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58)
458화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대로에서 살짝 떨어진 숲에서 모닥불을 피우던 갈색 머리, 갈색 눈의 사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큰일을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른팔이 없는 노인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이로써 카셀 마탑은 더 이상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하겠군요.”
“모르죠. 무시하고 나타날지도.”
갈색 머리 사내, 변장한 로건은 그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사실 그 자신도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와 전쟁을 치른 후, 얼마 남지 않은 제국의 전력과 함께 성국을 상대하고 싶은 거라면 말입니다.”
그 말에 노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맥라인으로선 확실히 좋은 수이긴 합니다만…….”
“아……. 혹시 멋대로 신전을 이용하려 한 것에…….”
“아니, 아닙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이젠 신전이고 신이고,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노인, 하먼은 변장한 로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쓰러지기 직전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상태는 아니지만, 여전히 본래 나이보다 20년은 더 늙어 보이는 모습.
그야말로 한순간 폭삭 삭아 버린 하먼이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된 신앙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그것은 어렵겠지요?”
“……예. 아마도.”
9대신의 신앙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신들의 배덕을 증명하고, 그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절대신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문제는 애초에 진실을 밝힐 방법이 없을뿐더러, 어떻게 밝혀낸다 해도 독실한 신도들은 그 증거를 거부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신앙(信仰)에 빠진다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믿고 우러러봐야 하니, 의심은 죄악이라.
그래서 광신(狂信)과 독신(篤信)은, 불신자의 눈에는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신들은 지브릭 카셀이 강림하면 그들에 대한 신앙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 순수한, 때 묻지 않은 전(前) 성기사의 물음에 대한 로건의 답은 간단했다.
“……피로 지우는 것은 가능할 테니까요. 물론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피…….”
하먼의 늙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성국을 멸망시키고, 사제들을 죽인다.
9대신의 신앙을 믿는 자들을 탄압하고, 또 죽인다.
그것을 대륙 전역에 걸쳐 오랜 시간 반복할 수 있다면, 수천 년에 걸쳐 대륙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9대신의 신앙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단, 그것을 시행하려면 제국의 황제보다 더한, 그야말로 대륙의 지배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터.
그리고 설령 그럴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누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는가.
거짓된 신앙을 지우겠다는 이유만으로 대륙 전체를 피로 씻는 짓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제정신이 아닌 자만이 할 수 있을 테지.’
그 말인즉.
“……지브릭 카셀은 그러고도 남을 자라는 말이겠군요.”
“……예. 충분히.”
하먼은 로건이 마치 지브릭 카셀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신이 직접 지적하여 죽이려 하는 적의 화신.
그 정도 상황이라면 무언가 아는 것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카셀 마탑은 그런 미치광이를 재림시키려 하고, 그 최종 목표가…….”
“예. 저를 제물로 쓰려 한다더군요. 믿을 만한 정보원이 해 준 말입니다.”
“……신들은 당신이 그의 화신이라 했습니다만?”
“카셀 마탑은 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뭐 제물이나 화신이나, 저로서는 전부 끔찍한 소리입니다만.”
로건의 씁쓸한 웃음이 하먼의 가슴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건 어쩔 수 없겠군요.”
“……?”
“솔직히 신들의 작태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사실은 카셀 마탑이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렇지요.”
하아아.
하먼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에 머리를 처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이내 굳은 눈빛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들이나 그 괴물 같은 지브릭이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사도를 쫓아냈으니 이젠 지브릭을 막아야 할 차례지요. 폐하와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로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하먼 경.”
지금은 노쇠한 모습이지만, 영혼의 힘을 다룰 줄 아는 그는 이제 과거의 힘을 서서히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다면 기존의 용모를 되찾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오른팔은 어쩔 수 없겠지만.’
평생 검을 쥐어 온 오른팔을 잃은 것은 기사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지만 하던 가락이란 게 있는 법이다. 어느 정도 기력만 찾는다면 웬만한 오러유저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랬기에 로건은 그의 회복에 맞추어 이동 속도를 천천히 높이고 있었다. 다행히 카일 성의 일이 너무나도 빠르게, 그리고 좋게 해결된 덕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스승님의 영혼에는 미약하지만 흉터가 남았다. 하지만 하먼 경은 완전히 회복했어.’
그 차이는 실로 컸다. 하먼이 완전히 회복하기만 한다면, 어쩌면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다시 도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억지로 이끌어 낸 스승의 부활과, 우연이나 다름없는 하먼과 성녀의 ‘부활’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영혼 소생의 방법.
그 방법을 깨우쳐 클레이튼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로건은 하먼을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별말씀을요. 저를 구해 주신 것 또한 폐하이십니다. 그저 은혜를 갚겠다는 것뿐이니, 그리 괘념치 말아 주십시오.”
하먼 역시 로건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도달한 로건이 무언가 큰 벽을 앞두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기에 하먼은 그 기대에 확실하게 부응할 생각이었다.
‘로건 왕이라면 가능할 거야. 카셀 마탑, 그 미치광이들을 물리치고, 어쩌면 신들에게…….’
자신은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엿을 먹여 줄 수 있겠지.
신의 적, 그 화신.
그런 존재를 이렇게 든든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하먼으로선 너무도 슬프고, 또 분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런 감정은 잠시 접어 두어야 했다.
‘내 생각부터 확실하게 정리해야 해.’
극적인 부활. 그 이면에 담긴 신과 신성력에 대한 지식을 그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하먼의 푸른 눈이 점차 깊이를 더해 갔고, 그런 그를 로건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제국의 국경을 지나 루스펠하임을 향해 속도를 높여 가던 어느 날 저녁, 야영을 준비하던 하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일전에 말씀하셨던 영혼 소생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야 이성적으로 정리가 되는군요.”
심적인 정리가 끝난 것인지 한결 홀가분한 표정.
그래서인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안에 조금은 혈색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부탁드립니다.”
그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하먼이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평생을 믿어 온 진실이 거짓이었음을 설명하려 하니 새삼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짧게 이야기를 끝내고자 했다.
“……사제들은 오롯이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신앙을 갈고 닦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어차피 신에게 바칠 영혼이 잠식된 것뿐인데, 제가 왜 그렇게 배덕감을 느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제가 신앙자로서 생각하고 바라 왔던 헌신은, 제가 죽은 뒤 신의 곁에서 영생을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서 신의 복락을 누리며 영원을 함께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무언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 하먼의 표정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영혼 잠식이 시작되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더 이상 제가 아니게 될 거란 것을요.”
“……??”
애매한 표현에 로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먼이 마른 입술에 침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면, 신들로서는 저를 삼킨 만큼 그 격이 조금이나마 더 확장되는 것이지요. 제 영혼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육체를 얻는 것은 덤이지요.”
하지만 로건은 그 말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과 하나가 된다는 게, 사제들로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좀 전에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반문에 하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이내 가슴속에 쌓인 무언가를 토해 내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어제 먹은 돼지고기와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설령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 해도 고기가 된 돼지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쉽게 말해 신들의 눈에 비친 저는, 그들의 취향에 잘 맞게 요리된 음식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하먼의 비유는 참으로 신랄하고 직관적이었다.
“평생 믿음을 바친 존재가, 죽어서도 따르리라 생각했던 존재가…… 저를 음식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기뻐할 자가 있을까요? 어딘가엔 그런 미친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행히 저는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뿌드득.
이를 갈며 말을 마무리하는 하먼의 표정에서는 가슴속에 들끓는 한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 로건이 어색한 표정을 짓자, 하먼은 마른세수를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이내 그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얻은 것 또한 있습니다. 잠식되는 순간, 신과 제가 연결되는 그 짧은 순간 신이 가진 지식이 조금, 아주 조금은 제게 흘러 들어왔으니까요.”
신의 지식?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로건의 붉은 눈이 빛났다.
아주 분명한 목적과 욕망으로.
그 이유를 아는 하먼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며 가장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을 이어 갔다.
“……타락한 사제가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그래도 신을 믿기 때문에?”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독실한 신자지만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이는 왜 그럴까요?”
“……아?”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로건의 말문이 막혔다.
억지로 쥐어짜 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경전이나, 신앙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오랜 수행을 해도 신성력이 발현되지 않는 사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시지요? 그럼 그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로건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쉰 하먼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독실한 신자가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저 신과의 파장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죠.”
“하?”
“신은 최대한 많은 인간의 믿음을, 영혼을 얻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감을 키우고, 더 성장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신성력을 뿌리고 싶어 하지요. 정확히는, 자신의 흔적을 인간의 영혼에 새기고 싶어 합니다. 자기 거라고 이름을 적어 놓는 것과 비슷하지요. 한데 그 흔적을 새기지 못하는 경우는 그저 각자의 파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
“고작……?”
“예. 고작 그게 전부입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들이라 해도, 이미 상위 차원으로 승천해 버린 그들이 이 세상에 직접 내려올 수는 없으니까요. 성물을 통해 사도를 만드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대책이지요. 그것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큰 대가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큰 손해를 보는 것 같긴 한데……. 뭐, 그래서 지금껏 사도들이 강림했을 때마다 신전의 일을 더욱 크게 벌였던 거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하먼의 표정에는 어느새 냉소가 어려 있었다.
“9대신에게 있어 인간들은 그저 자신들을 살찌우기 위한 양분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일종의 양식장이라는 겁니다.”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뱉은 말.
그것은 이미 불신자가 된 로건에게조차 뼈아프게 와닿는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