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462)
462화
“이제야 간다.”
“정말 가는 거야?”
“저길 봐. 전부 동쪽 성문으로 움직이고 있잖아.”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론 역시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만세다, 만세야.”
“쉿! 들을라.”
“에이, 설마…….”
겁에 질려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대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제국의 군대가 도시에 주둔하는 동안 물자를 징발당한 상인들이었다.
강제로 재산을 빼앗긴 만큼 아무리 같은 제국인이라도 좋게 보기 힘든 것은 당연했지만, 이번에는 그 결이 좀 달랐다.
“걷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나.”
“저 정도 규모면 말소리도 좀 들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무서워…….”
리갈에 입성할 때까지만 해도 제국군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점차 조용해졌고, 사흘이 지났을 땐 주둔지 내에서조차 소음이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리갈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30만이 넘는 대군이 모여 있는데 그토록 조용하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주민들 사이에서 제국 병사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겼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제국군의 후위까지 동문을 빠져나갔을 무렵.
론의 상가 깊숙한 곳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 * *
“불꽃의 눈 리갈 지부의 급보입니다. 리갈에 있는 제국군이 진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급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하지만 그에 답변하는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그래, 올 때가 됐지. 오히려 생각보다 늦었어.”
“그리고……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소견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리갈 내부의 소문과 함께요.”
“분위기?”
부하의 말에 데미안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30만 대군이 진군하는데, 아무런 말소리도 안 들린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규율이 엄정한 군대라 하더라도, 전투가 코앞에 닥쳐 온 마당에는 불안에 떠는 이가 소수라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것도 지금 제국군처럼 내외로 악재가 가득한 군대라면 더욱.
심지어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부 소식도 모조리 끊겼답니다. 군납 상인들을 포함, 군대에 들어간 외부인 중 누구 하나 다시 나온 이가 없어 정보 수집도 어렵고요.”
그 황당한 보고에 데미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것이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어서 신중을 기했던 것으로…….”
비싼 마법 통신구가 모든 지부에 있을 수는 없다.
말을 덧붙이려던 부하는 그의 상관도 알고 있을 사실을 굳이 떠들지 않았다.
그리고 데미안 역시 제대로 된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빌어먹을!”
책상에서 일어난 책사가 내전을 향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수십만 대군이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소음도 없이?”
로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예. 일전에 말씀하시길, 카셀 마탑이 세뇌 전문이라고…….”
데미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놈들이라도 이 단기간에 그 대군을? 그건 어려울 텐데……. 리아, 어찌 생각하느냐?”
두 사람의 시선이 한옆에 있던 빅토리아에게 옮겨졌다.
스승의 소생 가능성을 물으려 두 번째 발품을 팔았던 빅토리아는 그 시선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온통 스승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주군의 의문을 해결해 줄 때였다.
다행히 그녀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최근 로건의 명령에 따라 분석 중인 것과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그것들’ 같은 게 수백 장이 더 있다면 가능합니다. 다만,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예산이 천문학적인 액수겠지만요.”
“천문학적? 얼마나?”
“아무리 제국이라도, 적어도 반년 치 예산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 봤자 그 흑기사들 10명 만드는 정도의 비용이겠지만, 효과는 확실히 이쪽이 더 낫겠군요.”
“제국에는 더 이상 그런 여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패배한다면 뒤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못할 것도 없을 듯합니다.”
“흠.”
데미안이 보탠 말에 로건은 생각에 잠겼다.
말이 쉬워 제국의 반년 치 예산이지,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일 터였다.
그 사용처 또한 이미 정해져 있을 막대한 돈이 한순간에 증발한다면, 당장 국가 전체가 마비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즉.
“……제국이 파산을 각오하고 돈을 쏟아부어 카셀 마탑과 동조했다면 가능하다는 말이로군.”
제국은 이미 맥라인을 정벌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건 본디 승리하더라도 바로 보상이 생기지 않는 소모성 재난이다.
‘기껏 이겨 놓고도 후유증으로 패망할 수도 있을 텐데.’
황제가 정말 미친 것인가.
아니, 그만큼 궁지에 몰린 것일 터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에 준비하려면 카셀 마탑의 마법사 대부분이 탈진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말에도 로건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마력 탈진이야 마도사급 이상은 며칠이면 회복할 테고, 수준 미만의 정신 마법은 지금 자신이 있는 이상 어차피 효과가 없을 테니까.
“……빌어먹을.”
대륙인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기저에 간직하고 있는 9대신의 신앙.
그 신앙의 중심지에 의해 교적으로 선포된 조국.
그런 상황이면 아무리 잘 훈련된 군대라도 사기가 바닥을 칠 수밖에 없을 테니 흡족해하던 차였다.
“기껏 제국군을 오합지졸로 만들었나 싶었더니…….”
모든 전력이 세뇌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니 절로 한탄이 나왔다. 기껏 만들어 놓은 절대 우위가 날아간 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30만이 넘는 대군이 후퇴도 두려움도 없이 덤빈다면, 적 전력이 대폭 강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초인이 몇 명 추가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심지어 리갈에서 진군을 시작했다면, 이제 전쟁은 며칠 남지도 않았다.
대책이 생각나지도 않을뿐더러, 무언가 방책을 마련한다 해도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제국은, 아마도 그것을 노리고 확실하게 정보를 통제했을 것이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짧은 기간이나마 확실하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당했다.’
로건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데미안이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괘, 괜찮습니다. 아군의 사기도 하늘을 뚫을 기세입니다. 세뇌당했다면 제대로 생각도 못 할 텐데, 맥라인엔 폐하의 힘이 있으니 물리치기 쉬울 겁니다.”
그 순간, 로건의 눈이 번뜩였다.
“……가만?”
데미안의 말에 무언가 영감이 떠오르는 듯했다.
“방금 뭐라고?”
“그, 그게 저희에겐 폐하가 계시니까 충분하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만, 이거 잘만 하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데미안이 눈을 빛냈다.
다만,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로건이 선수를 쳤다.
“리아, 그것들을 분석했을 때 패턴도 거의 같았나? 아니, 아니. 한 학파의 마법 자체가 일정한 패턴을 띄는 것이 맞나?”
“……예, 맞습니다. 보통은요.”
“그럼 그 마법의 패턴을 내게 알려 줄 수 있겠지?”
“가능은 합니다만, 마법사도 아닌 폐하께서 그건 왜……?”
“아니, 이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일단 해 봐야 알겠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어쩌면 이쪽에서 역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데미안과 빅토리아는 가슴속에 자리한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군주를 곁에서 보아 온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오러마스터의 힘이 만들어 낸 변화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아, 일단 그 패턴에 대해 나와 좀 더 얘기를 나눠 보자. 데미안, 너는 이만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해라. 이 건은 나와 리아에게 맡겨 두고.”
“……예. 믿겠습니다, 폐하.”
예전 같았으면 바로 따지고 들었겠지만, 데미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사가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저 저분의 말씀이시니 당연히 맞겠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할 뿐이었다.
‘……저 대책 없이 저지르고 보는 주군이 하는 말인데?’
왜 당연하게 들리지?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내 그 일말의 거부감마저도 잊어버린 데미안은 그저 웃는 얼굴로 얌전히 돌아섰다.
‘흠. 웬일로 순순하네.’
당연히 이유를 따지고 들 줄 알았던 데미안이 그냥 물러나자 로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지금은 당면한 문제가 더 시급했으니까.
그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려는데, 빅토리아가 당황스러운 말을 꺼내 들었다.
“패턴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폐하. 그런데 그 전에, 스승님에 대한 답을 안 해 주셨는데…….”
멈칫.
“아, 그래. 맞다. 그 얘기를 하는 중이었지…….”
입술을 질끈 깨문 로건은 스스로 자책했다.
궁금해할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주제를 피해 왔다. 마도사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 가족이나 스승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아이에게 안 좋은 말을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얘기가 나온 마당에야 더 피할 수도 없었다.
“……미안하구나. 아직은 클레이튼 공을 회복시킬 방도를 찾지 못했다. 성녀가 회복한 것은 신의 힘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
그 말에 빅토리아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졌다.
“……역시 그랬군요.”
“미안하구나, 리아.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소생시킬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나를 믿어 다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던 빅토리아는 그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의 군주인 로건이 자신과 오빠의 운명을 구해 준 사람이라면, 스승인 클레이튼은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켜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심지어 스승이 쓰러진 이유조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를 생각할 때면 항상 죄책감이 드는 요즘이었다.
다만, 눈앞의 주군은 언제나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 왔다. 아무리 무모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주변의 모든 이가 절대 불가능하다 외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군의 말에 새삼 희망이 생겼다.
“예, 믿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시 그 패턴에 관해 얘기해 보자.”
루스펠하임 내성, 옛 성주의 집무실.
로건과 빅토리아는 그날부터 꼬박 3일간 밤을 새워 카셀 마탑, 아니 황제가 남겨 준 스크롤에 관해 연구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제국군이다!”
경계를 서던 초병의 외침을 시작으로 성 전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원 위치로.”
“리베라티오랑 탄창! 점검해!”
“마법사들은 각자 자리로!”
빠르게 움직이는 맥라인의 병력.
그들의 머릿속에 절대자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믿어라.]“우와아아아!”
그 단호한 목소리는 모두의 마음에 엄청난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내 그들의 뇌리에, 아군의 배치도와 다가오는 적군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가 전해졌다. 병사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다시 한번 상기했고, 그것은 이내 탄탄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질 리가 없어.”
“우리에겐 폐하께서 계신다!”
“맥라인에 영광을!”
“꺼지지 않는 불꽃에 경의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터져 나오는 복명복창.
그야말로 하늘에 닿을 듯 치솟는 사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맥라인군은 다가오는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 무도한 침략자들. 신전까지 속인 가증스러운 맥라인을 제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제국 측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가 일순간 루스펠하임의 소란을 잠재웠다.
“이거……?”
“윽, 왜 이래?”
“뭐지?”
목소리 하나만으로 스산하게 차오르는 공포심.
병사들은 순간 소름이 돋아 오른 팔을 쓰다듬으며, 다시금 용기를 얻기 위해 그들의 지배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중앙 성벽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무섭게 일그러진 주군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무언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 하늘을 메울 듯이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타났다.