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1)
451화
“뭐라?”
“배교자 하먼 킬러브루를 사로잡는 것을 도와주십사,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로건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노사제.
스스로 루스펠하임 신전의 대주교, 라임달이라 소개한 노사제의 말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배교자.
“그 신검이 배교자라…….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만 들었을까.
그 가장 큰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기까지 했다.
다만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먼 같은 실력자가 대놓고 쫓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물을 모으겠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물론,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말에 대주교 라임달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대주교가 된 이래 그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고개 숙이는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어색한 상황에 당황하는 와중에도 답변은 빨랐다.
“중앙 신전의 일이라 자세한 사실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임시 교황이신 오스틴 성하의 ‘부탁’을 전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로건이 피식 웃었다.
“이유는 알 것 없고, 신전의 말이니 그저 따르라?”
“아니, 아니옵니다! 어찌 맥라인의 태양께 감히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다. 정말 간곡히, 정중히 드리는 부탁의 말씀뿐입니다.”
“그렇다면 거절해도 되겠군요.”
“……예?”
노사제의 부릅뜬 눈을 보며 로건은 차갑게 웃었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의문이지만, 우리가 전쟁 중이라는 것을 신전에서는 모르고 있나 보오.”
로건이 그리 말하며 돌아서자, 연무장 공간 전체를 후끈하게 몰아치던 황금빛 오러가 그제야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텅.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갑옷을 가볍게 내리치는 건틀릿,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검.
라임달이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결코 로건의 신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의 진행 상황을 보고 받는 시간 외에는 상시 연무장에서 수련을 이어 가는 로건.
그런 그를, 아득바득 우기다시피 해서 찾아온 것이 라임달이었다.
“무,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가 ‘치유사’들을 지원해 준 성의를 봐서라도…….”
“전쟁을 앞두고 신검을 잡기 위해 정예를 내어 달라?”
“……그리해 주신다면 신전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웃기는 소리군요.”
“예?”
피식.
‘차라리 하먼을 도우면 도왔지, 신전을 도울까.’
심정 같아서는 그렇게 솔직히 말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신전과 대놓고 척을 지는 건 너무 무리수였다.
하지만 굳이 숙이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꿇릴 게 없지.’
어차피 ‘임시’ 교황은 이전 교황이 내린 명을 거두지 못한다.
그 말인즉, 현재 치유사라는 얄팍한 눈속임으로 맥라인군과 함께하고 있는 종군 사제들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 있을 거라는 뜻이다.
전대 교황이기도 했던 오스틴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는 절대로 규칙을 우회하여 꼼수를 부릴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주교를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기에, 국왕으로서 로건이 할 말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전쟁을 앞둔 이 시점에 엄한 곳에 국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맥라인은 일전에 성국을 도와 노비엔스를 지킨 만큼 이미 도리를 다했다고 여겨지는바. 신전도 사정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반말로 시작된 말이 예를 갖춘 반공대로 끝났다.
일국의 왕, 더구나 대륙의 대세로 떠오른 맥라인의 왕이 그렇게 말한 판국에 더 따지고 드는 건 대주교의 신분으로도 버거운 일이었다.
사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니만큼, 라임달은 그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굳이 지금 이 시점에 나를 찾아왔다는 건 신검이 이 근처에 와 있다는 겁니까?”
“……예. 정확히는 왕국의 카일 성을 그의 목적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 그곳에서 다소 소요가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일?”
거긴 또 왜?
그 시선을 받은 대주교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돕지 않겠다 하셨으니 더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폐하.”
아마도 대주교 나름의 낚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건으로선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에 걸려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시지요.”
“……예. 그럼.”
로건은 그냥 가볍게 고개를 저음으로써 호기심을 털어 버렸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했다.
그리고 대주교가 연무장을 나선 뒤, 심각한 안색으로 고민에 잠겼다.
‘하먼 경 같은 실력자가 홀로 움직이면서 목적지를 노출한다고? 더구나 카일엔 왜?’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얼마 전 갑작스레 자신을 엄습했던 그 묘한 답답함이 다시금 가슴 한편에 자리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느낌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신들의 이면과 자신이 얽힌 위험성을 알고 있는 와중에 하먼의 이런 돌발적인 행사가 자신과 아예 관계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니까.
어쩌면, 얼마 전 느낀 그 정체 모를 답답함도 이 일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9대신…….’
막연한 불안감에 연상되는 주체가 너무나도 컸다.
자연스레 결론은 하나로 이어졌다.
도와야 한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티 나지 않게 하먼 경을 도울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 * 루스펠하임의 제국민들은 어느 순간 무서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통제를 따르라. 그리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엄포나 포고문, 혹은 기사나 병사들이 소리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때려 박히는 정복자의 목소리.
소문으로만 들었던, 혹은 멀리서만 보았던 ‘대륙제일인’이 직접적으로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예, 예. 물론입니다! 물론이지요!”
“여보, 갑자기 무릎은 왜 꿇…….”
“당신도 빨리 해!”
“아, 아니. 그렇게 무서운 느낌은 아닌데…….”
“아, 쫌!”
하루하루를 불안감 속에서 떨며 지내다 이제야 조금씩 진정이 되어 가던 때.
어느 날 갑자기 뇌리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루스펠하임의 시민들은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집 안이건 길가건 상관없이.
실제로 맥라인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 대다수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이적에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따르겠다 맹세했다.
놀랍게도, 그 후부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꽃 문양을 새긴 정복군도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미묘한 안정감을 느낀 것이다.
그간 극도의 긴장감에 시달리던 루스펠하임의 시민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그 작은 안정감이 계속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한 호감으로 변했다.
다음 날 아침.
[루스펠하임의 시민들이 모이는 것을 막지 마라. 무기 소지만 금지한다.]또다시 뇌리에 울려 퍼지는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지배자의 목소리에 어찌 농간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의 공포 속에서 떨던 시민들은 하나둘 굳게 걸어 잠갔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어? 괜찮네?”
끼이이익.
조심스레 거리로 나서는 시민들.
그들은 곳곳에 퍼져 있는 맥라인 병사들의 감시 속에서 간만에 지인들을 만났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그 목소리의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신이 내린 영웅이라더니 정말인가 봐.”
“그래. 어떻게 이런 안정감이…….”
“신전에서도 이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야, 그건 너무 갔잖아.”
“틀린 말은 아니…….”
웅성웅성.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루스펠하임의 거리.
시민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맥라인군에 대한 적의가 눈에 띄게 줄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성에 있는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힘이 되었다.
우우웅.
“믿음의 힘이라……. 이게 정말 가능한 거였다니. 정작 내가 믿기 힘들군.”
로건은 밤샘 수련으로 바닥난 포스가 미친 듯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포스가 회복되는 게 전부도 아니었다.
미미하지만 확실하게 고양되는 영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격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아직은 영혼의 힘을 최대한 끌어 올려도 이 도시 하나 정도를 감각권 안에 두는 것인 한계였다.
하지만 그것이 몇 배, 몇십 배로 커진다면.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를테면 맥라인 본토라면.
‘오러마스터의 한계.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게 이젠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
왜 검신이나 다른 오러마스터들은 한계를 넘지 못했는지 의아했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대번에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역대 오러마스터들 중에 왕은 없었지.’
유사 이래, 기록된 오러마스터는 불확실한 전설까지 쳐도 다섯에 불과했다.
고대에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다는 최초의 오러마스터.(아마도 검신의 전설이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7백년 전 마수림의 확장을 저지하고 마왕을 침묵시켰다는 영웅, 마왕 슬레이어.
5백년 전 아레스 왕국에 나타나 제국의 반석을 세운 전신(戰神), 브렌 디카이드.
2백년 전 아레스 제국의 서부 확장 전쟁을 저지했던 가이아 왕국의 수호자, 솔론 이레오.
그리고 전생대로 흘러갔다면, 20여 년 뒤 그 경지에 올랐을 제롬 디카이드.
전생의 경우까지 포함했음에도 고작 다섯이다.
이름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검신이나 마왕 슬레이어는 차치하더라도, 나머지 셋 모두 왕이나 황제의 부하였다.
어떤 공을 세워도 병사들의 마음이, 신민들의 마음이 당사자에게 오롯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 이전, 염원의 힘을 가졌다고 하는 검신조차 결국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하니 아마 그 추측이 가장 타당할 터였다.
“그래. 그렇겠지.”
거기다 자신이 이 힘을 생각보다 훨씬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회귀할 때 주어진 염원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일지도…….
“뭐가 그렇다는 겁니까, 폐하?”
한없이 이어지려던 상념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하나에 와장창 깨어졌다.
“아…… 기다리게 했군.”
순간 잊고 있었던 데미안이 초조한 안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예. 그 중요한 말씀이 뭔지 빨리 좀 말씀해 주십시오. 너무 걱정돼서 벌써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농담만은 아닌지 창백한 안색의 데미안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왕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하는 말 치고는 참으로 예의 없는 어조에 태도였지만.
“……뭐 그렇게 걱정할 것까지야.”
지은 죄가 많은, 그리고 또 지을 예정인 왕은 그저 시선을 멀리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순순히 수긍하시는 거죠? 시선은 또 왜 돌리시는 거고요? 이젠 정말 미친 듯이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뭐든 간에, 진짜 안 됩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든요! 아무튼 안 됩니다!! 최소 두 달 뒤면 전쟁이 시작된다고요!”
얼마 전까지 든든한 책사의 모습을 보여 주던 데미안이 갑자기 어린애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로건으로선 절로 헛웃음을 새어 나왔다.
‘촉이 너무 좋아도 탈이군.’
게다가 이 녀석, 아무래도 점점 릭이랑 닮아 간다.
‘너무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를 해 둬야겠어.’
반대할 걸 알았지만, 그 반응이 너무 과격하여 로건도 잠시 현실 도피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향한 간절한 눈빛을 보며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나 ‘아주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대역 좀 만들어 봐. 몇 번 해본 릭은 그랑에 있어서…….”
“폐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데미안의 절망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