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5)
455화대륙 동부의 외진 숲에서 성스러운 빛줄기가 솟구쳤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본래라면 결코 그 빛을 볼 수 없었을 일반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성스러운’ 빛에 대해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에 박차를 가한 건 하먼의 행방을 수소문하면서 요란을 떨기 시작한 신전이었다.
신검 하먼 경이 신의 사도가 되었다.
신전에 의해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가던 소문은 사람에 사람을 거친 끝에 마침내 카셀 마탑에도 들어갔다.
“하늘까지 닿는 성스러운 빛이라……. 심지어 일반인도 보았다고?”
[예. 무시하기에는 목격자가 꽤 많고, 신전의 반응 역시 확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통신구 속 부하의 보고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톡. 톡. 톡.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노인.
하지만 아무리 상념을 이어 가도 결론은 결국 하나로 이어졌다.
“정말 사도란 말인가. 하필 이 시기에……. 이제 신들은 그럴 여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아니, 아니지. 이 시기니까 사도가 강림한 거겠지. 신성을 갈아 넣어서라도…… 그분을 막으려 하겠지. 그래, 그러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습관처럼 연기하던 웃음이 사라지고, 안색이 굳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허, 어쩔 수 없나.’
“……사도가 강림한 것으로 가정하고 계획을 다시 짠다. 의식을 서둘러라.”
[……알겠습니다.]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다시 손을 잡은 ‘동맹’이 떠올랐다.
“황제에게는? 그 후로 다시 연락이 없었느냐?”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말만 돌아왔을 뿐입니다. 탑주께서 직접 연락해 보심이…….]“어리석은 자…… 이 와중에도 체면을 찾는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탑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이제는 떳떳하게 연결할 수 있게 된 황실의 코드를 찾았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지금 통신을 하실 수 없습니다.]“……내가 직접 연락했는데도?”
[그 누구든 불가능합니다. 폐하께서는 현재 전쟁 준비로 바쁘십니다.]“허! 당장 전하거라. 지금 그 전쟁이 어찌 될지 모른다고!”
[불가합니다.]“뭐라?”
[불가하다 말씀드렸습니다.]통신구 속 황실 관리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이 담담하기만 했다.
차라리 가까이 있어 정신을 지배한다면 모를까, 그 표정만 보고 무언가를 짐작하기란 노인으로서도 불가능했다.
그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유지하며, 분노에 찬 한숨을 토해 냈다.
“그 빌어먹을 전쟁의 판도가 바뀔 일이 생겼다고, 반드시 연락을 하라고 일러라. 알겠느냐!?”
[……폐하께 전하겠습니다.]저 빌어먹을 것들이.
자꾸만 무언가 꼬여 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더 이상 재촉할 방법은 없었다.
‘의식을 서두르려면 제물이 더 필요해. 그 로건 맥라인도 예정보다 빨리 그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생각의 흐름은 이내 탑에 전해지는 예언서로 이어졌다.
그 뒷부분은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역대 모든 탑주의 의견이 일치했다.
–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의 지배자들. 그 핏줄에서 우리의 신이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했다.
‘황족들을 더 잡아들여야겠어. 가능하면 1황자도.’
전승의 힘을 이은 황제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놈은 로건을 잡을 패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2황자 바로스가 반역자가 된 이후, 1황자 클리드는 아예 황성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심화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겠지. 전승을 이을 놈이 그놈 하나 남았으니.’
황위를 놓고 경쟁하던 다른 황자들은 이미 죽거나 탈락했다. 황위 경쟁전 자체가 전승의 힘을 잇기 위한 과정이니, 황제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클리드조차 폐하고 다시 다른 자식을 낳아, 후에 황위 경쟁전을 새롭게 시작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 제국은 그럴 상황이 아닐 테고.
하지만 황궁, 그것도 황제가 자리한 황궁에 잠입하려면 설령 그가 직접 나서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애써 만든 동맹이 깨어질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면…….
‘사방왕. 바로스를 축으로 하고, 사방왕의 자손들을 제물에 추가한다. 그리하면 의식이 조금 더 빨라지겠지.’
사방왕들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작업’을 해 놨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또한 지금 제국의 상황에서, 사방왕의 후계자들에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영혼과 업(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자신이 있으니, 의식의 변주에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마침, 그 후손 중에 우리의 마도사도 있지.’
탑주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 * *
“뭐라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버럭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며 루이사는 이를 악물었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로건 왕에게 전한 말을 고백했는데, 아버지의 반응이 너무도 격렬했던 것이다.
항상 웃기만 하던, 웃을 수밖에 없던 그 자리를 버린 이후에 보인 가장 극적인 감정 표현이 이런 것이라는 게 조금은 서글펐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반응은 예상했던 그대로이기도 했다.
“……아버지보다 제가 더 탑주를 오래 봤어요. 지금의 탑주는…… 이상해요. 아니, 원래 그랬는데 우리가 몰랐던 거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거라! 그는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했어! 그의 권능을, 그 이적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아버지의 단호한 표정을 본 루이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은, 어쩌면 그들 부녀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염원을 건드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올 데까지 온 마당이다.
루이사는 이미 재작년부터 품어 온 의심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보다는, 애초에 엄마의 부활이 가능한 것인지가 의심스러워요.”
“……뭐!?”
“아버지는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왕부까지 날려 가며 걸어온 길이다. 이제 와서…….”
“투자한 만큼, 쏟아부은 만큼 더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그 말에 제라드의 표정이 일변했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물질적인 것을 바치다 못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갖다 바치게 되는 과정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리대에까지 손을 대는 과정과 비슷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짓일 리 없어.’, ‘실패할 리 없어.’라는 일종의 보상 심리.
그것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이다.
분명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지 못하게,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구덩이도 피하지 못하게.
그런 의미를 담은 루이사의 일침을 제라드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한순간에 냉정해진 얼굴. 자신을 닮은, 아니 자신이 닮은 푸른 눈 속에 떠오른 희미한 회색빛 고리를 보며, 루이사는 또다시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우리가…… 그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신 적 없으세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는 내 앞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을 보여 줬다. 너도 함께 보지 않았느냐!”
“그 기억, 정확하신가요?”
제라드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허…….”
하지만 그는 이내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왕부에는 황실과 마찬가지로 정신 마법을 방비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당시에 이미 4서클 마법사였다. 그 상황에 내가 속을 리…….”
“탑주는 대마도사예요. 그것도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데에 특화된. 그리고 아버지는, 그 당시 거의 제정신이 아니셨지요. 다시 한번 물을게요. 아버지, 정말 확신하세요?”
“말도 안 되는……!”
“아버지!”
루이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굉장히 당연한 선택을 강요했다.
“탑주를 믿으세요, 저를 믿으세요?”
“그야 당연히 탑주를…….”
그 순간, 말을 꺼낸 제라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것이다.
“저보다 탑주를 믿으신다고요? 왜요?”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들 결국 부녀다.
심지어 그 이유조차 두 사람의 공통된 아픔에 있지 않은가.
그런 딸보다 남을 더 믿는다고 말해 버린 제라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그럴 리가. 아니, 나, 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루이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세요, 아버지. 그리고 제 얘기를 들어 주세요. 지금도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제라드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딸을 응시하자, 루이사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운명을 바꾸는 자, 로건 맥라인을 만났을 때부터였어요. 그때…….”
루이사는 처음 로건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와 마주한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작게 금이 가는 느낌이 들며 미약한 의심이 피어났었다.
그리고 계속 그랑에 머물며 어쩌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에 생긴 균열이 조금씩 커져 갔다. 정확히는, 그동안 스스로 해 온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와 마주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탑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그 이상의 불안감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 이상 고민하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다시금 시작된 전쟁 속에서,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로건을 찾아간 것이 다시금 균열을 키웠다.
결정적으로 얼마 전.
“……탑주의 폭언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는 단순히 기분이 상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 변했다고 느꼈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잊고 있던 수많은 기억이, 탑주가 명하면 그녀가 실행했던 제물 의식 등의 기억이 우후죽순처럼 떠올랐으니까.
그렇게 기억이 봉인되었단 사실을 깨닫자, 자연히 탑의 행사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로건 왕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명줄을 마련해 두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 후에도 끔찍한 기억에 괴로워하던 찰나.
지금까지 완전히 간과하고 있던 진실이 뇌리에 번개처럼 떠오르며, 그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깨달은 진실은 바로…….
“탑의 마법으로도, 7클래스의 영혼 마법으로도 죽은 자는 살리지 못해요. 탑의 마법을 익힌 저는 알 수 있어요.”
그 말에 제라드의 마른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 아니야. 세뇌 마법에 당한 자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한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연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젓는 아버지를 보며 루이사는 얌전히 아버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탑주가 제법 공을 들인 마법일 거예요. 본래 저라면 결코 부수지 못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저번에 꽤 오랜 기간 로건 왕과 같이 계셨으니까.
‘그리고 탑주를 만나지 않은 지도 오래되셨지. 나보다 더.’
만약 운명을 바꾸는 자의 힘이 정말 탑의 마법을 깨는 것이라면, 아버지에게 걸린 마법 역시 상당히 약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하다.
루이사는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연한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아버지. 저를 믿으세요, 아니면 탑주를 믿으세요?”
“당연히 타, 탑, 으, 으윽! 아, 아니 너. 너를 믿는다, 딸아. 사, 사랑하는 내 딸…….”
제라드는 그 잘생긴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질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그 말을 반복했다.
“내 딸을 믿어야지. 암, 내 사랑하는 딸을……. 으윽. 타, 탑주 따위…….”
사랑하는.
그 흔한 단어 하나에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참아 내며, 루이사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생각만 쭉 하고 계세요. 족쇄를 풀어 드릴게요.”
우우웅.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6서클 마스터급에 이른 마도사인 루이사의 마력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에서야.
그리고 제라드가 몇 번의 각혈을 하고 나서야, 과거의 동익왕은 20년간 모르고 있었던 영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게 된 부녀를 반기는 것은 가혹한 현실뿐이었다.
“우리가……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 이제 와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한순간 십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아버지를 보며, 루이사 역시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단호한 목소리엔 결단력이 묻어났다.
“복수해야죠. 황제와 탑주. 모두에게.”
“지금 우리가 어떻게……?”
“로건 왕. 그에게 우리가 아는 모든 사실을 전해야 해요. 그리고 앞으로 알아내게 될 사실도.”
“……첩자 짓을 하자는 거냐?”
“……말하자면 그렇죠. 최대한 탑주와 마주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그렇게 부녀가 다시금 결심을 다진 다음 날.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탑에서 보낸 이가 그들을 찾아왔다.
“제라드 폰 아세리안 님과 루이사 님이시죠? 탑주님의 명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평범한 성인의 허리춤에나 올까 말까 한 난쟁이, 그것도 얼굴의 절반 이상이 보라색 점으로 뒤덮인 흉물스러운 난쟁이였다.
고귀한 핏줄에는 수많은 업(業)이 쌓인다. 핏줄에 쌓인 업은 그 자체로 신위에 닿을 계단이 될 것이니. 후인은 고귀한 핏줄을 신체(神體)로 예비하여, 쌓아 올린 영육의 단 끝에 올려라. 그리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