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2)
452화정예를 동원하지 않아도 되고, 신전과 마찰을 빚더라도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소수 혹은 한 사람.
로건은 그런 사람을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자신.
‘어쩔 수 없어.’
전쟁이 코앞이라고는 하나 신들과 연관된 불길한 예감을 그냥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전쟁 준비를 위한 지시는 모두 끝낸 뒤 수련에만 집중하던 무렵이다. 자신이 홀로 다녀오는 것이 하먼 경을 위해서도, 맥라인을 위해서도 좋다.
로건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팟.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밟고 수십 미터를 이동해 다른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데에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실 지금으로선 허공을 질주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이런 숲길을 택한 것이었다.
– ……아세리안 부근부터 신전 병력과 싸워 가며 카일을 향해 직진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직진이에요.
– 대로를 타는 것도 아니고, 산길을 타는 것도 아닙니다. 산이 있으면 넘고, 강이 있으면 그냥 건너면서 카일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고 있어요. 중간에 가로막는 것들은 모조리 부수면서요.
처음에 발작하듯 날뛰던 데미안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알려 준 정보.
– 당연히 정상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길이 길인 이유는 그렇게 가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초인인 신검의 능력을 생각하더라도 이동하는 방식이 너무 과격했다.
멀지 않은 곳에 다리를 두고 강의 나룻배들을 박살 내 가며 질주한다거나.
눈앞에 나타난 숲을 나무를 베어 가며 일직선으로 통과해 버린다거나.
따라붙은 성국의 병력이나 이동하는 경로에 자리한 도시의 병사들을 모조리 쓰러트린다거나 하는 짓은 그의 성미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이성이 없는 것처럼’
– 하먼 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확실합니다.
신검을 아는 이라면 모두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이라면, 그 움직임이 너무도 단순하기에 로건 혼자서도 그를 따라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슬슬 이정표들도 하나둘 보이고 있었다.
“전부 준비해! 배교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예!”
순백의 갑옷에 동심원이 그려진 문양을 새기고 있는 기사들.
수백의 신전 병력이 어두운 숲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대놓고 횃불을 켜고 목책까지 세우고 있었다. 아예 몇 날 며칠 동안 주둔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주변에 마땅한 도시도 없는, 대로조차 아닌 숲속에서 신전 기사들이 전투를 위한 진영을 만드는 광경.
어둠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괴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적어도 로건에게는 확실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역시 이 방향이었군.’
루스펠하임에서는 동북쪽, 카일에서는 서북쪽으로 일직선을 그으면 만날 만한 지점.
더하여 서북쪽으로 향하는 성기사들의 시선은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그 방향에서 오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었다.
“명심해! 우리는 시간만 끌어도 된다!”
“예!”
“배교자를 쫓고 계신 분들이 있다. 우리가 모루, 그분들이 망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예!”
“절대 물러서지 마라! 순교는 미덕이다!”
“예!”
최상급기사 수준으로 보이는 수위기사의 호령이 살벌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대다수가 중급기사 이상의 수준으로 보이는 성기사들의 대답은 흠잡을 데 없이 정석적이었다.
한눈에도 평기사 수준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걸 보니, 제국 동부나 맥라인의 신전 기사 중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죄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초인의 수준도 한참을 초월한 로건으로선 그들의 실력보다는 그 행태가 더 눈에 들어왔다.
‘싸우다 죽으라고 말하는 놈이나, 그러겠다고 하는 놈이나.’
9대신에 대한 반감이 생긴 뒤라 그런지 성기사들의 맹목적인 행태가 소름 끼치게만 느껴졌다. 물론 그 꼴을 그냥 감상하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목책까지 세운다면 적어도 하루 이틀 거리는 아니야.’
이곳에서 성기사들과 싸우는 것은 괜한 변수만 만들 뿐이다.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몸이 바로 움직였다.
팟.
높다란 나무의 꼭대기,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조금 흔들린다 싶더니 로건의 몸이 그대로 밤하늘을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향했다.
횃불의 불빛이 미치는 범위를 절묘하게 돌아가는 움직임.
이미 그 운신법의 창시자를 넘어선 움직임은 말 그대로 귀신의 그림자 같았다. 굳이 조심스레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짙은 어둠 속엔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천천히 가자.’
방향이 확실히 정해졌다 하더라도 찾고자 하는 대상이 초인 중의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길이 엇갈릴까 싶어, 로건은 거의 반나절가량을 감각을 극대화한 채 내달렸다.
그리고 이내, 굳이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었음을 깨달았다.
– 콰아아아아앙!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폭음과 그 사이로 충천하는 은빛의 오러.
익숙한 기세, 익숙한 영혼의 힘.
두말할 것도 없이 하먼이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로건은 다시금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외모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빅토리아가 만들어 준 아티팩트는 그 스승의 것보다 효율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남은 것은…….
‘오러의 색은 붉은색이 좋겠지.’
이미 몇 번이나 해 본 일이지만, 역시나 한 단계 낮은 출력이 나왔다.
포스의 색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본질을 외면한 채 억지로 여력을 쥐어짠다는 뜻이니, 사실 격이 한 단계 격하되는 수준에서 그친다는 게 신기한 수준이었다.
물론 지금 그의 경지에서 수준이 격하되어 봤자 오러유저 최상급이다. 대륙 내에서 대항할 자가 몇 없는 수준이었지만, 생각해 둔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먼 경이 제정신이 아니라 나까지 공격하면?’
이 수준으로는 조금 곤란할 것 같았다.
자신은 상대를 상처입히지 못하는데, 상대는 나를 일방적으로 공격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겠군.’
빅토르가 전해 온 정보, 현재 하먼의 상태가 그 사도라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면 실력을 드러내서라도 하먼을 선점(?)해야 한다. 목격자를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하먼에겐 미안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지켜봐야지.’
영혼을 볼 수 있는 지금이라면 오판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물론 최상의 상황은 하먼이 자신을 알아보고 힘을 합하는 것이겠지만.
로건은 제발 일이 쉽게 풀리길 바라며 폭음이 터져 나오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 아니 영파가 있었다.
[……로건 왕!]음?
* * *
“막아!”
새하얀 머리에 새하얀 눈썹, 깔끔한 외모.
성전기사단의 세 부단장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성령의 기사, 스테판 로이어의 모습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 말에 따라 찬란한 은빛의 카이트 실드를 들어 올리는 작고 단단한 체격의 기사는 같은 부단장인 아스트로 하이젠.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그 옆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키보다 큰 창을 찔러 넣는 비쩍 마른 기사는 또 다른 부단장, 성창(Saint Spear) 앤소니 에버렛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자는 한때 그들의 유일한 상관이었던 신검이었다.
“정신 차리시오, 단장!”
콰아아앙!
말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아스트로 부단장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런 그의 눈에는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안타까운 빛이 가득했다.
“사정을 봐주지 마라! 놈은 배교자다!”
그러나 한때는 선배로, 또 한때는 부하로 신검과 함께 끝없는 미담을 생성했던 스테판 로이어의 푸른 눈동자는 싸늘하기만 했다.
“죽어라, 배교자!”
스테판의 명에 따라 한때는 신검의 후계자라 불리던 성창이 하먼의 급소를 노렸다.
콰아아아앙!
요란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지만 성과는 없었다.
형편없이 튕겨 나간 앤소니의 마른 몸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척 보기에도 내상이 상당한 듯했다.
호기로운 기합과는 전혀 다른 추태.
반면 앤소니를 튕겨 내고 다시 아스트로의 방패를 맞이하는 하먼은 다소 지친 기색은 있을지언정 멀쩡하기만 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는 그들이 대륙 최고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검, 하먼 킬러브루였으니까.
지금 그들이 이렇게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몇 가지 요인이 겹쳐진 덕분이었다.
하나는 그들의 뒤편에서 기도문을 외우는 수십의 성기사와 수백의 사제들.
그들이 뿜어내는 신성력이 부단장들을 돕고, 하먼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하먼이 오랜 기간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한 채 쫓기느라 기력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신검의 신성 오러는 그들이 아는 전성기의 모습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비켜라!”
콰아아앙!
“나는 가야 한다!”
뻐어억.
쾅!
좌우에서 일제히 덤벼드는 부단장들을 튕겨 내는 하먼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희번덕거리는 눈, 산발한 머리 아래 나오는 말은 딱 두 마디뿐.
“비켜라!”
“나는 가야 한다!”
정작 싸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지금도 공격을 막아 내는 순간순간 동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쾅!
주르르르륵.
“더 이상은 무립니다, 스테판 경!”
입에서 핏물을 왈칵 토해 낸 아스트로의 말에 스테판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창을 들고 돌격했던 앤소니는 이미 전장을 이탈해서 다른 사제의 치료를 받는 중이었고, 자신 역시 초전에서 입은 심각한 내상을 다스리느라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벌써 몇 차례나 반복되어 온 광경.
‘또 놓아주어야 하나.’
애초에 하먼에게 가졌던 존경심만큼 배신감이 큰 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한 성력을 가진 자가 정말 검은 뱀의 세뇌에 당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더구나 그로 인해 정작 주적인 검은 뱀을 쫓아야 할 교단의 정예들이 전부 그를 쫓고 있었다.
그랬기에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건만,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식사는커녕 물도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적이 어찌 저리 생생하단 말인가.
자신들 셋이 부상을 치료하느라 잠시 그를 놓아 보내 준다면, 그만큼 놈을 막아야 할 다른 형제들의 희생만 커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번에는 놈이 더욱 지치기만을 바랄 뿐.
“어찌하여 신들께서는…….”
저 배교자에게 저만한 성력을 용납하시는가.
스테판은 차마 입 밖으로 뱉어 낼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삼키며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신전 기사들이 이미 몇 번이고 해 온 대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열어라!”
“추격조 따라붙어!”
“대기조들에게 연락해!”
그리고 이내.
“나는 가야 한다!”
방해꾼이 사라진 하먼은 그대로 동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콰아아아앙.
눈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을 신성 오러로 박살 내는 광경도 이제는 익숙하기만 했다.
“추격조 돌입!”
“예!”
그리고 그 뒤를 쫓아 뛰어가는 성기사들까지도.
그 익숙하고도 씁쓸한 광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스테판은, 이내 부릅뜬 눈으로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아아악!
– 습격자다!
– 오, 오러!
추격조가 돌입한 곳에서 선명한 붉은빛과 함께 비명이 들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