….”
“……미안합니다, 달란 대주교님.”
털썩.
노사제는 그의 사과를 듣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했다.
명치를 후려친 건틀릿에 실린 포스가 신성력까지 뒤흔들었을 테니, 아무리 대주교라 한들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반응으로 보아서는 자신의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미 의심받고 있을 터인데, 증거를 인멸하자고 안면이 있는 사제를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하먼은 오히려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을 탓하며 조용히 좁은 기도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교묘하게 감춰진, 하지만 성물에는 쉽게 반응하는 장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달칵.
드르르륵.
숨겨진 버튼을 누르고 신상을 잡아당기는 것만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몇 번이고 경험한 일과 유사한 광경.
하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계단을 밟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저벅저벅.
그리고 그 발소리의 울림이 점차 없어진다 싶을 때, 횃불 하나 없이 온통 새까맣기만 하던 공간을 밝히는 빛이 보였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성력을 뿜어내는 성물.
그 신성력을 볼 수 있는 자에게는 태양 빛보다 환한 길잡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밝은 빛.’
그 빛을 따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먼은 특이한 형태의 성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의 주먹만 한 금화. 새겨진 문장이라고는 9가지 색의 동심원 하나뿐인 금화가 지하의 어둠을 밝히며 허공에 떠 있었다.
금과 상업의 신, 아게론의 성물 아우룸(Aurum).
‘성물 이름이 그저 금화라니.’
이제야 직시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어쩌면 아게론이야말로 9대신의 이기적인 측면을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진작 사라져 버린 신앙심이 새삼 바닥나는 것을 느낀 하먼은 피식 웃으며 성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보단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는 성물은 마치 다가오는 하먼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점차 강한 빛을 발산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신의 목소리 같아, 하먼은 절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봤자 의미 없을 것이오, 아게론.”
자신을 버린 신에게 고하듯 한마디를 뱉어 낸 하먼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성물에 건 봉인은 공식적으로는 교황의 허락 없이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공간 그 자체를 베어 내는 권능에는 저항하지 못하지.”
이미 세 번째 하는 일이었다.
하먼의 검이 망설임 없이 휘둘러지며 황금빛으로 뒤덮여 있던 공간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번쩍.
꽈아아아아아앙!
봉인을 베어 낸 검격이 공중에 떠 있던 성물까지 강타하자, 사람 주먹만 한 금화가 그대로 벽에 파묻혔다.
그 모습을 보며, 하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안 되는가.”
봉인뿐만 아니라 성물 자체를 박살 내려고 시도해 본 일격은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로건 왕에게 가져가면 그는 파괴할 수 있을까.’
그 젊은 천재라면 이제는 오러마스터의 힘을 완숙하게 다룰 수 있을 터. 지금껏 오러마스터가 성물을 파괴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남은 성물 2개는 대륙의 동쪽 끝으로 가야 얻을 수 있다. 세상이 전쟁으로 시끄럽긴 하지만, 그들의 인연이라면 한 번쯤 만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먼은 그리 생각하며 벽 속에 처박힌 커다란 금화를 억지로 잡아 뽑았다.
우우우웅.
반항하듯 진동하는 금화에서 한층 강렬한 황금빛이 뻗어 나왔지만, 하먼은 그저 무시한 채 금화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성물의 봉인이 깨어지는 순간 신전 전체에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이질적인 성력 때문에 인식 저해 결계도 칠 수 없는 상황이다.
신전의 사방을 지키던 인원으로 보아, 들어올 때와는 달리 나갈 때는 혈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최대한 희생을 줄이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피를 볼 수밖에 없겠지.
하먼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 같은 신의 종을 향한 살기. 됐다. 드디어 네놈이 선을 넘었구나.
– 이제는 더 이상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종아.
아우룸과 리첸티아.
두 가지 성물에서 들려오는 두 가지 목소리.
특히나 스스로 영혼의 절반을 봉인하면서 소통을 끊어 냈던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하먼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온전한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육체를 다시금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이익! 어, 어림없다!”
– 어림없는 건 네놈이다, 어리석은 종아. 그동안 참으로 참담한 짓을 저질렀어.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네 영혼은 무간지옥에…….
– ……지브릭의 부활이 머지않았다, 아게론. 인간 한 놈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또, 또다시 농락당할 것 같으냐!?’
까드드드득.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신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하먼은 다시 자신의 영혼을, 육체를 제어하기 위해 애썼다.
– 허어. 이놈이 아직도 반항을?
우드득.
온몸의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먼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 내 몸의 주인은 나다!!”
– 이런 어리석은…….
“절대, 절대 굴복하지 않아!”
신들의 신랄한 비웃음에도, 잔뜩 핏발이 선 하먼의 눈동자에 실린 기세는 더욱 강렬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 대주교님이 당하셨다!
– 아래다! 침입자다!
그의 머리 위에서 수많은 신전 병력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하먼은 그 목소리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벌게진 눈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이었다.
‘서, 성물을 부숴야 한다. 신들이 강림하지 못하게. 로, 로건 왕. 제발……!’
그 멀리 어딘가에 있는 한 사람을 상상하며.
저벅.
하먼은 온몸에 핏줄이 튀어나온 몰골로 간신히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