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4)
454화 ‘하……?’
하먼의 영파도 느껴졌지만, 검을 겨누는 것을 보면 주도권을 잡은 건 분명 신들이다. 하먼의 몸 안에서 그의 영혼을 잠식하려 들던 신들이 잠시 방향을 틀어 로건에게 전의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아마도 여태 하먼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그저 그의 영혼을 집어삼키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싸울 순 없지.’
탁.
[지브릭의 영혼은 내가 소멸시켰다. 신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그조차 알지 못하는가.]확고한 의지가 담긴 로건의 영파가 하먼과 신들의 영혼에게 전해졌다.
한 점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오롯한 진심.
하지만 신들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웃기지 마라. 지브릭은 신성을 손에 넣은 불멸의 영혼.] [네가 가진 염원의 힘이 현세를 바꿀 수는 있을지언정, 신성을 침범할 수는 없다.]번쩍.
하먼의 검 끝에서 뿜어진 빛이 일대를 뒤덮은 순간.
그 속에서 피어난 황금빛이 은빛 파도를 가르며 솟구쳐 올랐다.
콰콰콰콰콰콰!
숲의 일각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흙먼지조차 일어나지 않는 깔끔한 소멸.
그 파괴의 빛 속에서 찬란한 황금빛으로 몸을 지킨 로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분명 지브릭 카셀의 성물을 파괴하고 그의 혼을 박살 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지속적으로 상대를 향하는 영파.
붉은 눈 안에서 일렁이는 황금빛은 로건이 영혼의 힘을 극도로 끌어올렸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단순한 말이 아닌 영혼이 전하는 메시지. 그 안에 담긴 진의 역시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로건으로선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하는 각오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지만, 신들은 그 모습에 한층 분노할 뿐이었다.
[지브릭이 물러난 것이겠지! 그자 또한 염원의 힘은 모르는 반쪽짜리에 불과해.] [우리는 다르다.]역시…… 그랬나.
신들의 영파는 로건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다만 문제라면, 이 상황의 타개책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번쩍.
콰아아아앙!
또다시 사위를 뒤덮는 빛줄기.
‘빌어먹을.’
그 빛줄기에는 한때 카일 성을 박살 낼 뻔했던 대마법과 비슷한 종류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규모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일 개인을 지우기에는 충분한 소멸의 힘.
지금도 이리 위력적일진대, 만일 하먼이 신에게 완전히 잠식되고 나면 어찌 될 것인가.
로건조차 절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지지지지지지징.
콰콰콰콰콰.
그 힘은 로건이 정면으로 내뻗은 검 끝, 황금색 오러블레이드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 나가며 애꿎은 숲만 가루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로건의 안색이 살짝 상기되었다.
‘……된다.’
그때처럼 염원의 힘을 소비하는 빛 가르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인과를 반전시킬 필요 없이, 그저 ‘동등한’ 격으로 신들이 쏟아 내는 힘을 막고 있을 뿐.
루스펠하임에서 확신하게 되었던 가능성이 지금 이 순간 확실히 개화한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
오러마스터의 전장 지배를 겪으며 깨달은, 염원의 힘을 끌어모아 영혼의 격을 높이는 방법.
그것에 신들이 의도치 않게 보여 준 모순적인 에너지 활용의 과정이 더해지며, 단숨에 오러마스터의 한계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비하면 격이 한 단계 상승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이 이상도…….’
그렇기에 로건은, 그 쏟아지는 힘 속에서 그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오히려 눈에 더욱 힘을 집중했다. 지금 신들이 하먼의 육체를 통해 쏟아 내는 공격 또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광경을 거치고 있었으니까.
‘포스로 마법을 쓰는 것처럼…….’
검을 들고는 있지만, 이미 검술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하먼의 힘을, 하먼의 육체를 이용해 그들의 방식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일 뿐.
황제가 보여 준 공격보다 확실히 강력하고 격이 높은, 마법으로 치자면 8클래스 수준의 공격.
‘이런 게 가능하다니…….’
그것은 포스를 생명의 힘으로 변용했던 에너지의 활용과는 또 다른 의미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로건은 좀 더 집중력을 발휘해 그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했다.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대에 신인의 경지를 넘어 그야말로 신이 되었다는 영혼들의 수법을 훔치기 위해.
‘이것만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도…….’
모든 염원을 이룰 수 있다.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스사사사사.
점차 빨라지던 공격은, 종국에는 간격도 없이 그저 새하얀 파멸의 빛이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그저 버티고 서서 갈라 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압박감이 끊임없이 무게를 더해 가며 전신을 짓눌렀다.
그 과정에서, 로건의 방어 역시 점차 견고해졌다. 마치 상승한 격을 다져 나가는 것처럼, 쏟아지는 공격을 버텨 내면서 한층 튼튼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과연…… 지브릭이 화신으로 점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인가.]음……?
순간적으로 신의 영파 속에서 느껴진 이상한 괴리감.
그것이 한없이 집중하고 있던 로건의 이성을 일깨웠다.
하지만 그 괴리감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상황이 급변했다.
[……이 육체를 소멸시키더라도 여기서 없애야 한다.] [네 사도가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욕심을 버리고 상황을 직시하라, 아리아.] [……승낙하겠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신들의 의지는 거의 찰나에 교환되었다.
그리고 이내.
[소멸하라!!!]쩌렁쩌렁한 고함이 영혼을 강타한다 싶더니, 하먼의 육체 속에서 신들의 영혼이 일순간 팽창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까지는 거인이 작은 공간을 부수지 않기 위해 몸을 억지로 구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 공간, 즉 하먼의 육체를 배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영혼의 팽창이었다.
‘무슨……!?’
그 순간에야 로건은 다시 위기감을 느꼈다.
‘이런 빌어먹을!’
격이 상승하는 기쁨에 취해 순간 상황을 잊고 연구나 하고 있었다.
최근 부쩍 느끼고 있는 격의 상승에 따른 전능감.
그 고양감에 흠뻑 취한 나머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강적을 앞에 두고 때아닌 여유를 부린 꼴.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성공만 해 왔다고.’
스스로에게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특성을 발동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혼과 영혼의 힘이 부딪치는 공간, 한없이 가속된 시간 속에서도 그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심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특성으로 벽을 뛰어넘는다 한들 둘 중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 듯했다.
그 아득한 격차가 주는 절망감이 정신을 지배하려 할 때, 전면을 뒤덮은 새하얀 빛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건…… 폐하!]금발에 푸른 눈,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동네 아저씨 같은 평범한 얼굴의 기사.
하지만 한때는 대륙 최고를 다투었던 최강의 기사, 하먼 킬러브루의 환영이 새하얀 배경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하먼 경?]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대로 사과드릴 시간은 없겠군요.] [허?]그 말처럼, 기사의 환영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명멸을 반복했다.
[한 번, 딱 한 번 기회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부디 놓치지 마십시오.] [무슨……?]당신이 어떻게.
미처 내뱉지 못한 의문에 하먼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리아 님이 먼저 해내신 일입니다. 그럼 저도…….]스륵.
마침내 기사의 환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번쩍!
온통 새하얗기만 하던 눈앞에 숲의 정경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하먼의 칼끝에서부터 다시금 빛이 터져 나오며 일순간 시야를 백열시켰다.
하먼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 생기고, 멋들어진 금발도 새하얗게 변하는 광경이 배경처럼 보일 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로건을 강타했다.
아니, 하는 듯했다.
검을 내민 하먼의 오른손이 그 순간 가루로 변해 분쇄되지 않았다면.
[이런 어리석은 놈이!] [멍청한……!]신들의 고함과 함께, 쏟아지던 파멸의 빛이 일순간 수직으로 꺾여 하늘로 솟구쳤다.
쩌어어어어어어어엉!
콰콰콰콰콰콰콰콰.
그리고 그 파멸의 폭풍 앞에서, 굳은 얼굴의 로건이 평범한 철검 위로 황금빛 거인의 검을 소환했다. 특성 업(Up)을 통해 또다시 격상된 영혼이 한 박자 늦게나마 인간이, 아니 생물이 오를 수 있는 극한의 경지에 다다른 힘을 끌어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늠할 수 없는 거력이 충돌하기 직전.
한없이 가속된 시간 속에서 로건은 이 기적의 순간을 만들어 준 이의 영혼을 두드렸다.
[하먼 경!] [끝내십시오. 바라던 끝은 아니지만…….]끝없이 팽창하는 듯했던 신들의 영혼이 이제는 그의 육체를 떠난 것일까.
파멸의 빛의 주인, 아니 그 힘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 기사가 한순간 늙어 버린 얼굴로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미련이 하나 있다면.]하먼은 서글픈 미소와 함께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가능하시다면, 신들의 성물을 모두 파괴해 주십시오. 다른 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부디, 부디 부탁드립니다.]이성을 잃은 채로 한없이 질주하던 내내 외치던 말.
그것의 의미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까득.
이를 악문 로건은 높이 쳐들고 있던 거검을 내려치는 것으로 하먼의 말에 응답했다.
번쩍.
콰콰콰콰콰콰콰!
빛의 격류를 가른 황금빛 거검이 그대로 하먼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이내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치던 빛이 구름 가득한 하늘에 거대한 구멍을 뚫는 순간.
털썩.
늙은 기사의 몸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일순간 전력을 쏟아 낸 로건 역시 핼쑥한 얼굴로 그 옆에 주저앉았다.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하먼의 육체를 박살 내는 대신 신들과 성물, 그리고 하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는 데에 성공한 자의 미소였다.
또한, 그럼에도 하먼의 영혼은 구하지 못한 패배자의 미소이기도 했다. 한때 대륙 최강을 다투던 기사의 영혼은 이전에 일리아 성녀 때처럼 한없이 희미해지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그런데 그 순간.
[어찌 이럴 수가……. 폐하, 당신은 대체…….]“음?”
[이, 이거 어쩌면……. 나, 나를 성녀께 데려다주십시오! 빨리!]희미하게 꺼져 가는 영혼이 남긴 또 다른 메시지에 로건의 표정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 * * 하먼의 뒤를 쫓던 성기사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초인의 방해로 추격이 끊긴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하먼의 예상 진행 경로에서, 하늘 위로 엄청난 성력이 솟구치는 것을 사제들 모두가 목격했다.
신성력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떨어 울리는 엄청난 파동.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경배하던 사제들이 마침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한나절이 더 지난 뒤였다.
“신의 뜻이 이곳에 임하셨다!”
“성지로 선포하라!”
“경배하라!”
여력만 남은 성력으로도 늙은 사제들을 눈물짓게 만드는 흔적.
그들은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며 신들이 남긴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그 시점에 그들의 앞에 남겨진 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숲과 역시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하먼의 행방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하먼에 대한 신전의 평가는 또다시 바뀌었다.
“그분이 진정 신의 사도일 수도 있소.”
처음부터 하먼을 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나온 목소리.
물론 스테판을 비롯해 신전의 뜻을 철저히 이행해 온 자들은 그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배교자에 불과합니다!”
“그가 저지른 죄를 잊지 마시오!”
“그럼 지금 이 자리를, 이 성역을 어찌 설명하실 거요!”
하지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노사제들의 말마따나, 그 선명한 신의 흔적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자리, 모든 것이 소멸해 버린 땅 위에 새겨진 9개의 동심원.
심지어 그 동심원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성력의 여파가 아직도 사방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
“교황께서는 살해된 게 아니라 실종되신 것뿐이오!”
“사도와 그분의 실종은 연관이 없을 수도 있소이다.”
광신도라고 할 수 있는 성기사들보다 한술 더 뜨는 노사제들을 중심으로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먼을 배교자라 생각하는 이들도, 사도의 강림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러서는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찾아내!”
“신전의 모든 여력을 동원해서 그의 흔적을 찾아라!”
세상을 주무르는 거대한 세력 중 하나가 또다시 헛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